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노우에 야스시의 여행 이야기
오랜만에,
참 괜찮은 책을 만났다.
언제부턴가 책 한권을 손에 들면 끝장을 내고야 말겠다는 전투적인 자세의 독서습관이 여러 권의 책을 천천히 돌려 읽는 습관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이번 책도 그런 책 중의 하나.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한 지 약 2개월여 만에 완독을 하였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저자 고 신영복 선생님을 참 좋아하는 나.
지난해부터 그분의 평전과 마지막 강의 모음집 『담론』을 아주 천천히 읽으면서 그분의 강의나 저서에 인용이 되었던 작가들의 책을 함께 찾아 읽는 취미가 생겼다.
이 책도 그런 연유로 나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보통의 여행기라면 순식간에 읽히는 것이 당연할텐데, 저명한 일본 작가라는 사람의 이번 여행기는 세계 각국의 여행기를 담백하게 그려냈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단락별로, 나라별로 구분된 목차가 있어 그나마 잠시 손에서 놓았다가 다시 들어도 낯설지는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오래도록 집중이 되질 않는 책이었다.
이탈리아 여행 이야기
베네치아에서 어디가 제일 좋았냐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산 마르코 광장을 들 것이다.
산 마르코 광장에서 차를 마시면서 오래된 성당 건물 외부를 실컷 보고 난 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다.
성당에서 나오면 다시 한 번 레스토랑 테라스에 앉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때 비로소 이 광장이 비교할 데 없이 사치스러운 곳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광장은 사람이 많은 데 비해 조용하다. 사람들은 말이 없는 것이다.
- <이노오에 야스시의 여행 이야기> 중에서
첫 여행기는 이탈리아 여행 이야기였는데, 아시시와 베로나, 밀라노에 이어 베네치아를 둘러본 후 쓴 후기가 가장 내 스타일에 맞아 떨어졌다. 미리 여행을 다녀온 사람만이 해줄 수 있는 조언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자랑이나 호들갑이 아닌, 본인에게 진심으로 와 닿은 부분만을 아주 담백하게 쓴 문장이 마음에 들었다. 언젠가 베네치아에 가면 꼭 이 조언대로 움직여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스페인 여행 이야기
내가 스페인 여행을 감행한 것은 투우를 보고 싶어서도 아니고, 정열적인 춤으로 알려진 플라멩고를 본고장에서 보고 싶었기 때문도 아니다. 예전에 아랍에게 침략당하고 그 지배하에 놓여 있던 수백 년이라는 세월을 지닌 스페인은 그로 인해 다른 유럽 제국에 비해 다소 이질적인 특수한 그늘을 그 민족의 핏속에도, 생활습관 가운데도, 현재까지 남아 있는 문화유산 속에도 지니고 있어 그것을 직접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 <이노오에 야스시의 여행 이야기> 중에서
마지막 책장을 덮은 뒤 내가 읽으면서 밑줄 그은 흔적을 되돌아보니 스페인 여행의 기록에 가장 많이 공감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저자 ‘카잔차키스’의 『스페인 기행』을 읽을 때와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묵직함의 시선이 느껴졌다.
우리는 그라나다의 대성당과 수도원을 보러 갔지만, 어디나 아랍 시대의 회교사원을 기독교식으로 개조한 것으로, 아랍 문화의 수준 높음과 그것을 대체한 스페인 문화의 수준 낮음이 무참하게 대비될 뿐이었다.
- <이노오에 야스시의 여행 이야기> 중에서
이 도시뿐 아니라 스페인에 자랑거리가 있다면, 그것은 아랍 시대의 것뿐이다.
- <이노오에 야스시의 여행 이야기> 중에서
굉장히 객관적이면서도 독특한 해석이라는 생각에 특히 공감을 했던 부분이다. 뭔지 모를 통쾌함마저 느꼈을 정도였다.
언젠가 나도 스페인 여행을 하게 되면, 나만의 해석과 관점이 가능한 준비를 충분히 준비해서 여행을 떠나고 싶다.
