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은후 Apr 19. 2023

생의 한 가운데에서 다시 읽다

-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인생의 한 가운데에서 다시 만난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최근 갑자기 이 책이 다시 읽고 싶어졌다.

20대에 어떤 계기와 인연이었는지 기억에 없으나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기억만이 있다. 주인공 니나 부슈만이 매우 멋진 여자라는 기억만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이 책을 다시 만난 건 약 5년 전쯤이던가? 아들이 다니던 고등학교 도서관에서 학부모를 위한 책모임을 지원했고, 그 모임을 통해 다시 니나를 만나게 되었다.


40대 중반에 만난 책이어서일까? 암울했던 1930년대와 40년대를 관통하던 주인공 니나의 삶이 매우 신선하고 충격적이었고, 오히려 21세기를 살고 있는 나의 모습과는 너무 대조되는 그녀의 삶을 대하는 당당한 태도가 부러웠다.       

    

 나는 책을 굉장히 많이 읽었어. 아마 슈타인의 장서의 절반을 읽었을 거야, 그는 내가 읽고 싶어 하는 책을 갖다 주었어 내가 읽고 싶어 하지 않는 책을 더 자주 갖다 주었으나 나는 그가 갖다 주는 것은 무턱대고 다 읽었어, 이런 방법으로 나는 무섭게 많은 것을 알게 되었어, 나는 마치 귀신이 붙은 것같이 열심히 배웠어. 죽음이 나를 가져가려 하지 않았으니까. 이제 나는 생의 편으로 돌아섰던 거야. 그런데 산다는 건 그 당시의 나에게 있어서는 아는 것, 무섭게 많이 아는 것과 생각하는 것과 모든 것과 파고드는 것이었어,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어.     


20대 초반, 질병으로 인한 죽음의 문턱에서 의사인 슈타인의 도움으로 생의 편으로 돌아선 니나가 당시를 회상하는 장면이다. 니나보다 스무 살 가량 연상인 의사 슈타인은 이후 평생 니나를 사랑하며 그녀의 울타리가 되어주지만 끝끝내 사랑의 결실을 맺지는 못했다. 그녀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 여자는 너의 엷은 공기 속에는 살 수 없을 거야. 열과 동요와 변화를 필요로 하는 여자니까. 그 여자는 많은 위험을 감행할 성질의 여자다.     


사후에 친척인 슈타인에게 집을 포함한 전 재산을 상속해주기로 한 노부인이 슈타인이 소개 한 니나를 보고 한 말이다. 이 노부인의 몇마디 말 속에 니나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 돋보이는 문장이다.


‘열과 동요와 변화를 필요로 하는 여자, 니나.’

그렇다, 니나 부슈만은 그런 여자이다.   



  

 내 생각으로는 네가 올바르게 살고 있는 것 같다. 너는 너의 수많은 자기 중의 한 개에 너를 고정시키지 않았어.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야.     


결혼 이후 처음 만난 언니가 동생 니나에게 건넨 말이다.

딱 내가 듣고 싶은 말을 니나는 언니에게서 들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은 나’이고 싶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관해서 얘기해서는 안 됩니다. 순전한 이기주의로 보더라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털어버리고 나면 우리를 더 가난하고 더 고독하게 있게 되는 까닭입니다. 사람이 속을 털면 털수록 그 사람과 가까워진다고 믿는 것은 환상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는 데는 침묵 속의 공감이라는 방법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니나가 슈타인에게 보낸 편지 중의 일부이다. 최근 읽었던 신경숙 작가의 소설에서도 이와 비슷한 결의 글귀를 발견했었고 깊이 공감했던 터라 니나의 고백이 반가웠다.


난 사람을 만나는 걸 두려워 하는 편이다. 아니 내 말을 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내 마음을 상대에게 열면 열수록 나는 더 고독하고 가난해짐을 경험했었던 터이다. 누구나 다 그런데 나만 유독 이 문제에 예민할 걸까? 그래서 난 외로운걸까??



