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7. 봄나물
나는 어렸을 적 모든 게 느린 아이였다. 다른 아이들이 한글을 읽고 쓸 때 나는 내 이름 석자 겨우 쓸 수 있었고, 지금 181cm인 나는 고등학교 입학 당시 150cm를 겨우 넘은 상태였다. 노래방에서 She's gone을 거뜬하게 부르던 나의 목소리는 훈련소 입소 후 아침 점호 때 애국가를 부르다 변성기를 맞이했다. 100m 달리기도 15초대로 겨우 들어오던 나는 운동회의 꽃이라 불리는 '계주' 시간에 주인공이 된 적은 없었다. 인간 트랙이 되어 열심히 달리는 우리의 청군(혹은 백군)을 위해 악을 지를 뿐이었다.
애석하게도 나는 빨리빨리 민족의 후예였으며, 빨리빨리 속 느림보 유병주는 남들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관심이 많이 필요한 아이였다. 모두의 관심을 양분으로 자라고 싶은 아이였다. 관심이 필요한데.. 어릴 적 읽었던 이솝우화 [토끼와 거북이]의 교훈은 느리지만 게으르지 않고 꾸준히라고 말했다. 하지만 난 게을렀고 꾸준하지도 못했다. 그럼 결국 거북이가 토끼를 이기기 위해서는 반칙이 필요했다. 답은 쉬웠다. 나는 남들보다 느렸지만 먼저 출발하면 됐다. 그런데 나보다 더 먼저 출발하는 느림보가 있다면? 그럼 아무도 가지 않는 길로 가면 됐다.
아주 어렸던 유년시절 아무도 걷지 않던 그 길을 택했다. 나는 그 길을 [야채]라고 부른다.
모두 소시지와 케찹을 좋아하던 그 시절 나는 시금치와 참기름을 선택했고, 참치와 마요네즈를 찾을 때 나는 돌나물에 초고추장을 찾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어딜 가든 밥상 앞에서 내 칭찬만 하셨다. 그리고 그 칭찬을 다른 어른들도 항상 거드셨다. '어쩜 이렇게 야채를 잘 먹어?', '우리 애도 이렇게 편식을 안 했으면 좋겠네'. 아주 묘한 기분이었다. 그런 기분에 취할수록 나는 야채를 더 찾았다.
점점 자라나면서 느림보가 관심을 받기 위한 다양한 반칙들이 많았지만 그 반칙 중 습관이 되었고 또 일상이 되어버린 것 중 대표적인 것이 야채다. 이제는 야채가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야채들 중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나물. 그 나물이 가장 빛이 나는 시간이 바로 지금. 봄이다.
봄이면 산과 들이 향을 내고, 여름에는 열매들이 저마다의 맛을 뽐내며 , 가을에는 논이 무르익고, 겨울이면 바다가 맛있어진다.
모든 음식들의 맛을 결정하는 첫 번째 기준은 재료다. 원재료가 좋으면 간만 잘해도 완벽하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철음식을 굳이 더 비싼 돈을 주더라도 그 계절에 즐긴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이 녹고 새싹들이 솟아나며 봄의 시작을 알린다. 그 봄의 향을. 봄의 내음을 가득 품고 있는 제철 음식은 단연 나물이다. 나물은 있는 그대로를 먹는 것
참나물, 취나물, 돌나물, 미나리, 쑥, 시금치, 아욱, 세발나물, 냉이, 달래, 두릅, 부추..... 이리 봐도 초록이고 저리 봐도 초록인 것이 다 똑같은 초록일 뿐인데. 알고 보면 정말 다른 맛과 다른 향을 품은 각자가 일품 재료들이다. 어떤 초록을 먹어야 할지 모르겠다면 어떤 초록이든 우선 먹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봄의 나물은 모두가 정답이니까.
