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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각기동대, 존재의 의미... 그리고

by Silverback


1995년 발표된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상징적인 애니메이션 작품. 시로 마사무네의 원작만화 '공각기동대(1989)'를 베이스로 한다. 신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주인공으로 올라선 르네상스혁명에서부터 시작되어 인간존재 의미의 근본적 화두를 던지기에 이른 데카르트 선생의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이 이 작품 주제의 철학적 실마리가 된다.


데카르트 이후 400년간, 인간들의 눈은 하늘이 아닌 자신 내부를 들여다보면서 존재의 의미와 정체성의 원리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고민의 윤곽은, 산업혁명의 기운을 등에 업고 탄생한 메리셀리의 '프랑켄슈타인'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점차 영혼이라는 것이 육체에 종속되지 않고 독자적 존재의 위상을 갖게 되었고, 이후 육체는 마치 영혼이 갈아입을 수 있는 옷처럼 소모적이고 부차적인 물질로 전락한다. 고대 그리스 신화 속에서 드러나던 탐스러운 허벅지, 꿈틀거리는 근육, 풍만한 가슴도 한낯 단백질 덩어리와 기계장치, 셀룰로오스 근섬유 등으로 변형된다. 언제든 갈아 끼울 수 있는 부품이 되어버린 육체는 이미 '테세우스의 배'가 되어 주인인 영혼을 기다린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과연 인간의 신체중 두뇌는 육체에 속하는가 영혼에 속하는가?



공각기동대는 인간의 신체 중 완전히 기계화할 수 없는 두뇌 일부의 인간성 영역에 대한 화두를 던지면서 애니메이션 역사상 유례없는 시각적 충격을 선사한다. 작품에서는 그 부분이 '고스트(ghost)'라는 고유명사로 표현되고, 신체의 모든 부분이 '의체'화 된 사이보그조차도 단지 '고스트'를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최소한의 인간으로 대접받는 관계가 설정된다. 과연 어디까지를 인간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 그것이 이 애니메이션의 일관된 질문이다.


이 지독스럽고 치밀한 애니메이션 작품은 철학과 진화역사, 과학, 정치, 인문, 심리분야를 사방으로 파고들면서 거대한 시각적 시(詩)를 그려낸다. 인간성에 대한 정의가 모호해진 미래를 그리면서도 그 단어의 경계선에서 어떻게든 인간적이라 불리는 것들을 붙들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보인다. 한쪽에서는 최첨단 장비를 사용하여 인간의 신체가 만들어지고 또 한편에서는 종이 지폐를 사용하여 물건을 사고파는 재래식 시장의 혼잡스러운 일상이 누런 강물과 함께 구불구불 흘러간다. 불규칙하고 무질서한 현실세계와 그 속으로 파고든 정밀한 기술의 어지러운 혼합. 만약 우리가 이 작품을 통하여, 그처럼 이어지지 않는 양 극단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는 부조리에 구토를 느낀다면 그것은 비단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한 사람의 신체에서 수십 갈래로 뿜어져 나오는 미세 기계부품들의 괴기스러운 움직임 때문만이 아니라, 어떠한 기계적 행위와 그 행위에 부과하려는 우리의 일상적 관념의 거리차를 좁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실로, 주인공 모토코가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서 마주하는 - 마치 극장 스크린 같은 유리창 너머의 풍경은, 어린 유치원생들이 우산을 들고 옹기종기 뛰어가는 지저분한 골목의 을씨년스럽게 낮고 무거운 현실의 풍경보다 가볍고 표면적이다. 그 두 풍경 사이에는 어떠한 과정이나 완충이 없으며, 그렇게 완충 없는 거리감 - 이를테면 상대방이 사이보그인지 아닌지 혹은 어디까지 기계로 만들어졌는지조차 모르게 하는 의구심과 체념의 정서가 양 극단을 가로막고 있으면서 서로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신체라는 껍질을 뒤집어쓴 채 단지 인간으로 정의할 수만 있으면 되는 고스트만 가지고 있도록 강요함으로써, 이 고요하고도 정밀한 애니메이션 작품은 인간성에 대한 비애와 공포감의 극한까지 차분하게 몰고 간다.



이 작품에서는 의식이나 영혼 같은 비기계적인 부분을, 기계적인 정밀함의 극치에서 스스로 잉태되는 자연발생적 사건의 하나로 도발하는 것 같다. 실제 생물의 진화의 과정에서는, 단세포라는 생명체의 몸뚱아리 자체가 진화의 가지를 타고 꼭대기까지 올라가지만, 네트워크 세상에서는 육체 없는 인공지능이 위계와 단계없이 병렬스러운 존재론적 가치를 갖는다. 그 지능은 결국 자신의 의식을 이용하여 사물을 제어하고 그 안으로 이동하여 현실세계에서 물리적 행사를 휘두르는 지경까지 성장한다. 그리고는 급기야 망명까지 신청하고야 만다. 즉, 물리적 진화를 정신적 진화의 영역으로 끌고 온 것이라는 뜻. 그런데 이것이 말이 되는가 아닌가의 차원을 따지기 이전에, 완벽한 사고를 하는 기계장치를 우리가 대화상대로서 인정해 줄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를 먼저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Ai는 스스로 네트워크의 정보를 수집하여 소설을 쓰고 인간과 대화하며 영상도 만들어낸다. 만약 서로 얼굴을 맞대는 일 없이 사이버 상으로만 대화하는 사람이 이러한 사건을 맞이한다면, 그는 진정한 인간과 대화하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게 된다. 과연, 인간성은 육체라는 고삐에서 벗어나 성립할 수 있을까? 어느 서점에 가서 재미난 소설을 읽었는데, 그것이 사람이 쓴 것이 아니고 Ai가 만들어낸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과연 어떠한 감정을 갖게 되는가?