         

 언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운명이 없어.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야. 그들은 운명을 가지려고 하지 않아. 커다란 단 한 번의 충격을 피하고 그 대신 몇백 개의 작은 충격을 받아들이고 있어. 그러나 커다란 충격만이 우리들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거야. 작은 충격은 우리를 점점 비참 속에 몰아넣고, 그러나 그건 아프지 않거든. 타락은 편한 일이니까. 내 생각으로는 그건 마치 파탄 직전에 있는 상인이 파산을 감추기 위해서 여기저기서 돈을 빌리고 일생 동안 이자를 갚아가는 공포에 싸인 소상인으로 그치는 것과 같다고 생각돼. 나는 언제나 파산을 선언하고는 다시 처음부터 개시하는 편을 택하고 싶어.     


실은 나도 그러고 싶다. 커다란 단 한 번의 충격을 피하고 그 대신 몇백 의 작은 충격을 받아들이는 삶은 싫다.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커다란 충격이 지금 내 앞에 있다. 아프지 않은 작은 충격 말고, 파산 선언과도 같은 다시 처음부터 개시하는 편에 서고 싶다....


그런데 아직 용기가 부족한가? 의지의 부족인가?? 니나의 말을 읽으며 나는 지금의 내 모습을 제대로 직시할 수 있었다. 약간의 용기도 생겼다. 커다란 충격을 정면으로 받아들일...     


          

 그는 니나가 심각한 생의 위기를 넘기기는 했지만 만약 니나가 다시 전과 같은 상태에서 생활하게 되면 언제라도 다시 재발할 우려는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니나의 남편과 만나보았는데 그와의 결합이 니나의 발전에 커다란 장애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 확신은 그 남자에 대한 가치 평가가 아니라고 그는 빨리(너무나 빨리) 덧붙이고, 다만 니나가 이 결혼을 하나의 과제로 보고 그 과제를 제일 잘 수행하기 위해서 모든 힘을 남김없이 그리고 효과 없이 써버린 것을 말하려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니나는 지금도 또다시 깨어진 의지를 이 소용없는 투쟁을 위해서 주워 모을 기세를 보이고 있다는 겁니다. 당신으로서 가능한 모든 일을 해주십시오, 라고 그는 나에게 말했다.

그 여자가 남편과 헤어지도록.     



잘못 선택한 결혼과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니나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포기하려 했었다. 그런 니나를 슈타인이 다시 살렸고, 슈타인은 니나를 위한 제대로 된 치료를 위해 동료에게 니나의 치료를 맡겼다.


니나의 치료를 담당한 동료도 니나를 사랑하게 된걸까? 아니 정확히 말해 니나의 가치를 알아보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들은 둘 다 니나의 생을 위해선 그 남자와의 이혼이 최선이라는 데에 합의를 하는 장면이다.      

약 한 세기 전, 이 작품을 쓴 ‘루이제 린저’는 생각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 사람일까? 아니. 시대를 거스르고 자신의 의지와 주관대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


후대의 평가가 어떠하던 간에 난 ‘루이제 린저’를 존경한다. 니나를 통해 말하고 있는 그녀의 삶에 대한 애착과 의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는 강한 힘을 가졌어. 그러나 너무 많은 모험을 하는 여자는 누구나 손해 보는 법이야.
나는 어두운 표정을 띠고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나보고 사는 것을 그만두란 말이세요? 내가 여태까지 살아보았던가요? 나는 살고 싶어요. 생의 전부를 사랑해요. 그렇지만 나의 이런 마음을 당신은 이해 못하실 거예요. 당신은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당신은 생을 피해 갔어요. 당신은 한 번도 위험을 무릅쓴 일이 없어요. 그래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잃기만 했어요.     



니나의 몸이 회복된 이후 슈타인과 나눈 대화의 일부이다.

