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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캔디 Jun 27. 2023

미운오리인 줄 알았는데, 우리는 백조였어.

[윤캔디의 성장에세이] PART2. 넘어지고 일어서고

 나라는 사람은 기회의 파도가 다가오면, 일단 그 파도에 몸을 한 번 맡겨보는 사람류이다.

 긍정적인 시선으로 보자면, 모든 일을 일단 몸으로 부딪혀 보는데 주저함이 별로 없으니 추진력이 아주 좋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무엇이든 양날의 검 인법.

반대편의 나는 찾아오는 기회의 파도라면, 언제든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는 다소 줏대 없는 사람임을 고백해 본다.



 처음부터 대기업 입사를 꿈꾸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기회가 왔을 뿐.

학창 시절 꿈은 언론인이 되는 것이었다.

기자이셨던 아버지의 영향도 있었고, 대학시절 잠깐했던 학보사도 적성에 잘 맞는듯했다.

베트남에서 독자 칼럼으로 기고한 베트남의 질서문화에 대한 글은 사회적인 이슈로 대두되어, 베트남의 가장 큰 신문사로부터 올해의 독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몸에 어느 정도 언론인의 피가 꿈틀은 대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까, 이것은 숙명인가 했지만.

또 그렇게 ‘너 아니면 안 되겠어’까지는 아니었다.



 그리고 졸업을 앞둔 방학, 교수님과 전자상거래 현황에 대한 논문을 함께 쓰던 중이었다. 자료조사를 하면 할수록, 문득 ‘이거다’ 싶은 느낌에 인터넷 쇼핑몰을 차렸다.

바야흐로 10년 전이면 아직 베트남에 인터넷 사이트의 시스템도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을 때였다.


 하지만, 베트남은 오토바이로 시내 어디든 갈 수 있는 나라 아닌가. 호찌민에 사는 고객으로부터 주문을 받아 오토바이 배달을 하면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베트남에 일하는 여성을 주 타깃으로 한 오피스 의류를 파는 이름하여 ‘오피스퀸’ 쇼핑몰을, 통역으로 모아 놓은 돈을 투자해 차리기도 했었다.


 그런데 사이트 오픈을 하고, 홍보를 준비하던 중 갑자기 대기업에서 채용을 한다는 공지가 뜨고, 나는 또 내게 밀려온 기회의 이 파도를 타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그렇게 얼떨결에 취직이 되었다.


 그때는 한 가지를 시작하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할 것만 같다는 생각에, 열심히 준비했던 쇼핑몰을 베트남에 남겨둔 채 한국으로 넘어왔다.




 좀 뜬금없지만, 그렇게 나는 갑자기 회사에 입사했다. 홈쇼핑 회사. 그런데 또, 굳이 내가 찍은 점들을 선으로 연결해 합리화해 보는 실력을 발휘해 보자면, 언론인을 꿈꾸다 인터넷 쇼핑몰사업을 준비하던 나는 이 회사와 운명적 만남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너무 갔으니, 빨리 제자리로 돌아오려 한다.)


 어쨌든, 그렇게 얼떨결에 들어가서 인턴을 하게 되었다.

 인턴을 할 때에는 그룹에서 채용된 모두가 해외 대학 출신의 친구들이었다.

다양한 나라의 대학교에서 공부해 온 친구들과 있을 때는 그 친구가 선진국의 명문대 이든 아니든,

난 기죽지 않았다. 나도 나름 베트남의 명문대가 아니던가.



 하지만 공채 친구들을 만나는 순간, 학벌에 대한 자격지심 따위는 전혀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이상하게 기가 죽는 것이었다.


 알 수 없게 주눅이 들었다. 만약 내가 어렸을 적부터 외국에 살아서 자연스럽게 대학을 입학하였거나,

또는 한국에서 원하는 대학교에 합격을 하고 나서 베트남에 간 것이라면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수능에 실패했고, 원하는 대학에 진학을 하지 못했던 자였던 것이다.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물론 그래서 베트남에 간 것으로 귀납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수능실패라는 사실은 내게 여전히 아픈 그 무엇이었다.


 아무도 나를 무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인턴으로 합격한, 같은 기수의 우리는 ‘동기’였다.

서울대 나온 친구와는 같은 동네라서 매일 지하철을 함께 타고 다녔고, 제일 친했던 동기 둘, 란이 와 승식이는 나란히 연세대, 고려대였다.

와, 이 친구들은 또 왜 그렇게 인성도 좋은지. 콧대 높고 속된 말로 싸가지없을 줄 알았는데 동기들은 학벌뿐만 아니라 인성도 탑급이었다. (회사 인사팀의 눈썰미에 경의를 표한다. )



 그렇게 우리는 모두 친하게 지냈다. 나 역시 천성이 사람을 좋아하는지라 동기들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냈다. 맹세코, 그들이 좋은 학교를 나왔다고 시샘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럴 수가 없었다. 너무도 좋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나는 자격지심이 있었다. 그 자격지심이 그들에게 툭하고 뾰족한 가시로 변한 적은 없었지만, 나 스스로를 참 많이도 찔러댔다.


