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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소하 Sep 28. 2020

래원 (Layone), 「원효대사」

http://www.tonplein.com/?p=4113





현대의 대중음악에서 가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될까. 특히 여타의 어떤 장르보다도 가사의 중요성이 대두되는 힙합의 경우, 그리고 그러한 힙합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경우에 가사가 가지는 중요성은 얼마나 클까. 나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항상 양가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가령,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의 『To Pimp A Butterfly』를 들으며 미국 내 흑인 사회에 깊은 고찰을 하게 만드는 그의 가사에 큰 감명을 얻기도 하고, 이센스(E SENS)가 『The Anecdote』에서 풀어나가는 흥미로운 그의 자전적 이야기에 급속도로 빠져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Feel The Love」에서 칸예 웨스트(Kanye West)가 내지르는 괴상한 비명에 흥이 솟아오르기도 하고, 키릴 문자를 읽지 못하는 나로서는 가사뿐만 아니라 아티스트의 이름과 곡의 제목도 읽기 어려운 ИСАЙЯ의 「Комната 84」를 들으며 애절하게 다가오는 멜로디에 심취한 채 노래를 감상하기도 한다. 이렇듯 나는 매번 음악 내에서 가사가 점유하는 위치와 그 비중에 대해서 계속해서 고민하게 된다.


그럼에도 내가 단언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물론 음악 내 요소 간의 중요도를 비교하는 것은 정말 쓸 데 없고, 또 완벽한 마무리로 마칠 수 없는 끝없는 싸움이지만, 내가 장담할 수 있는 한 가지는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우선적으로, 그리고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음악적 요소는 소리라는 것이다. 소리, 곧 사운드는 음악의 근원이자 이를 구성하는 필요충분조건이다. 소리라는 것은 그 어떤 요소보다도 앞서 있으며, 음악을 만드는 창작자에게도, 그것을 듣는 청자에게도 가장 주요하게 인식되는 요소이다. 이렇듯 소리가 음악 내에서 가장 막중한 입지를 가지고 있는 요소가 분명함에도, 현대의 우리는 다양한 음악적 요소의 중요성을 두고 종종 논쟁을 벌이곤 한다. 특히나 앞서 언급되었던 가사의 경우가 가장 대표적이다. 게다가 몇 장르들, 특히 힙합의 경우에는 창작자와 청자를 넘어 비평의 단계에서도 그 두 요소의 쟁점을 두고 많은 이야기가 오가고는 한다.


그리고 여기서 정구원의 말을 빌리자면, 현대의 많은 음악 비평에서는 가사에 큰 짐을 진 채 ‘게으름’에서 비롯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으며, 또한 가사를 음악적 요소에서 떼어낸 채 논하는 오류를 빈번하게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나 역시 이러한 의견에 동의하는 동시에, 그러한 게으름과 잘못된 글쓰기를 행했던 입장에서 현재의 문제를 인식한 채 계속해서 그 해결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다. 특히 힙합이라는 장르를 다루곤 할 때면 ‘좋은 가사’와 ‘좋은 음악’을 동일시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곤 하는데, 특히나 ‘좋은 가사’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그 입지를 너무도 격상시킨 채 다른 요소를 배제하는 경우도 일어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러한 가사라는 요소에 대한 고찰을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


내가 이렇게까지 길게 서두를 끌어온 이유는 본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래원(Layone)이라는 래퍼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지난 [쇼미더머니 8]에 등장해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었던 래원은 분명 뛰어난 장기를 지닌 래퍼이다. 그는 곡을 이끌어가는 능력이 뛰어난 래퍼이며, 이는 그의 래핑 스타일 중 변화무쌍한 플로우와 이를 장식하는 다채로운 라임 배치, 그리고 독특한 어휘 선택 등에서 기인한다. 래원은 분명히 랩을 잘하는 래퍼이고, 그 누구도 래원의 랩을 들은 후 “래원의 랩은 재미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내가 그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 이유는 그의 가사에 있다. 분명 많은 사람들이 그의 랩을 두고는 칭찬을 아끼지 않지만, 그의 가사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비판을 이어간다. 물론 이는 나 역시 일부 동의하는 의견이기도 하며, 래퍼 본인도 이에 대해 인식을 하고 있다는 점 또한 재밌는 사실이다.


