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의 역사> 신형철 시화詩話
<인생의 역사> - 신형철 시화詩話
지난해 11월 하순께로 기억한다.
임경선 작가가 쓴 인스타그램의 글을 보다가 필이 꽂혀 찜해두었던 책 『인생의 역사』.
돌고 돌아 드디어 내 손에 들어온 이 책을 펼쳐보다가 난 다시 그 당시 내 맘을 움직였던 임경선 작가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도대체 어느 대목에서 내 마음이 움직였었는지 다시금 확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너는 내가 필요하다.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중략)
사랑은 내가 할 테니 너는 나를 사용하렴. (중략)
그러므로 나는 죽지 않을게. 죽어도 죽지 않을게. / p 26
아마도 이 문장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그리고 26쪽을 찾아 읽어보았다. 성별은 다르지만 역시 임경선과 신형철 작가 두 사람은 비슷한 부분이 있다.
평론가 신형철이 해석한 시의 제목은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베르톨트 브레히트’라는 낯선 시인의 작품이고 김남주 시인이 1988년 이 시를 옮겼다.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p 18
만일 이 시의 옮긴 이가 김남주 시인이 아니었더라면,
또 그 시기가 1988년이 아니었더라면 나도 그냥 열렬할 사랑의 시쯤으로 해석하고 넘어갈 뻔하였다.
하마터면...
브레히트가 쓰고 김남주가 번역한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는 민주화를 위해 사람들이 제 목숨을 던지거나 미래를 포기하며 싸우던 시대에 읽혔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사랑하는 동지들을 위해 나는 살아 있을 필요가 있는 존재다. 그러니 아침저녁으로 되새겨야 한다. 나를 돌보자고, 무엇에든 조심하자고.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는 삶이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웠던.”(이시영) ……
그 후 이 시는 강렬한 연애 시로 읽힌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원하니, 나는 그를 위해 내내 온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의 바보는 난생처음, 제가 세상에서 제일 귀한 존재임을 깨닫는다.”(이영광) 이 두 독법은 적절하고 아름답다. /p 19
작가 신형철은 위의 두 가지 독법 이외의 세 번째 독법을 말한다. 바로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이다. 세 번째 독법에 대해 작가 임경선은 가장 공감을 했던 것 같고(어디까지나 내 생각)..
세 번째 독법에 공감도가 가장 크다는 두 작가에 대한 나의 판단에 이은 나의 감정은 소외감? 혹은 당혹스러움이었다. 솔직히 내 경우엔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독법의 순서에 따라 공감의 순서가 정해짐을 고백한다.
왜? 나는 세 아이를 둔 엄마가 아니던가..
아무렴 어때? 내 순서가 그렇다는데, 뭘.
자책하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만이 아니라 그와의 관계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탄생하는 나의 분인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는 당신과 함께 있을 때의 내가 가장 마음에 든다. 그런 나로 살 수 있게 해 주는 당신을 나는 사랑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이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지도 이해할 수 있다. 그를 잃는다는 것은 그를 통해 생성된 나의 분인까지 잃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그 사람과만 가능했던 관계도 끝난다. 다시는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은 다시는 그때의 나로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 p 131
나는 누구와 함께 있을 때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더라?
이 부분에서 잠시 멈추어 생각을 더듬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쉽게 떠오르지가 않는다.
‘나는 외톨이일까?
나는 누군가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걸까?
아님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걸까?’
순간 많은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의 가치를 인정해 주고, 보잘것없다고 여기던 나를 추켜 세워주던 누군가가 떠올랐다. 처음엔 상대의 말이 진심일까 의심했었지만 시간이 좀 지나고서는 빈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 그때 나는 내가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그 시간이 이후에도 지속되지 못함이 문제 이긴 했으나, 가끔 내가 초라하게 느껴질 때면 애써 그때의 기억을 소환해 내곤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친구는 여자이다. 내가 그 친구를 아끼고 좋아하는 마음을 부정할 수 없는 까닭에 조금은 마음 부자가 된 듯하다.
언젠가 기타노 다케시는 말했다. “5천 명이 죽었다는 것을 ‘5천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천 건 일어났다’가 맞다. / p 132
세월호와 이태원에서의 안타까운 죽음들이 떠올랐다. 몇 명이 목숨을 잃었는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건 자체가 연쇄살인 사건임에 틀림없다는 가슴 아픈 진실이다.
죽음을 세는 법, 낯선 이름 ‘기타노 다케시’ 덕분에 제대로 알게 되었다.
서시 - 한강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 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 p 150
죽음을 코앞에 둔 어느 날, 운명이라는 친구가 나를 찾아와서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하게 될까?
대답 대신 나도 그를 오래 동안 끌어안고 있어야겠다.
어떤 감정, 어떤 마음이 들까? 몹시도 궁금하다.
원망 대신에,
”고마워. 그동안 고생 많았어~. 이젠 편히 쉬어도 돼. “
라고 대답해 주고 싶다.
죽음과 운명에 대해 이렇게 아름답고도 독특한 시를 쓸 수 있는 한강이라는 작가가 부럽다.
윤동주의 서시에서처럼, 나도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거부하거나 피하지 말고 고요하게 담담하게 걸어가겠다.
가장 아름다운 것 - 사포
어떤 이들은 기병대가, 어떤 이들은 보병대가
또 어떤 이들은 함대가
검은 대지 위에서 가장 아름답다 하지만
나는 사랑하는 이라 말하겠어요.
(……) / p 163
아주 오래오래 전에 전쟁터에 있던 누군가가, 전쟁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던 상황의 어떤 남자가 쓴 시가 아닐까 싶다. (헤르만 프랭켈, <초기 희랍의 문학과 철학>)
결국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실질적으로는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p 165
나를 이 책과 만나게 해 준 임경선 작가도, 이 책의 저자 신형철 작가도 가족과 아이를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아주 평범하면서도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들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 각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계속 사랑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기 위한 애씀이 애국 아니겠냐고 말하는 이 따뜻한 이를 만나게 되어 참 감사한 순간이었다.
여럿이 마시는 사람은 희망이 소중하다고 믿는 사람이고,
혼자 마시는 사람은 절망이 정직하다고 믿는 사람일까.
전자가 결국 절망뿐임을 깨달으면 귀가하다 혼자서 한잔 더 할 것이고,
후자가 끝내 희망을 포기 못하겠으면 누군가를 불러내 한잔 더 할 것이다.
/ p 226
술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 구절을 가볍게 넘길 수는 없는 일.
주로 혼자 술을 마시는 편이니 나는 절망이 정직하다고 믿는 사람? 그러면서도 같이 마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나이니 희망이 소중하다고 믿는 사람일까?
사실 둘 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마지막 구절의 문장에 격하게 공감할 따름이다.
”그러나 내가 마신 것이 희망이건 절망이건, 자고 일어나면 남아 있는 것은 부끄러움뿐일 때가 있다. “ / p 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