 내가 ‘다르게’ 이루어 온 과정들도 충분히 스스로 칭찬해 줄 법도 하지만, 나는 늘 부족한 점만, 내가 가지지 못한 것만 보았다.

 나만이 가진 해외생활의 경험과 베트남어라는 가치 있는 것에 대한 자부심보다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경영이나 마케팅에 관한 학부지식을, 그리고 그들이 가진 학교의 이름을 더 부러워했다. 아, 창피하지만 솔직히 그랬다.   



 시선 한 끝의 차이이지만, 수능에 실패하고도 이렇게 나란히 그들과 서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 대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일 텐데... 그렇게 긍정적으로 베트남에서 나름 열심히 지내온 나를 바라봐줬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땐 왜 그렇게 스스로에게 옹졸했을까.


 나에 대한 주눅과 자격지심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그들을 미워할 수 없으니,

나를 열심히 채울 수 밖에는 없는 것이었다.


나 스스로 증명해 보려 참 애쓰는 시간들이 이어졌다.


증명의 기회는 스스로 만들 필요도 없었다. 회사에서 신입들의 동기부여를 위해 많은 경연대회를 열어주는 것이었다. (동기부여인지, 앞으로의 펼쳐질 경쟁구도의 예고편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홈쇼핑의 꽃이라는 MD직군을 모아, 상품 기획을 제일 잘한 자(임원분들을 가장 그럴듯하게 설득시킨 자)에게 해외 출장의 기회를 주었고, 그룹 차원에서 마케팅 페어라든지, 또 가장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내놓는 팀에게 역시 중국여행(이라 적고, 중국 내 진출한 그룹 탐방)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참 재밌는 건 학교 다닐 때 전교 1등도 한 번도 못해본 나였지만. 이 많은 경연 대회에서 모두 1등을 해, 3관왕의 기록을 세웠다.


 회사에 들어온 이후로, 스스로를 미운오리로 낙인을 찍었던 나였다. 부족한 면에 스스로 기가 죽어, 기죽지 않고 싶어 마케팅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경쟁구도의 형식이긴 했지만, 나는 그들과 하는 경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나는 다른 동기들과 경쟁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그 정도로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냥 너무나 부족한 나를 채우고 또 채우고,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또 생각해내려 했다. 그런데, 1등이라니. ‘어안이 벙벙’. 그렇게 멍한, 행운의 연속들이었다.


이 1등은 지금껏 내게 꽤나 특별한 기억으로 마음속에 저장되어 있다..  


 스스로를 너무 작게 보고, 미워하던 내가 나의 반짝거림을, 내 안의 알맹이를 발견한 기회였다고나 할까.


 지금이야 스스로 많이 아파하고 괴롭혔던 시간을 거쳐가며, 또 돌고 돌아와 내 안의 반짝 거림에 자부심을 가질 줄도 알고, 소중히 여길 줄도 알게 되었지만 20대의 나는 늘 나의 서툼과 부족함에 스스로를 많이 채찍질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아마, 20대. 2라는 앞자리 수는 누구에게나 그런 게 아닐까 싶다. 3이라는 숫자는 그래도 생김새를 보아도 위와 아래의 균형이 있는 것이다. 2라는 녀석은 불룩하게 방황하다 찌익 주저앉아 버린다.


내가 잘난 것만 보든지, 혹은 내가 가지지 못한 것만 보든지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다시 그 방황의 시간을 거쳐 채우고 나면 3이라는 숫자가 되면 조금은 균형 잡힌 시각으로 이렇게 나를 볼 수 있는 게 아닐까.



 나는 그들을 부러워했지만, 어쩌면 또 20대의 그들은 나를 부러워했을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문득, 동기들끼리 모여 수다타임을 가지던 중, 홍오빠가 했던 농담이 떠오른다.


 회사의 베트남 사업 확장 소식에, “야, 선애가 여기서 제일 임원감이지! 우리 다 잘려도 얘는 베트남이라 절대 안 잘린다” 하고 말하던.


‘홍오빠 알지? 나 임원에 ㅇ도 구경 못하고 내 발로 나온 거?’  



 그리고, 우리 기수 MD 동기들은 참 재밌게도 모두 그렇게 회사에서 나와 각자의 길을, 자신의 색깔대로 그렇게 걸어가고 있다.


그래서 그렇게 다들 캐미가 좋았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개성이 중요한 사람은 각자의 개성도 존중해 주는 법이니까 말이다. 사실, 나도, 그들도 우리는 모두가 ‘백조’였던 것이다.  


 조만간 회동을 앞두고 있는 우리 동기들.

이제는 나도, 더 이상 그 어떠한 자격지심 없이 그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편한 마음이다.


예전에도 참 사람 편하게 해주는 그들이었으나,

이제는 내 마음이 더 아늑하게, 그들의 마음과 함께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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