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사무실 반려식물 하나 하실래요?"
솔깃한 안나의 제안으로 '정글방' 멤버로 끼게 되었다. 정글방은 회사의 비공식 모임이다. 나도 식물 모종 네 가지와 화분, 조경용 흙까지 구색을 갖추어 샀다. 이번 기회로 연쇄살식마의 오명을 벗으리라 다짐을 하면서.
처음 해보는 분갈이라서 시행착오가 무척 많았다. 일단 주문한 화분의 크기가 너무 작았고, 배수 구멍을 내 달라는 요청사항을 빼먹었다. 분갈이를 한 다음날 시름시름 죽어가는 것이 있었는데, 이마저도 나는 눈치를 못 채고 안나가 크게 놀라기에 알 수 있었다. 안나의 도움으로 영양제를 챙겨주었는데, 한동안 재택근무로 돌보지 못했는데 과연 무사할지 걱정이다.
무엇인가를 기른다는 것은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이다. 나의 언어가 아니라 '무엇'의 언어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흙이 마르면 물을 흠뻑 주라는데, 도대체 '마르다'는 뭐가 얼마나 마르라는 걸까? 그것도 겉흙이 아니라 속흙이 마르는 것을 봐야 한다는데, 속을 찔러봐도 아게 마른건지 아닌건지 잘 모르겠다. '흠뻑'도 마찬가지다. 배수구멍에 물이 흘러나올 때까지 분명 줬는데, 이튿날 썸머로부터 물이 모자란다는 조언을 들었다. 내가 한꺼번에 물을 너무 많이 줘서 다 흘러나온 거라고. 정말이지 어려운 식물의 언어.
함께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나의 언어가 아니라 상대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는 것. 나는 여러모로 부족하지만, 특히 집안에서 더 그렇다. 주말에 남편이 일찍 나가야 하는 일이 있어서 호들갑을 떨며 스무디를 만들어 주었는데, 다 마시고 남편의 말이 아침에 우유를 마시면 배가 아프니 앞으로는 주지 말란다. 8년을 같이 살았지만 아침을 줘본 일이 없어서 몰랐다, 고 하기엔 내가 생각해도 좀 너무했다. 반성하면서 남은 스무디는 내가 마셨다. 스무디를 좋아하는 건 그가 아니라 나의 취향, 나의 언어이다.
얼마 전 TV에서 튤립을 심는 장면을 보았다. 마늘 같이 생긴 튤립 구근은 봄이 아니라 겨울을 앞두고 심는다고 한다. 튤립은 겨울을 땅 속에서 나야 무사히 싹을 틔우는 거라고. 이 사실을 세상에서 가장 먼저 안 사람은 아마도 튤립을 많이 사랑했나보다. 자주 보고 마음을 주고 아끼고 보듬어준 덕에 튤립은 얼굴을 보였을 것이다. 이렇게 또 튤립의 언어를 배운다.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