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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끔 Oct 01. 2019

남친따라 간 조기축구회에 가입했다

조기 축구회, 그  첫 경험

남자친구랑 사귄지 몇 개월 안 됐을 때 일이다.


그는, 매주 일요일마다 조기 축구를 하러갔다. 워밍업 + 경기 3시간 + 회식 + 샤워 루트를 밟고 나면 그는 침대에서 3초면 잠들었다. 비가오나 눈이오나 폭염이거나 그런건 중요하지 않았고 ‘일요일 = 축구’ 였다. 그래서 일요일엔 연락도, 만남도 힘들었다.


나는, 심심한 일요일이면 미지의 세계에 가 있는 남자친구의 하루를 상상하곤 했다. 간간히 들려주었던 조기축구회에서의 에피소드들을 토대로 이런 저런 모습들을 떠올려 봤지만 남자친구의 얼굴과 축구공을 빼면 상상의 나머지 부분들은 다 블러 처리된 것 마냥 흐렸다. 그의 일요일은 나에게 미스테리였다.


그렇다고 남자친구 주말의 절반을 가져가는 축구가 미웠던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내 취미는 PMP로 주말 밤 늦게 해외 축구를 시청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린 PMP에는 DMB기능이 있었는데, 지금으로서는 믿기지 않는 화질이었지만 좋다고 봤다. 굳이 Tv가 아닌 PMP로 봤던 이유는 인강을 보는 척/자는 척 해야했기 때문이었다. 간혹 주말에도 열심히 공부하는 기특한 딸에게 엄마는 과일을 가져다 주셨는데, 때문에 재빨리 책과 책 사이에 PMP를 꽂아 넣는 스킬을 연마할 수 있었다.


각설하고, 어쨌든 나는 나름 축구에 큰 매력을 느끼는 편이었단 얘기다. 형광빛 축구장 위를 수놓는 짜릿한 티키타카, 골보다 더 소름 돋는 함성소리, 각본이 없다고 믿기엔 너무 드라마 같은 전개. 이게 내가 느끼는 축구였고, 내가 생각하는 축구의 매력이었다.

 


축구를 생각할 때면 늘 떠오르는 머릿속 이미지는 대략 이런 느낌



래서일까, 내게는 주말 밤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전지적 카메라 시점에서 경기를 챙겨보는 것 만큼 나은 선택지는 없었다. 내게 축구는 스포츠보단 콘텐츠였다.


그러니까 남친은 그냥 보기만 하면 힘도 안들고 재밌는 축구를, 굳이 하루죙-일 뛰댕기며 하고 있었다. 그 이유가 너무 궁금해진 날에 결국 남친을 따라 조기축구회에 구경을 갔다. 남자친구의 지인들을 만나뵙는 자리니까 이쁘게 꾸미고 아마 오랜만에 치마도 입고 갔던 것 같다.


운동장에는 대부분 4-50대 아저씨들이었다. 간간히 내 또래도 있어 보였지만 끽해야 1-2명 정도였다. 어른들 + 극단적 남초집단 콤보에 온몸의 근육들이 뻣뻣하게 굳었다. 물론 상상 속 조기축구회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은 장면이었다. 하지만 현장에서의 왠지 모를 위압감만큼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처음 본 아저씨들(지금은 형님이라고 부른다)과 옆에 앉아 어색한 대화를 나누는 것 만큼 진땀나는 일이 있을까? 정신없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이후 오빠는 경기를 뛰러 나갔고 내겐 곧 현자타임(?)이 찾아왔다.


메인 스탠드에서 살짝 거리를 두고 앉았다.  그제서야 그곳의 모습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장 눈에 띈 것은 맨 앞에 있던 전술보드였다. 각자의 이름이 붙은 동그라미 자석들이 달려있었다. 본인의 이름이 달린 자석이 붙어있지 않았던 사람들은 스탠드에 남아 다음 경기를 준비해야만 했다. 자석들 간에는 자기력 외에 알력도 존재하는 듯 했다.


전술 보드 옆으로는 축구공 2~3개가 들은 길쭉한 가방, 공에 바람 넣는 펌프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또 그 뒤로는 생수 1.5리터 짜리가 군데군데, 맥심 커피 믹스가 뜯긴채로 한 박스, 편의점에서 자주 본 업소용 전기온수기가 한데 모여 있었다.


 

잘 나가는 조기축구회라면 전기온수기는 필수다.



시선을 뒤쪽 스탠드로 옮기자 늦게 도착하신 분들께서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계셨다. 상의를 훌렁 벗으시던 분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 분은 놀란 듯, 민망한 듯, 저 여자는 누군가 하는 듯, 한 표정을 지으셨다. 갑작스런 맨살에 나도 급하게 눈을 내렸다. 급하게 내리깔은 눈에 축구화 한 켤레가 들어왔다.


그 축구화는 마치 날 빤히 쳐다보는 듯 했다. 그래서 다른 것들로 눈을 옮길 수가 없었다. 파랑과 하양의 조화가 아주 평범한 미즈노 축구화였는데, 얼마나 많이 신고 뛰었는지 대번에 짐작이 가능할 만큼 꼬질꼬질하고 금방이라도 밑창이 빠져버릴 것처럼 닳아있었다(알고보니 코치님의 신발이었는데, 실제로 얼마 안가 망가져 새 신발을 구입하셨다). 마치 발레리나 강수지의 발처럼, 박지성의 비뚤어진 발가락처럼, 그 미즈노 축구화는 조기축구의 상징과도 같이 보였다. 축구에 대한 그들의 열정이었다.



@pixabay



부러움과 부끄러움. 그 열정의 축구화는 내게 그런 감정들을 던져줬다. '열정' 내 최대 콤플렉스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난 단 한번도 무언가를 닳고 닳도록 좋아한 적이 없었다. 나는 해리포터를 좋아했지만 영국 여행을 가고 싶은 정도는 아니었고, 해외축구를 좋아했지만 전술까지 빠삭하게 알고싶진 않았고, 인피니트를 좋아했지만 단 한번도 앨범을 사거나 콘서트를 보러간 적은 없었다.  좋아하는 마음은 늘 어느정도 선에서 멈췄고, 뭔가를 더 쏟아부어야 할 땐 늘 스탑을 외쳤다.


'진짜 덕후'의 반열에 오른 적이 없다는 것. 그것은 내가 '열정이 없는 청년'이라는 낙인을 찍어주었다. 덕질도 스펙이 된 요즘은 좋아하는 것도 '잘' 좋아해야 했다. 그냥 좋아하는 건 열정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미쳤어? 정도의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면 어디가서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디어에서는 미친 청년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져나왔다.



나는 왜 그 정도로 하지 못했을까?

'학교를 자퇴하고', '알바로 모은 돈을 모두', '빼곡히 쌓인', 등의 수식어를 붙여 줄 수 있는 무언가가 내겐 없었다. 그래서 '닳고 닳은' 이란 수식어가 딸린 축구화를 가진 조기축구회 형님들이 부러웠다. 청년인 내게도 없는 열정이 40대인 그들에겐 있었다. 닳고 닳은 축구화가 없는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 날 이후, 나는 축구화를 사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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