2021년 9월
1932년 생, 우리 엄마와 이모들의 엄마, 우리에게 외할머니라고 불리는 황영희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온 가족이 모이는 명절이나 휴일에 꼼꼼히 차려 내오시던 큰 두 개의 상에서 시작된다. 할머니가 그 집을 떠나신지 5년도 더 지났는데 여전히 3층 빌라 건물과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나오는 입구 방과 거실, 왼쪽 부엌, 그리고 다시 좌우 방 하나씩의 구조가 선명하게 그려진다. 거실에 접이 식탁 두세 개를 펴고 식사를 하고 과일을 나눠먹던 우리 가족의 모임 풍경이다.
요즘 영희 할머니는 등이 많이 굽으셨는데 엄마 말로는 맨날 쪼그려 앉아서 요리며 집안일을 해서란다. 점점 거동이 불편해지시면서 할머니의 굽은 등은 가족을 위한 노력의 훈장으로 남기보다는 그러지 말았어야 하는 안타까운 과거가 되어간다. 무기력해지는 신체조차 한 사람의 삶의 기록이라 말하는 것이 그 현실을 함께하는 이에게는 통 현실을 모르는 소리일지 모르지만 - 누군가의 도움 없이 소파, 침대, 식탁을 오가기 어려운 할머니를 부축하고, 이동시키는 육체 노동이 할머니 돌보기의 8할이기에 - 할머니 삶의 역사를 명랑하게 바라봐주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의 마음이다.
요즘도 할머니는 할아버지 식사를 차려드리러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종종 하신다. 정신이 온전하지 않아서 하시는 말이지만 그만큼 할아버지와 가족들의 끼니를 챙기는 것은 할머니 일생의 가장 중요한 의무이자 역할이셨던 것 같다. 언제나 정갈했던 할머니의 부엌이 떠오른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다. 조금 더 일찍 할머니와 직접 할머니 음식을 만들며 이 기록을 남겼다면 좋았겠지만 그냥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려고 한다. 몸과 마음이 조금씩 사라져 가는 할머니를 보는 일은 속상하고 슬프고, 직접 돌보는 일은 어려움 투성이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일상이다. 어쩌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이 시간을 정의하고 작은 즐거움을 만들고 찾아가는 게 앞으로는 더 필요할지 모른다. 지친 엄마와 이모 대신에 한 발 떨어져 있는 내가 할머니표 음식들에 대해 묻고 만들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할머니 인생의 레시피를 남겨보려고 한다.
익숙한 것을 정리하고 정의하는 것이 원래 더 어렵다. 할머니의 요리 스타일과 맛은 엄마에게 당연한 것이고 오랜세월 주부생활의 가이드였기에 새삼 이름 붙이기가 어색할 수 있지만 나는 딱 맞는 이름을 찾아드리고 싶었다.
#정성스러운 #고급진 #보기 좋은 #예쁜 #플레이팅에 신경 쓴 #일식 스타일 #깔끔한 맛...
엄마에게서 나온 단어들을 모아 내 마음대로 이름 붙였다.
정갈한 서울 밥상
아직은 미완성의 이름, 이 기록이 끝날 때쯤 영희 할머니의 레시피를 온전하게 표현해줄 더 알맞은 이름을 찾길 기대해본다.
앞으로 만들어 볼 음식들을 아래에 적어봤다. 천천히 즐겁게 할머니 이야기 많이 나누면서 만들어가고 싶다.
그럼 엄마와 이모가 고른 할머니의 시그니처 메뉴 '국물 자박자박 깍두기'로 시작해본다.
된장찌개/된장국 (feat. 시금치, 배추, 아욱, 근대)
된장 죽
콩나물밥과 누룽지, 오이냉국
소면
육개장 - 여름 보양식
껍질 없는 깨끗한 닭백숙
미역국
제철과일 두세 가지를 한 접시에 (홍옥, 부사, 인도 사과, 배, 홍시, 귤)
아귀찜
추어탕
깍두기
무생채
어리굴젓
자박자박 콩자반
탕국(feat 토란)
콩나물과 무나물
쑥갓과 빨간 고추가 올라간 빈대떡
동그랑땡
약식과 밤
떡만둣국
칼국수
감자튀김, 고기튀김
흑임자, 계란, 당근, 우엉이 들어간 유부초밥
식혜
수정과
단팥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