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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소하 Sep 30. 2020

시그니처, 『Listen And Speak』

http://www.tonplein.com/?p=4128

 


  


만약 케이팝을 양분하는 이정표가 있다면, 그것은 서정성과 난잡함으로 나뉠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서정성을 대표하는 그룹이 있다면 러블리즈(Lovelyz)와 오마이걸(OH MY GIRL), 그리고 여자친구(GFREIND)가 있을 것이다. 물론 세 그룹 모두 최신작에서 큰 변화를 채택했고, 기존 커리어에서도 서정성과 거리가 먼 음악을 종종 보였지만, 그들이 표한 음악의 중심에는 서정이 주로 작용했다. 특히 러블리즈는 애절함을, 오마이걸은 몽환을, 여자친구는 아련함을 중심으로 두는 서정성을 이어갔으며, 그러한 서정성의 최전선에는 현악기를 핵심으로 둔 매력적인 선율이 자리했다. 이러한 서정성이 한 편에 존재한다면, 반대편에 존재하는 것은 분명 난잡함이다. 아마도, 난잡한 음악을 가장 케이팝스럽게 그려낸 집단은 SM 엔터테인먼트일 것이다. 아주 고전의 영역인 SMP에서부터 시작된 SM 엔터의 난잡함은 2010년대에도 계속되었는데, 대놓고 난잡함을 드러낸 소녀시대(GIRL’S GENERATION)의 「I GOT A BOY」를 시작으로 난잡하면서도 효과적인 융합을 이루어낸 샤이니(SHINee)의 「Sherlockㆍ셜록 (Clue + Note)」, 난잡함을 극적으로 그려낸 엑소(EXO)의 「늑대와 미녀 (Wolf)」, 그리고 이를 보다 세련되게 그려낸 f(x)의 「Red Light」와 레드벨벳(Red Velvet)의 「짐살라빔 (Zimzalabim)」까지, SM 엔터는 케이팝에서의 난잡함을 제대로 그려내는 몇 안 되는 기획사이자 그 토대를 구축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서정성의 중심이 선율에 있다면, 난잡함의 중심에는 변주가 있을 것이다. 가령 「I GOT A BOY」에서 동전 뒤집듯 바뀌는 컨셉과 템포에서 느껴지는 난잡함과 아예 두 개의 곡을 합쳐 배치한 「Sherlock」에서 발산되는 난잡함, 커다란 낙차를 그려내는 「짐살라빔」의 변주에서 오는 난잡함 등 케이팝에서 그려지는 난잡한 느낌은 모두 음악 안에 속한 분위기, 컨셉과 리듬 등의 변주에서 발현된다. 그리고 이러한 난잡함은 2020년에 들어 또 새로운 모습으로 발견되었는데, 그 주인공은 2020년에 갓 데뷔한 시그니처(cignature)이다. 지난 2월 데뷔한 시그니처는 두 개의 선공개 싱글 발매 이후 9월에 들어 첫 미니 앨범 『Listen And Speak』를 발매했다. 그리고 그들의 첫 미니앨범에는 새로우면서도 익숙한 형태의 난잡함이 녹아들어 있었다.