그대로 먹어도 맛있는 것이 또 어떤 요리에 향을 더해 더욱 맛있는 요리로 탈바꿈시켜준다. 삼겹살을 구워 봄의 청도 미나리에 싸 먹는다면. 제철 생선 도다리를 공수해 국을 끓일 때 쑥을 한 움큼 집어넣어 향을 더해준다면. 우리의 국민 찌개 된장찌개에 손질한 냉이만 살짝 올려준다면. 두릅을 초순이 올라오며 너무 억세지기 직전에 따서 살짝 데쳐 먹거나 전으로 부쳐 먹는다면. 그 순간이 봄이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하다. 나물을 메인 요리로 쳐주는 이는 많지 않다. 사계절 맛볼 수 있는 돼지와 소, 닭 그리고 생선들은 일품요리가 되지만 계절의 맛을 한껏 품은 나물들은 보통 찬이 되어 사이드로 빠진다. 그 누구도 식탁의 가운데 놓아주질 않으니 아이러니하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자(앞선 글 [집밥] 편에서 인용한 말)는 말이 집밥이 아니라 봄나물에 더 어울리는 말일 수도 있겠다.
어릴 적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가면 갈수록 봄과 가을이 짧아지고 여름과 겨울이 길어지는 느낌이다. 그래서 그 찰나의 봄이 더 소중하고 애틋하다. 봄나물도 마찬가지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들의 식사는 밖에서 안으로 변화가 생기고 있다. 내 SNS에도 브런치에도 네이버에도 유튜브에도 저마다의 집밥에 대한 이야기가 넘치고 있다. 밖에 나갈 수 없어 마음껏 즐길 수 없는 봄을 나물과 함께 각자의 집에서 잠시나마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다. 별다른 요리가 아니라도 괜찮은 봄나물이니까.
쓰다 보니 나물 이 놈 아주 진국이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평범한 듯싶지만 자세히 보면 저마다의 개성이 강하고, 또 누군가와 함께할 때 그를 돋보이게 해 줄 수 있다니. 봄나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아 그리고 어제 어머니가 어디에선가 쑥을 캐오셨다. 오늘 저녁에는 쑥전을 부쳐봐야겠다.
1) 계주의 주인공은 애초에 포기했던 터라 나이가 들면서 마라톤을 선택했다. 빠를 건 재능이지만 지치지 않고 멀리 뛰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으니까.
2) 다비치의 8282 노래를 좋아한다. 근데 이 노래의 가사를 아무리 곱씹어봐도 왜 8282인지 모르겠다. 이 노래는 제목 따로 노래 따로의 느낌인데 역시 우리나라는 빨리빨리를 좋아한다.
2-1) 우리의 2002년을 빛내줬던 거장 히딩크 감독도 결국 우리나라에서 빨리빨리를 외치고 떠났다. (링크)
3) 과자 중에서 케찹이 동봉된 [야채타임]을 정말 좋아한다. 최근에 이 과자를 집어 들었는데 아저씨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4) 채소라고도 하지만 어린 시절 야채라고 불렀던 경험을 살려 본문에서는 야채로 통일했다.
5) 계절의 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기준은 다르겠지만 나는 이렇다. 봄의 냄새는 꽃과 나물 향. 여름은 한껏 쏟아지는 비의 향. 가을은 전어의 향. 겨울은 코끝 시린 냉기를 타고 들어오는 군고구마와 붕어빵의 향. (어쩌다 보니 여름 빼고 다 먹는 거..)
6) 도다리쑥국이라면 통영의 팔도 식당을 좋아한다. 코로나가 없는 다음 봄에는 꼭 먹으러 가야겠다.
7) 나의 어머니는 다양한 나물들을 상 위에 올려주셨는데 그중에서도 돌나물이 올라오는 빈도수가 높았다. 초고추장에 버무려서 바로 먹기도 하고 돌나물로 물김치를 담가 후루룩 마실 수 있게도 해주셨다. 어머니가 곧 돌나물 물김치를 해주기로 하셨다.
8)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살다 보니 나이가 들수록 봄나물이 점점 더 귀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