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별 그리고 사람

잊혀지는게 아까워 다시금 꺼내어보는 기억

by 리미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어서 일까 기억은 늘 미화된다. 아침마다 출근하며 겪는 지옥철 마저 육 개월 이상 겪지 않으면 가끔씩 그리워지는 걸 보면 망각의 동물이란 표현은 꼭 과장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4년 전 가을이 올 때 즈음의 나의 기억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아름다워지는 걸 보면.


글로벌 펜더믹이라는 내 인생에 전례 없는 이슈는 나의 30대를 시작하는 첫 해를 더욱 암울하게 만들었고 집에 있든 시간이 늘어나다 보니 생각할 시간이 많아지게 됐고 여행이 어려운 요즘 문뜩문뜩 4년 전 떠난 배낭여행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짙어진다.

그 당시 우리의 나이는 26살. 나는 한창 인턴을 하고 있을 시절이었고 남자 친구는 대학교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한 상태. 용기 있게 우리는 23kg의 배낭을 들쳐업고 6개월간 세계여행을 시작했다. 가난한 사회 초년생과 대학교 휴학생은 무조건 돈을 아껴야 했고 그렇게 우리는 카우치서핑이란 사이트를 알아냈다. 카우치 서핑은 에어비앤비처럼 현지 사람 집에서 머무는 건데 무료이다. 카우치 서핑의 모토는 집에서 전 세계 여행객들을 만나 문화교류를 하자(?) 정도였던 것 같다. 처음에는 이걸 왜 하지? 수익을 내는 에어비앤비도 있는데 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더라. 호스텔에 가서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 하지만 여행 중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는 우리는 생김새도 언어도 다르지만 오고 가는 별거 아닌 대화에서 느껴지는 그 감정들. 서로의 직업도, 부도, 학벌도 모르는 아무런 선입견 없는 상태에서 그저 같은 나라, 같은 공간을 여행한다는 우연함이 이끌어낸 대화. 언어의 장벽으로 인해 더욱 순수해질 수밖에 없는 대화 속에서 그 사람은 그날의 냄새, 온도, 그리고 하늘색과 같은 오감으로 기억된다.


이러한 경험을 해본 사람들은 절대로 그 감정을 잊지 못한다. 때문에 사람들은 카우치 서핑의 호스트가 되기를 자처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유럽에서 우리를 반겨준 수많은 카우치서핑 호스트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만나 한 달 동안 5개국을 함께 여행한 친구들. 25시간 연착된 기차에서 음식을 나누어 주던 인도 친구들. 높아진 하늘과 기분 좋게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느껴지면 늘 창고에 있는 내 파란색 오스프리 가방을 들쳐업고 떠나는 상상을 하곤 한다.

계획이 없는 우리의 여행은 그저 마음 가는 대로였다. 그곳이 좋으면 며칠씩 머물기도 했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떠나기도 했다. 시간마다 색깔이 바뀌는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석양을 뒤로한 까를교에서 몇 시간씩 멍을 때리기도 했고, 출근시간 요크의 스타벅스에서 영국 신사들의 아침 시간 그 소리를 녹음하기도 했다. 나미비아에서는 지평선까지 가득 찬 별을 보며 벅차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케냐에서 기린을 처음 마주한 순간, 그 크고 아름다운 자태는 나에게 신성하다는 느낌을 주기까지 했다.


낯선 나라, 낯선 사람, 낯선 언어 속에서 곧 내 남편이 될 가장 익숙한 사람과 함께 했던 6개월.

잊혀질까 무서워 다시금 꺼내어 본다. 돈을 아껴보겠다며 땡볕에서 23kg 무게의 배낭을 메고 1시간 이상을 걸어보기도 하고, 외국인은 보기 힘든 1인석에 2명을 태우고 달리는 달라달라 버스도 타보고, 길거리 음식을 잘못 먹고 탈이 나서 탈수가 오기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기억은 희미해지고 기억은 점점 미화가 되고 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6개월. 코끝이 제법 시린 가을밤. 지금 내방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이 바람이 그때 만났던 별, 그리고 내 여행을 더 아름답게 해 줬던 사람들을 거쳐 돌고 돌아 나에게 온 것은 아닐까 란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