특히 이들의 앨범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곡은 첫 트랙인 「눈누난나 (Nun Nu Nan Na)」이다. 시그니처의 데뷔 싱글이기도 한 「눈누난나」는 시그니처만의 난잡함을 온전히 그려내는 곡인 동시에 그들의 난잡함이 깔끔하게 다듬어졌음을 인지시키는 곡이기도 하다. 「눈누난나」에서는 다채로운 변주와 여타의 요소를 통해 그들만의 난잡함을 본격적으로 그려낸다. 가장 먼저 짚어야 할 점은 리듬의 변주에 있다. 먼저 리듬을 이끌어가는 드럼에 대해서 살펴본다면, 벌스에 등장하는 드럼과 이후 프리코러스, 후렴, 브릿지의 드럼은 모두 다른 구성을 뽐낼 뿐만 아니라 그 질감과 배치를 모두 다르게 하여 리듬의 변주를 각인시킨다. 일반적인 리듬과 질감으로 시작된 드럼은 벌스 내에서도 변주하며 나아가고, 프리코러스에서는 잠시 모습을 감췄다가 점점 강세된 모습으로 등장해 드랍 파트를 완벽히 꾸려낸다. 이후 후렴과 훅에서는 보다 강렬한 모습으로 등장하며 브릿지의 드럼 역시 그 연주 방식을 계속해서 변용해 마지막 드랍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드럼에 더해 리듬의 변주를 주조하는 베이스 역시 짚어봐야 할 요소이다. 베이스는 드럼과 함께 그 질감과 연주를 계속해서 변주하며 곡을 전개해나가는데, 벌스에서는 둔탁한 모습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프리코러스에서는 뒤로 물러선 채 다른 소리를 받쳐주고, 후렴에 들어서는 더욱 지글거리는 소리와 강렬한 형태로 변형해 같이 변화한 신디사이저와 함께 주요한 순간을 장식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또한 「눈누난나」의 가장 큰 특징이자 강점은 보컬을 다양한 소스로서 활용하는 모습에서 비롯된다. 멤버들의 목소리가 동시에 등장하는 지점에는 그것이 화성을 이루기 위해서도, 혹은 해당 파트를 강조하기 위해서도 사용되며, 후렴에 들어서기 전 드롭 파트에 등장한 목소리는 기술적 변형을 주어 더욱 극적인 순간을 만들어낸다. 또한 멤버들은 곡의 분위기와 맞게 통통 튀는 보컬을 구현하며, 그들이 가창을 하는 동시에 그와 다른 공간에서 다양한 추임새가 등장해 확실한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훅 파트에서 강렬하게 밀어붙이는 신디사이저와 함께 전자음이 섞인 목소리가 등장하는 부분과, 마지막 후렴의 역동성을 살리기 위해 앞서 배치된 브릿지 파트 역시 그 존재감을 남기는 동시에 자신의 역할을 확실하게 수행한다. 이렇듯 「눈누난나」는 시그니처의 난잡함이 첫 시도임에도 불구하고 확연히 깔끔한 형태로 구현되어 큰 감명을 제공한다.


이후의 트랙에서는 시그니처의 스타일이 더욱 부가된 난잡함이 드러난다. 「아싸 (ASSA)」의 경우에는 「눈누난나」의 신디사이저 대신 기타의 지글거리는 소리가 강조되는데, 이는 후렴에서 간결한 신디사이저로 변주하여 대비를 이룬다. 또한 후렴의 “아싸”라는 후렴구는 벌스, 프리코러스의 화려한 멜로디와 대비되며, 동시에 「눈누난나」에서는 후렴의 보컬과 멜로디가 강렬했던 것과 달리 「아싸」의 후렴은 보다 간단하며 중독적인 선율로 진행된다. 「아리송 (ARISONG)」은 강렬한 신디사이저에서 통통 튀는 신디사이저로 변주되는 전개로 이전의 곡들보다 커다란 낙차와 변주를 그려낸다. 또한 후렴에서 딥하우스 풍 베이스가 진행되는 순간에, 이와 대조되는 고역부에서 강하게 달려가는 멤버들의 보컬이 등장해 색다른 난잡함을 완성시킨다. 한편 프리코러스에서 독특한 리듬으로 전개되는 보컬과 후렴의 강렬한 보컬 파트가 대비되는 변주로 이어지는 방식은 지난 「눈누난나」와 「아싸」의 난잡함이 효과적으로 융합된 형태로 느껴지기도 한다. 「달달해 (DALDALHAE)」에서는 사뭇 정리된 분위기가 이어지는 동시에 보다 작은 낙차로 곡이 전개되지만, 다양한 형태의 보컬 소스와 사운드 소스가 등장하며, 통통 튀는 목소리 활용으로 그들만의 스타일을 다시금 함축하여 선보인다.


비록 마지막 트랙인 「힝힝 (HingHing)」이 앨범의 마무리를 장식하는 잔잔한 트랙으로 구성된 것은 아쉬움을 남기지만, 그럼에도 이전 네 트랙에서 보여준 시그니처의 난잡함은 케이팝의 한 측면에서 신인 그룹이 보여준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완성도 높은 모습이다. 특히 다양한 요소를 통해 보여준 변주뿐만 아니라 그들의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는 독특한 보컬 활용 및 가사 등은 이전에 난잡함을 표방했던 음악들에서 찾기 힘든 시그니처만의 특징으로 남는다. 또한 이러한 시그니처의 음악은 2010년대를 넘어 2020년에 등장한 새로운 스타일의 난잡함으로써 새로운 케이팝 세대의 난잡함을 선보인 예시로도 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케이팝에는 단순히 서정성과 난잡함만으로 구별할 수 없는, 혹은 그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다양한 음악이 존재하지만, 케이팝만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 난잡함의 최극단에서 첫 시작을 알린 시그니처의 데뷔는 분명 주목해야 할 지점일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전개될 시그니처만의 난잡함이 띠게 될 모습에 분명 귀추를 집중해야 한다. 그들이 보여준, 그리고 앞으로 보여줄 난잡함은 케이팝의 새로운 모습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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