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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범수 Jul 15. 2019

고유정의 얼굴과 김제동의 돈

두 명을 둘러싼 세간의 잡음에선 악다구니가 들린다. 우리는 기필코 고유정의 얼굴을 봐야만 직성이 풀리겠는가. 그의 생김새를 확인한다는 것이 이 사회의 안녕에 대체 무슨 의미를 갖는가. 그 인상이 나쁘면 나쁜 대로, 평범하면 또 그런대로, 범죄의 잔혹성과 외모를 연결 지으며 욕설과 혐오를 퍼붓는 일, 그것이 피의자 신상공개라는 제도의 취지와 그 어떤 관련이 있단 말인가.


우리가 그의 얼굴을 기어이 확인함으로써 또 다른 범죄를 밝혀낸다거나, 그가 사회로 복귀해 재범을 저지를 여지를 봉쇄하는 그런 순기능을 우리는 달성했는가. 재범 예방이 필요하다면, 아마도 수십 년 후의 일이겠지만, 그의 출소를 앞두고서야 의미가 있을 것이다. 피해자의 가족도 아닌 대중이 고유정을 향해 '얼굴을 들라'고 외치는 것은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사람이기에'라는 호기심을 충족하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대상을 구체화함으로써 분풀이 혹은 가학적 욕구를 극대화하려는 심리도 그 밑에는 깔려 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은 9년 전 우리 사회가 신상공개법을 만들면서 가졌던 문제의식에 부합하지 않는다.


신상공개가 주는 사회적 이익이 명확할 때 그리고 그것을 판단하는 절차가 투명하고 일관되며 상식적으로 운영될 때, 우리는 특정 피의자의 신상공개를 지지할 수 있다. 현재 신상공개 여부를 정하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 문제점이 지적된다. 하나는 경찰이 그 결정기구를 관장함으로써, 사회적 요구 즉 '그놈의 낯짝 한 번 보자'는 여론이 팽배해지면 이를 거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여론이 아닌 제도적 절차와 기준에 따라 공개 여부를 결정하는 일관된 시스템을 하루빨리 마련하고 정착시켜야 한다.


아울러 신상공개를 결정하는 경찰 내 위원회가 지역과 사안별로 나뉘어, 때때로 결이 다른 판단이 나오는 문제 역시 개선할 필요가 있다. 특정인의 범죄가 흉악하며 사회적 관심이 집중됐다는 이유로 신상공개가 결정된다면, 한국은 재판을 통한 징벌 외에도 사실상의 유죄 확정과 사회적 매장이라는 별도의 징벌을 추가하는 초법적 사회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김제동의 고액 출연료를 둘러싼 논란도 비이성적이긴 마찬가지다. 그가 일반인보다 상당히 큰돈을 번다는 것에, 불평등 해소를 외쳐온 그의 행보를 연결하는 건 매우 부적절하다. 만일 우리가 굳이 그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면 그를 초청한 지방자치단체가 형편에 비해 무리한 지출을 한 것은 아닌지 따져보는 정도일 것이다. 아울러 단체장의 정치관과 김제동의 그것이 맞아떨어진다는 이유로 '시장 가격'에 비해 터무니없는 돈을 책정해 사실상 그를 도와주려 한 것 아니냐는 의심도 해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 논란에 사회적 의미를 아무리 부여하려 해도, 국회의원 여럿이 달라붙어 쟁점화시킬 만한 중대하고 시급한 일인가에 대해선 회의감이 앞선다. 김제동이 다른 곳에서도 고액의 출연료를 '챙겨 왔다'는 전력까지 들춰냄으로써 그의 정치적 신념을 깎아내리고 표리부동한 사람으로 폄훼해보려는 시도는 매우 치졸하다.


두 논란에서 언론의 책임이 크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견강부회로 대중을 선동하는 정치인과 그에 쉽게 동조하는 대중 역시 이 사회를 비이성적이며 삭막한 곳으로 만드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한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이들을 비판하고 압박하는 건강한 시민의식은 하이에나 같은 언론과 정치인 그리고 차별과 혐오를 내면화 한 일부 대중의 설자리를 좁게 만들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고유정의 얼굴을 확인하고 김제동의 고액 강연을 무산시킴으로써 마침내 얻어낼 그 무엇이, 우리가 꿈꾸는 미래와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아시아경제 2019.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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