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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그리뜨 Jun 08. 2024

파리에 가니 샤넬이 생겼다


10년 가까이 일을 해왔지만 비행기 티켓 말고, 여행 경비 말고, 어떤 물건을 사기 위해 천불 이상을 지불해 본 적은 없다. 명품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닌데 나를 위해 명품을 사본 적도 없고, 딱히 그 돈 주고 사야 되나 싶기도 하고, 이런저런 생각으로 처음으로 거금 주고 샀던 명품은 루이비똥에서 샀던 아빠의 환갑 선물이었다. 근데 아빠는 루이비똥이 뭔지 몰랐다.


그래도 프랑스에 갈 거니까 이것저것 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필요한 것들이 있었고 싸게 살 수 있는 기회였다. 특히 여행에 나서면서 이모와 로퍼를 한 켤레씩 사기로 결심을 했었다. 기본 중에 기본, 회사에서 그리고 일상에서 단정하게 오래오래 신고 다닐 까만 로퍼가 하나 있으면 싶었다. 그리고 10년 동안 써서 너덜너덜해진 키체인이 달린 카드지갑을 새 걸로 하나 마련하고 싶었고 예쁜 선글라스가 하나 사고 싶었다. 우리가 여행을 갔던 기간은 운 좋게도 프랑스의 여름 세일 "솔데" 기간이라 이것저것들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평생 쇼핑에 큰 관심이 없던 내가 파리에서 쇼핑 포텐셜이 터지는 일이 일어난다


파리가 처음이 아닌, 쇼핑이 적성인 이모를 따라 봉마르쉐 근처에 있는 에르메스에 갔는데 웬걸, 에르메스에서 이모랑 나랑 찾던 바로 그 까만 로퍼를 찾았다. 이모와 나는 신발 사이즈가 같은데 심지어 이모와 내 사이즈의 까만 에르메스 로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근데 까만색에 찾는 사이즈는 이거 한 켤레 밖에 없는 데다 신발이 나한테 불편한 것 같기도 하고 해서 이 신발은 이모 하라고 양보했다. 다른 예쁜 까만 로퍼를 또 찾을 수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들어가자마자 로퍼를 득템 해서 나온 아주 뿌듯한 쇼핑이었다.





며칠 뒤에 간 봉 마르쉐에서 구찌 로퍼도 보고 셀린 로퍼도 보고 했는데 딱히 맘에 쏙 드는 로퍼를 찾기가 쉽지가 않았다. 구찌 로퍼는 편하지만 평범하고 약간 못생겨 보였고 구찌 로퍼 주인님들 죄송합니다 셀린 로퍼는 이쁜데 불편해서 사봐야 도저히 신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샤넬에서 한눈에 뿅 가버린 까만색 로퍼를 만나고야 말았다. 샤넬이라니? 그것도 샤넬에서 가방도 아니고 소모품 중 소모품인 신발이라니? 근데 뭐에 씌었는지 어느새 지갑에서 주섬주섬 카드를 꺼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엄마는 뒤에서 나를 한심하게 바라봤고 이모는 나를 응원했다. 생각보다 편했고, 예쁘고 예쁘고 예뻤다. 심지어 사이즈도 내 사이즈 딱 하나가 있었다 이게 과연 진실인지 궁금하다. 이렇게 비싼 물건을 사본적이 없어서인지 선뜻 카드가 내밀어지지가 않아 2분 정도를 손을 덜덜 떨며 어떤 카드로 결제할 것인가 머뭇머뭇거리다가 점원에게 카드를 넘겨줬다. 머리가 약간 복잡했다. 이 신발이 뭐라고, 신발에 1400불 넘게 지불했지만 10년이나 열심히 일한 나에게, 마음에 쏙 드는 샤넬 선물로 파리 여행을 기념할 수 있다니 뿌듯하기도 했다. 미국으로 데리고 와서는 여름 내내 계속 비가 오는 데다 밑창을 대는데 오래 고민하느라 개시하는데도 몇 개월이 걸렸지만 예쁘게 잘 관리해서 앞으로 오랜 시간 함께 했으면 좋겠다 밑창대주는 구두가게 사장님이 몇십 년 동안 신을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했다 파리에 가니 샤넬이 생겼다. 너무 예뻐서 볼 때마다 신을 때마다 기분이 좋은, 심지어 파리의 즐거운 기억까지 함께 묻어있는 소중한 물건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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