니나가 나치 정권에 맞서서 치열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 그녀의 앞날을 염려하는 슈타인에게 니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살고 싶어요. 생의 전부를 사랑해요..”  


생을 포기하려 한 용기 있는 사람만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걸까? 그런 경험이 없는 나이지만, 나도 살고 싶다. 그리고 내 생의 전부를 사랑할 수 있는 삶을,, 그런 삶을 살고 싶다.


또한 니나는 이 대화에서 자신의 체면과 스무 살이라는 나이 차이 때문에 니나에게 적극적으로 청혼하지 못한 슈타인을 질책하고 있다. 책의 마무리 즈음에서 발견한 이 대화 속에서 나는 니나가 슈타인에 대한 원망을 품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슈타인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내 죄에 대해서 – 입당은 그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 뼈저린 죄의식을 갖고 있다. 나와 같은 종류의 인간에게는 새로운 시대의 운명이 위임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비록 명백한 견식이 있음에도 무조건 그것에 따르는 힘을 갖지 못한 그런 무리에 속한다. 도대체 미래의 주인이 있을 수 있다면 때로는 가혹하고 일방적인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니나와 , 그녀처럼 강인한 사람들일 것이다. 나와 나 같은 족속은 필요 없는 존재다.
      
나는 전율을 느끼고 내 주변 인간들의 변형을 보았다. 나는 이 시대에 성장하지를 못했다. 나는 이 시대에 성장하지를 못했다. 니나는 그것을 이해함으로써 나를 도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 그 여자는 내가 시대와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을 책망할 것이다. 내가 그러한가? 정말로? 쫓기는 자의 무리에 섞여 정처 없는 해안으로 급하게 달리는 사람일까? 또는 한때 가치가 있었던, 그래서 영원히 그 가치를 보유할 그것을 간직하기 위하여 자기 자리를 지키려는 사람일까? 과연 그 사람들 중에서 도대체 누가 도망하고 있는 것일까?           



니나와 그의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 그당시 독일의 지식인이었던 슈타인은 나치에 순응하는 입당을 택했다.


나는 그의 판단을 존중한다. 나치에 맞서는 것보다 그의 판단이 몇 배 더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는 니나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슈타인이니까...


다행히 나치 치하에서 살아남은 니나는 슈타인의 선택을 충분히 이해했고 그를 위한 구명 활동을 벌이기도 했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끝내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 여자는 이제야 자기의 청춘을 보상할 것이고 또 자신이 놓쳐 버렸다고 생각한 모든 것을, 20세 젊은 날의 끝없는 희망, 모든 성공과 세력과 명망을 움켜쥐고자 하는 천진한 대담성, 이런 것을 다시 찾을 것이다. 행복은 그 여자에게로 다가오고 그 여자가 시작하는 것은 모두 성공시키고 있다.     



슈타인의 편지를 통해 쓰여진 이 문장은, 어쩌면 저자 루이제 린저가 스스로에게 해주고 싶은 말일지도 모른다.

30대에 접어든 니나.(지금으로 환산하자면 40대 후반 정도의 나이가 아닐까 싶다.)

이제 그녀의 앞길은 열려 있다. 행복이 그녀에게, 그녀가 원하고자 하는 것을 모두 이룰 수 있는 성공의 길이 펼쳐진 것에 대한 스스로의 감회를 슈타인의 편지글의 형식을 빌어 작가는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지금의 내 모습에 이 문장을 투영시켜 보았다. 난 니나처럼 30대도 아니고 현재의 40대도 아니다. 그러나 지금도 이 문장이, 니나의 삶이 나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면 나는 분명 30대의 니나가 아닐까?

감히 이렇게 믿고 싶다.



“행복은 나에게로 다가오고 내가 시작하는 모든 것을 성공시킬 수 있다.”

라는 주문으로 나에게는 읽혔다.


오독이 아니기를, 곡해가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에게 해, 크레타 섬 여행을 꿈꾸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