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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끔 Aug 08. 2020

이어폰이 잠시 엉킨 채로


    침대에 나뒹굴던 이어폰을 급히 챙겨 가방에 쑤셔 넣었다. 가방은 방금 막 집어넣은 물건들로 뒤죽박죽이었다. 분명 일찍 일어나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가방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 당장 5분 내로 출발해야 늦지 않게 지하철을 탈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늦잠을 잤거나 게으름을 피웠던 것은 아니다. 너무나 억울하게도 이날 나는 '찐으로' 일찍 일어났었다. 심지어는 너무 일찍부터 준비해 남은 시간에 어제 미뤘던 설거지마저 해치웠을 정도였다. 일찍 일어나야만 했던 나름의 이유도 있었다.

    


    이날은 오랜만에 나의 대학 동기들을 만나는 날이었다. 작년에 본 후 몇 개월 만에 잡은 약속이었다. 대학생 시절 함께 공부하고, 함께 술 마시고, 함께 수다 떨던 우리는 한 명 한 명 졸업하더니, 어느새 각기 전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대기업에 취직한 친구도 있고, 자신만의 커리어를 쌓아가는 친구도 있고, 시험을 준비하는 친구도 있다. 나는 대학생 시절 스타트업에서 근무했던 경험을 살려 졸업 직후 창업에 도전했으나 부족한 역량과 코로나라는 변수 덕에 올 하반기부터는 백수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렇다고 슬프거나 우울하진 않다. 오히려 새롭게 시작하려는 퇴사자의 마음과 비슷했다. 다시없을지도 모르는 귀한 휴식을 만끽하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고 있고 이런 시간이 소중하고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지금의 내가 아무리 행복하다고 해도 나의 이런 상황을 오랜만에 만난 동기들에게 얘기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무거웠다.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친구들이 비웃을까 봐는 아니었다. 오히려 함께 걱정해주고 격려해줄,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그들에게 걱정거리가 되는 것이 싫었다. 괜히 마음 쓰이게 하고 싶지 않기도 했지만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도 없진 않았다.


  어쨌든 이번 모임에서의 나의 목표는 그들에게 내가 잘 지낸다는 걸 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난 내 입으로 '나 너무 행복해!'라고 열 올려 말할 생각은 없었다. 그건 마치 SNS에 행복하고 즐거운 순간의 사진들만 올려 스스로의 행복을 강조하고 과장하는 것만큼 안 행복해 보이는 짓이다. 대신 나는 행색을 잘 갖추는 방법을 택했다. 서로 볼 꼴 못 볼 꼴 다 본 사이지만 이날 모임에서 만큼은 헤어나 메이크업에 신경 쓰고 싶었다. 착장도 심사숙고해서 준비하고 싶었다. 그래서 약속 당일, 나는 일찍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만반의 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방을 제대로 챙기지도 못하고 집 밖을 나서야만 했다. 시간이 모자랐던 이유는 헤어나 메이크업이 아니었다. 문제는 ‘소지품 챙기기’를 준비에 포함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거 뭐 가방에 대충 필요한 것 딱딱 넣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싶은데 이게 참 생각보다 시간이 꽤 걸리는 일이다. 핸드폰, 카드, 화장품, 마스크, 우산 등 필요한 것들이 다 서로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꼭 마지막엔 왔다 갔다 하느라 시간이 다 간다. 가끔 빼먹는 것도 하나씩 생긴다. 내 외출 준비의 마지막은 항상 이런 모습이다. 결국 이날도 나는 소지품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가방에 때려 넣었다.


 하지만 이런 급박함 속에서도 내가 절대 까먹지 않고 챙긴 물건 하나가 있다. 바로 이어폰이다. 이어폰…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이어폰이 없다는 건 오바 좀 보태서 고문을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동 시간 중 틈틈이 책을 읽는 교양인이나 지하철에서까지 노트북으로 일 하는 워커 홀릭이 아니라면 알 것이다. 이어폰이 없으면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유튜브, 넷플릭스, 음악 감상 등 심심한 이동시간을 달래주는 효자 앱들은 모두 이어폰을 필요로 한다. 물론 소리 없이 영상을 시청하며 잠시간 버텨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당신을 한층 더 고통스럽게 만들어 이어폰에 대한 갈증을 증폭시킬 뿐이다. 늦은 저녁,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하철 안에서 홀로 이 고통에 몸부림 칠 것을 생각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이토록 이어폰은 소중한 존재인 것이다.


 이토록 소중한 이어폰임에도 내가 그를 대우하는 방식은 매우 처참하기 그지없다. 나는 잘 때 이어폰을 오른쪽 귀에 꽂고 자는데, 심지어 뒤척이기도 많이 해서 줄이 엉키지 않을 수가 없다. 아무리 줄을 풀어놔도 아침이면 도루묵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풀지 않고 꼬인 상태 그대로 이어폰을 쓰기 시작했다. 신기한 건 그 상태로도 썩 불편하지 않다는 것이다. 조금 꼬인 채로 두면 그 이상으로 잘 꼬이지 않았다. 놀랍게도 고장도 나지 않았다. 매일 풀려고 용쓰는 것보다 이 편이 훨씬 편했다.



    이 날도 어김없이 엉켜있던 이어폰을 급히 가방에 챙겨 넣었다. 아슬아슬하게 지하철에 탑승한 나는 앉자마자 가방 속에서 바로 이어폰을 꺼냈다. 하지만 바로 귀에 꽂지는 못했다. 멈칫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앞에도, 옆에도, 옆 옆에도, 앞의 옆에도 무선 이어폰을 쓰는 사람들뿐이었다. 내 시선은 다시 손에 들린 꼬인 이어폰으로 돌아왔다. 나는 얼른 다시 가방에 집어넣었다.


 창피하다. 이어폰을 쓰면서 창피하다는 감정을 느낄 거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창피하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당혹스러웠다. 흔들리는 지하철이 요동치는 내 마음과 똑같았다. 몸도 마음도 흔들리는 채로 가만히 앉아있었다. 고개를 떨군 채 내가 왜 부끄러운 건지 생각했다. 아무래도 나만 무선 이어폰이 아니라서 부끄러웠던 건 아닌 듯했다. 그보다도 꼬여있는 그 꼬라지가 견디기 힘들었다. 평소에는 대수롭지 않았던 그 꼬임이 갑자기 미워 보였다. 그 모습이 마치 나 같았기 때문이었다. 무선 이어폰처럼 번듯하지 못하고, 꼬일 대로 꼬여있는, 풀어나가야 할 것이 한참 쌓여있음에도 그대로 내버려 둔, 그런 상태. 일찍 일어나 열심히 꾸민 게 무색할 만큼 이어폰은 적나라하게 지금의 내 모습을 까발렸다. 그리고 나는 까발려진 내 모습에 당당하지 못했다. 스스로가 느꼈던 창피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었다. 다만 지하철 안의 그 누구도 이런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오직 나에게, 나를 들킨 순간이었다.


가방 속에서 다시 이어폰을 꺼냈다. 꼬인 줄을 풀지 않은 채로,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마음이 가벼웠다. 좋든 나쁘든 이게 가장 나다운 모습이었다. 잠시 엉킨채로 있는 내 모습을 온전하게 받아들였다. 이제는 친구들과의 모임에 목적은 없었다. 순수한 반가움과 즐거움으로 임할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보다 조금 늦게, 친구들 만날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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