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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yphapha Dec 21. 2020

인내와 경계의 사이

(feat.부부의 세계)


결혼생활과 연애기간의 합이 딸의 나이 두배보다도 더 많다.

긴 연애기간 동안 헤어졌다 붙었다를 여러 번 경험하기도 했지만 결론은 이놈이 아니면 안 되겠다 싶어 선택한 내 사람이었다.

우리는 남들이 보기에는 싸움과는 거리가 아주 먼 다정한 잉꼬부부다.

그러나 현실은 한 번도 싸우지 않을 것 같다는 사람들의 바램(?)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연애할 때는 싸움도 의견도 화해도 내가 남편보다 늘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그와 평등하게 지내다가도 위에 있거나 아래에 있거나를 반복한다.

결혼 후 나는 굼벵이가 매미가 되기 위해 허물을 벗는 과정처럼 여러 번의 인격 성장을 거쳐 배려라는 것을 익히고 참을성을 배워가며 행복한 결혼생활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

과거에 나와 남편의 연애 일대기를 알고 있는 친구들은 나를 보면 남편을 잘 만났다고 하지만, 듣기 좋은 소리인지는 몰라도 남편은 우리가 잘 만난 거라고 에둘러 말한다.



gettyimages.com




나는 남편과 잘 만났다. 그리고 우리는 잉꼬부부'인' 편이 맞다.

결혼식 폐백에 시할머니가 나에게 남기신 말씀처럼 나는 그렇게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가슴에 참을 인자를 새기고 살어. 알긋제?"

"... 네" (... 제가요?)

그러나 결혼생활 8년 차를 돌아보니 시할머니 말씀처럼 내가 '참을 인'자를 새기고 살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관계가 여러 번 흔들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과 연애는 달라서 연애하듯 결혼생활을 하면 유지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나의 생각을 남편도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싸움이 커지기 전에 그 자리를 피해버리는 기술을 터득했다.

과거의 남친들과는 정반대 되는 차선의 선택이다. (아마 그렇게 싸웠다면 남편이 한 달에 한 번은 이혼합의서를 내밀었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남편은 연애할 때 쌓아둔 게 많았는지 한번 삐뚤어지면 대들기도 하고 까불기도 하고 말대꾸도 잘한다.

싸우고 나면 돌아서서 생각하는 것이 내가 그를 나와 평등한 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늘 이겨야 하고 무조건 내 말에 따라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싸우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는 우리가 사실은 곧 잘 싸우지만 우리만의 싸움의 기술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래서 우리가 싸워도 오래가지 않거나 일단락이 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싸움이 시작되면 그 상황의 이야기만 한다. 그리고 싸움이 더 커질 것 같으면 언성을 높이지 않고 마무리 태세를 갖춘 후 그 자리를 피해버린다.

남편은 쪼잔하게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지만 그 이야기를 철두철미하게 분석까지 하는 사람이라 듣고 보면 납득이 가도록 이성적으로 설명한다.

돌아서면 나는 그의 말에 수긍하고 반성의 시간을 보내다가 따뜻한 언어로 화해의 메시지를 보내면 남편은 빨리 풀어진다.

그리고 싸움에서 마음이 안 좋았던 일은 그날 바로 풀지 않고 화해한 이후에 웃으며 말한다.








지난번 싸움에서 패(?)한 후 나는 남편에게 우리가 왜 잘 만난 것 같냐는 질문을 했다.

"당신은 싸울 때 내가 참을 수 있는 경계까지만 딱 버틸 수 있게 그 선을 넘지 않아."

남편은 보살과도 같은 성격이지만 결혼 후에 이 사람도 화를 낼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를 깨달았다.

연애 때처럼 결혼 후에도 이 사람을 내 마음대로 주무를 줄 알았건만 그런 관점에서만 본다면 나는 사기 결혼을 당한 셈이다.

연애할 때는 몰랐던 성격이 결혼 후에야 슬슬 실체를 드러내는 것을 보고 순간의 배신감도 느꼈으니까.

그러나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빨리 화해하고 리셋되는 시간이 짧은 것은 아마 남편의 인내와 나의 경계가 어우러진 결혼생활의 이중주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젯밤에도 훅하고 들어온 말싸움 때문에 기분이 나빠진 내가 음식물 쓰레기를 핑계 삼아 동네 마트를 다녀왔다.

지난주부터 남편과 곧 잘 마신 와인을 사러 가기 위해서였다.

남편은 30여분이 지나 돌아온 나를 보며 말했다.

"어디 다녀왔어?"

"마트에 (점퍼 주머니에 꽂아둔 와인을 꺼내 보여주며)"

"어디 갈려면 말하고 나가. 그러다가 무슨 일 있어서 연락 두절돼도 싸워서 나간 줄 알고 안 찾겠다"

"응"

"어휴 진짜 내 성격이 이래서 다행이지. 안 그랬어봐 우울증에 걸렸거나 폭발했을 거야"

"누가?"

"나지! 그럼 너겠니!"

우린 둘 다 막 웃었다.




저녁 먹고 아이를 재우러 가면서 내가 사 온 와인을 마시겠다는 남편에게 내가 말했다.

"나도 깨워. 같이 마시게" (속닥속닥)

"어제도 깨웠더니 짜증 냈잖아"

"아니야 깨워 나 일어날 거야"

눈 떠보니 오늘 새벽이다.

남편은 아마 혼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거다.

방해받고 싶지 않은 시간에는 방해하지 않는 편이 좋으니까 나도 푹 잔 걸로 와인을 대신한다.







#부부의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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