래원의 가사가 비판을 받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무의미와 무맥락. 가령 본고에서 다루고자 한 「원효대사」를 보면 “보아뱀 닮아 버린 반 페르시”라는 무의미한 가사에 이어 “부합해 루시퍼 베드신”, “발포해 리스폰”, “페르시아 완패를 시켜”라는 무맥락한 문장들이 전개된다. 이는 단순히 「원효대사」 뿐만이 아닌 그의 커리어 내 대부분의 곡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러니까 이제는 래원만의 작사 스타일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스타일이 비판을 받는 이유는, 단순히 작사를 넘어 모든 글쓰기에서 반드시 지켜져야 할 규율과 같이 취급되는 ‘의미’와 ‘맥락’의 규범을 배제한 가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나 역시도 래원의 가사가 ‘좋은 가사’가 아님에 동의하며, 대부분의 청자가 그의 가사를 비판하는 내용에는 동의를 한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비판이 그의 가사를 넘어 음악으로까지 번진다면, 나는 그 의견에 반기를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본고의 초반부를 돌이켜보자. 과연 음악에서 가사라는 요소가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까? 특히 힙합 음악에서 가사가 주요하게 대두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비단 사운드뿐만이 아닌 다른 모든 요소를 제쳐두고 최우선시 되어야 할 근거가 존재하는가? 물론 피력했다시피 나는 가사에 큰 중요성을 두지 않아도 된다는 의견을 고한다. 재진술하자면 나의 입장에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겨져야 할 음악적 요소는 소리이며, 래원의 가사가 ‘좋지 않은 가사’이더라도, 그의 소리는 ‘좋은 소리’이기 때문에 그의 음악이 가사를 근거로 ‘좋지 않은 음악’으로 평가되는 견해에 동의를 할 수 없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내가 주장한 ‘좋은 소리’라는 것은 무엇인가. 힙합을 구성하는 다양한 소리에는 비트와 그 안의 많은 악기 등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래퍼를 조명하는 현재에 있어서는 래퍼의 목소리와 그의 랩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서 목소리는 개인의 주관적 선호도가 아주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으니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므로 랩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전술했듯, 래원을 랩을 잘하는 래퍼이다. 앞서 언급된 라인을 다시 살펴보자면, 10초도 안되는 시간 동안 뱉어내는 네 마디의 가사에는 라임 변주와 세 개의 라임 구성, 매력적인 멜로디의 싱잉-랩이 들어가 있다. 그리고 이를 이끄는 플로우는 곡이 재생되는 3분가량의 시간 동안 끊임없이 변주한다. 또한 그의 랩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정지와 재생에 있다. 래원은 청자가 예상하지 못하는 지점에서 래핑을 순간적으로 멈추고, 여기서 발생하는 정적은 또 한 번 새로운 재미를 만들어내며, 다시 랩이 재생되어 이어지는 순간은 재차 흥미로운 지점을 생성한다. 또한 이러한 그루브와 플로우를 만들기 위해 래원은 가사를 온전히 또박또박 발음하기도 하며, 발음을 완벽하게 숨기기도 한다. 이렇듯 나열하기도 벅찬 양의 랩적 요소는 모두 「원효대사」라는 하나의 트랙에서, 래원이라는 한 명의 래퍼가 쏟아내는 것들이며, 이는 그 어떤 다른 래퍼의 어떠한 트랙에서도 얻을 수 없는 재미를 제공한다.


‘좋은 소리’, 혹은 ‘좋은 랩’이란 정의 역시 개인의 기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래원이 선사하는 랩은 다채롭게 청각적인 쾌감을 만족시키는 랩임에 틀림없다. 그는 때로는 짜임새 있고 빽빽하게, 때로는 여유롭게 랩을 이어가며, 이렇듯 다양한 스타일의 랩이 한 곡 안에서 끊임없이 변주하는 모습은 청자에게 분명 매력적인 소리로 다가올 것이다. 또한 ‘좋은 소리’를 넘어 ‘재미있는 소리’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그의 음악이 더욱 높은 위상을 지니게 만들기도 하며, 우리가 그의 랩을 들으며 느끼는 ‘재미’에서 기인하는 감상은 다시금 그의 음악에 대한 평가를 고려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것이다.


물론 사운드와 청각적 쾌감에 치중한 래핑의 미래가 어찌 될지는 예상할 수 없다. 분명 가사라는 요소는 현대의 음악에서, 그리고 힙합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고, ‘좋은 가사’역시 ‘좋은 음악’을 구성하는 요소 중 아주 중요한 위치에 놓여있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음악들이, 그리고 힙합의 많은 장르가 추구하는 단순한 ‘흥’의 관점에서 봤을 때, 래원의 음악은 분명 그 목적을 완벽하게 달성하는 자취를 남긴다. 물론 창작자 본인의 의견은 알 수 없지만, 그가 자신의 음악을 통해 전하고자 한 것이 ‘재미’와 ‘흥’이었다면, 그것이 온전히 전달되었음에 래원의 음악은 좋은 음악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한 명의 청자로서, ‘좋은 소리’와 ‘좋은 음악’을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재미있는 음악’을 받아든 채 즐기면 될 것이다.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재미를 래원에게 받음으로써, 우리는 더욱 큰 재미를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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