미국 여행 이야기
캘리포니아 주를 보는 것이 여행 목적이라고 했지만, 해안 산맥보다 좀 더 서쪽 바닷가에 붙어 있는 샌프란시스코라든가 로스앤젤레스 같은 대도시는 나한테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일본 이민자들이 직접 땀 흘리면서 대지를 경작하고, 과수를 심었던 새크라멘토 평원과 샌와킨 평야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 <이노오에 야스시의 여행 이야기> 중에서
일본 최초의 이민 여성인 아이즈 번 무사의 딸 오케이의 무덤은 캘리포니아를 흐르는 새크라멘토 강의 지류, 아메리칸 강에서 조금 구릉지대로 들어간 곳에 있었다. 길에서 100미터 정도 벗어난, 잡초가 무성한 장소로, 어지간히 길을 잘 아는 사람 아니면 까딱하면 놓쳐버릴 것이다. 기괴한 운명에 농락당해서 미국에 건너와 열아홉이라는 젊은 나이에 이국에서 죽은 오케이가 불쌍하다.
- <이노오에 야스시의 여행 이야기> 중에서
기자 출신이며 또 저명 작가이기도 한 저자는 작품 활동을 위해 여행을 준비하고 실행에 옮기는 진정한 작가로 비쳐졌다. 장편소설 『태백산맥』을 쓰기 위해 오랜 기간 우리 역사의 흔적을 찾아 떠돌았다던 소설가 조정래의 회고가 떠올랐다. 처음엔 멋모르고 돈 있고 한가한 일본 노인네의 세계 여행기라 지녔던 편견을 확실하게 내려놓게 된 계기가 되기도 한 기록이 미국 여행기였다.
우리나라 작가들 중에서도 미국을 여행하면서 이렇게 철저하게 자국의 역사적 시선과 관점으로 여행을 이어나간 사람이 분명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그들의 기록을 만나보지 못했다.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이번 일을 계기로 꼭 찾아보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해 보았다.
일본 붐 속에서 감탄한 것은 일본계 건축가 미노루 야마자키 건축의 아름다움이었다. 그가 만드는 것은 일본풍 건물이 아니고 근대 빌딩었지만, 일본 건축이 가진 섬세함과 담백함 같은 것을 자기 작업 안에 살리고 있다고 느껴졌다.
- <이노오에 야스시의 여행 이야기> 중에서
또 뉴욕의 ‘뱅크 오브 아메리카’ 앞마당에 이사무 노구치가 교토의 류안지 석정 石庭을 근대감각으로 처리한 것을 만들었는데, 그 또한 불쾌한 구석이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 <이노오에 야스시의 여행 이야기> 중에서
1960년대 당시 미국에서 불던 일본 붐과 관련한 그의 회고에서는 묘한 질투심마저 올라왔다. 일본인 특유의 장인 정신이 느껴지기도 했었고.. 역시 우리네와는 다른 무언가가 그들에게는 분명 있다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여행 이야기
이노우에의 여행 이야기에 많은 부분 공감하며 책을 읽었지만, 만약에 이 단락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렇게까지 노년의 일본 여행객에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선물을 받았을 때의 느낌이 꼭 이런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한국 부여에서는 백제 시대의 정림사지 5층탑을 보았다. 전부터 보고 싶었다. 한국에서 제일 오래되고 제일 아름답다고 전해지는 5층탑이다. 백촌강 전투에서 일본의 백제 구원군이 괴멸했을 당시에 이미 완공되어 있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강건하다고 할까, 늠름하고 힘차다고 할까, 그런 강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계속 유지해오고 있다.
- <이노오에 야스시의 여행 이야기> 중에서
작년에는 많은 것을 보고 각각 감동을 받았지만, 결국 부여의 이 5층탑을 마지막에 본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만이 단 하나 변하지 않는 정확한 사실이었다. 아프가니스탄과 네팔 여행에서 돌아와서 야마모토 겐키치씨로부터 한국의 고대 도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무슨 일이 있어도 거기에 가보고 싶었던 까닭은, 뭔가 그렇게 변하지 않은 오래된 아름다움을 보지 않으면 진정되지 않을 감정이 그 당시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 <이노오에 야스시의 여행 이야기> 중에서
나도 부여의 정림사지 5층석탑을 바라보면서 “참 잘 생겼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정말 그렇다. 볼때마다 그렇게 느꼈다. 그런 나의 감회(표현력이 부족하여 차마 구체화하지 못했던)를 대변해 준 그가 고맙게 여겨진다.
멍하니 작년을 되돌아보니 인상에 남아 있는 것은 모두 여행지에서 보고 겪은 일뿐이었다.
필리핀에서 한국으로의 귀국을 딱 일주일 앞두고 있다.
지금 나의 상태를 이 이상의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와 닿는 문장이었다.
나도 그렇다.
멍하니 지난 3개월을 되돌아보니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은 모조리 내가 필리핀에 와 있으면서 둘러 보았던 여행지에서 보고 겪은 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