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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yphapha Jul 06. 2023

그럴 수도 있지와 그러라 그래.

동네 엄마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난 복권집이 있다. 

그 복권집은 특이하게도 매주 수요일과 일요일 두 번을 쉬는데, 처음엔 그걸 몰라 허탕을 친적도 있었다. 

장사가 잘 된다는 소문난 복권집임에도 불구하고 평일에 쉰다는 사실이 의아하다는 이야기 하며 나는 남편을 데리고 그 복권집에 갔다. 

"자동 5천 원이요"

대부분의 복권가게는 이런 식이다.

내가 가본 몇 곳의 복권가게는 가게가 자리 잡은 형태에 따라 판매하는 분의 태도가 달라지긴 했는데, 가령 상가형 복권가게의 경우와 이동형 복권가게는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남편과 들렀던 과거의 상가형 복권가게에서는 복권을 사가는 사람들에게 "당첨되세요"라던지 "1등 되세요"라는 기분 좋은 말을 해주기도 하지만, 이동형 복권가게는 상대의 얼굴을 대면하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대부분의 주인은 아무런 답변도 없이 상대의 얼굴을 마주하지 않으려는 듯 작은 복권가게의 창문을 절반이상 천으로 가려놓고 손만 뻗어 자동 번호가 인쇄된 복권용지를 주는 시스템이다. 

확실한 용건을 가지고 사람들을 만나는 이동형 복권집에서는 복권을 판매하는 사람도 복권을 구매하는 사람도 서로의 얼굴을 볼 일도 볼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날 나는 남편과 함께 복권가게 앞에 도착해서 잠시 서성거렸다. 수기용 복권용지가 우리 눈에는 띄지 않아 찾고 있었다.

역시나 작은 창문을 가린 천막 안쪽으로 사람의 그림차로 보이는 실체가 있었기에 우리는 주인에게 복권 종이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때 얼굴 없는 주인은 짜증 내며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앞에 있잖아"

"안 보여서 그랬지유~"

나는 상대에 대한 무례함을 농담 섞인 말투로 되받아치며 주인에게 말을 했다.  속마음은 "뭘 그렇게 짜증을 내셔?"였다.

복권종이에 표기를 한 남편이 종이를 건네며 "5천 원이요"라고 말하자 말없이 현금과 종이를 가져가더니 이내 숫자가 적힌 용지를 쑥 건넸다. 퍼런 혈관이 불뚝불뚝 보이는 거죽만 남은 마른 손은 까칠한 주인의 마음과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받아 들고 돌아서며 여기가 아무리 1등이 많이 나와도 앞으로는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어른이라도 반말을 한 것과 질문하는 손님에게 짜증을 부렸기 때문에 이런 가게에 와서 돈을 쓸 필요가 없다고 했다. 반대로 나는 용건만 해결하면 되는 곳이라 확률적으로 복권 맞을 기회가 크다면 올 거라고 했다. 주인이 짜증을 내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는 그 사람 자체의 감정이기 때문에 내가 안 받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분명, 태도가 기분 나쁜 사람을 만나면 나 역시 기분이 안 좋아진다. 다만, 그 사람이 내 곁에 오래 두고 보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수단으로써 만나는 사람이거나 거의 마주칠 일이 없는 사람이라면 나의 편의를 위한 수단으로는 대수롭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될 것 같다.

예를 들어 우리 집 앞에 있는 카페가 그다지 친절하지는 않지만, 커피가 너무 맛있고 가까운 곳에 딱 한 곳이 있다면 내가 가깝고 맛있는 커피를 마시는 것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내 그 카페를 가는 것은 그 점원과 친하게 지내러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곳에 가면, 당첨이 될지도 모르다는 나의 호기와는 다르게 남편의 감정은 상해버려 아쉬웠다.

예전의 나 같았다면 나도 함께 기분이 불어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그런 사사로운 감정들이 단 몇 분이라도 나의 기분에 오염되는 걸 막고자 나 스스로 방어막을 만든 것 같다. 

미묘한 차이지만, 그럴 수도 있지와 그래라가 내 안의 뽑기 기계에서 막 돌아가다가 뽑는 기분이다. 

이건 생각하기 나름인듯하지만, 사실은 좀 오래 숙련된 시간이 있어야 가능하다.

조금 무던하게 생각하면 그가 꼭 나를 겨냥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그 사람 자체의 문제인 것이라고 생각하면 흘려듣게 된다.

그렇다고 내가 부당한 것을 참느냐? 나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다. 부당한 것과 불쾌한 것은 다르고 나는 불쾌한 상황이 오면 나 스스로 내 감정에 침투되지 않도록 투명 막을 치는 것 같다.


즐겁기에도 부족한 찬란한 하루하루를 그런 사소한 감정들에 매여 곱씹고 또 곱씹으며 이를 갈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 2~30대에 진작 깨달았다면 내 아까운 에너지를 그런 곳에 쏟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말이다.

마흔이 넘어보니 흔들리지 않는 침대라는 광고 카피처럼, 내 안에 감정들이 외부로 오는 사소한 영향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는 기술이 쌓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그럴 수도 있지라는 이타적인 생각도 드는 걸 보니 나이가 한 살씩 추가되는 것은 나는 더 단단해지고, 겉으로는 더 부드러워지는 상태가 되는 것 같다.

복권 역시 당첨될 리 만무하다. 

좁은 공간의 밀폐감이 그런 여유를 주기는 불충분한가 보다.

이럴 땐 나는 내 안의 회전판을 돌린다.

오늘의 뽑기는 '그러라 그래~'였다.

@byphap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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