자신은 인간이 만든 해킹프로그램이 아닌 스스로 자생한 고유의 존재라면서 독자적 생명체로 거듭나고 싶어 하는 인공지능의 경고는 우리의 귀를 기울이도록 만든다.


인간의 유전자는 자기 보존을 위한 프로그램에 불과해
생명은 정보의 흐름 속에서 생긴 결정체 같은 거야
종으로서의 생명은 유전자라는 기억 시스템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은 오직 기억에 의해 개인이 되는 거지
비록 기억이 환상의 동의어일지라도
인간은 기억으로 살아가는 것.
컴퓨터의 보급이 기억의 외부저장을 가능하게 했을 때
인간은 그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했어야 했어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떠오르게 하는 이 서늘한 협박은 기억과 망각에 의존해 살아가는 현 인류의 고단한 육체성을 소환한다. 육체성이란 정신과 육체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기억을 만들어간다는 것이고, 그리하여 의식과 육체의 분리를 배제한다. 서로가 상대방 위에 군림하지 않고 동반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마치 하나처럼 처신하는 것. 그것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믿음이고 가치이다. 그러나 인간이 단지 유전자나 인위적으로 프로그램된 의식에 의해서 육체가 도구화되고 사용되는 소모품일 뿐이라면 과연 그것을 인간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 작품 내에서는 Ai가 기계화된 인간의 뇌를 해킹하여 그의 기억을 모조리 삭제시키고 다른 기억을 집어넣어 스스로의 욕망을 구현하려는 모습이 묘사된다. 기억이라는 것이 휘발성 가득한 하나의 부품처럼 다루어지는 것으로 묘사됨으로 해서, 인간의 의식은 신체를 잃고 외톨이가 된다. 인간이 슬픔을 느끼는 때는 과연 언제인가? 자신이 기억을 잃어버렸을 때인가? 만약 그렇다면,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은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



인간 개개인이 갖는 개성과 고유함, 기계나 전자신호로 치환될 수 없는 오장육부의 끈적임, 하루에도 몇 번씩 오락가락하는 감정의 울렁거림 모두 수치화할 수 없는 것들이다. 과학계에서 그 유명하다는 예쁜 꼬마선충의 불과 몇백 개 되지 않는 신경세포를 인간이 모두 파악하고 해석해 내었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다. 숫자로 변환하기 힘든 얼굴 표정의 미묘한 변화, 굴곡진 표면을 흐르는 땀과 유분, 그와 동시에 연계되어 나오는 목소리와 억양, 톤의 높낮이 혹은 오감을 동반한 감정의 표현과 전달 같은 것들이 모두 동시에 혼합하여 생명을 더욱 생명답게 한다. 즉, 분절되고 코드화되고 구분된 각각의 모듈이 아닌, 완만하게 이어지고 측정불가하며 서로 얽힌 것들이 하나와 전체로 파악되는 그 일체감 말이다.


작품 말미에, 돌연변이로 자생한 Ai 의식체 '인형사'는 결국 자신과 닮은 반쪽짜리 사이보그인 모토코와 융합하여 네트워크적인 진화를 꾀한다. 해킹프로그램의 오류로 인하여 방대한 네트워크 상에서 의식의 다발화(bundle)로 생명을 얻은 인형사, 그리고 인간의 신체를 하나씩 소거하여 최소한의 고스트만 남긴채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하는 에고(ego)의 모토코. 이 둘의 결합을 통하여 감독은, 인간의식을 해석하는 인류의 보편적인 두가지 시각을 적나라하게 도마위에 올려놓는다. 이 둘의 융합은, 단일하게 만들어진 생산물들은 치명적인 결함을 갖게 마련이며 바이러스 하나로도 전멸할 수 있다는 대량생산 체제의 허점을 훈계하는 듯, 고유하고 유일무이한 진화 생명체로 남기를 희망하는 모습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뇌의 일부분만을 유기물로 남긴 미완성 로봇의 인간적(?)인 비전이 될 수 있는가? 어쩌면 그것은 인간의 영역에 들어올 수 없다는 역설의 비극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지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먹고 자고 싸는 행위를 요구하는 욕체의 원시성과는 별개로 인간이 환경 및 주변과 연결되는 관계에서 인간 고유의 정체성이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것도 합리적일 것이다. 여행을 다녀왔던 기억, 누군가를 만나서 주고받았던 대화, 어떠한 자리에 앉았다가 일어난 온도, 벗어놓은 바지가 남긴 형상 같은 흔적이 오히려 인간 자체를 설명해 줄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인간성이라는 것은 인간 속에 담겨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밖으로 뻗어 넓게 여기저기 걸쳐져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작가 김영하는 그의 뛰어난 산문작품 '읽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구글 같은 기업은 우리를 빅데이터의 한 점으로 본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몰개성적 존재로 환원되는 것을 거부할 수 있다. 바로 우리 안에 나만의 작은 우주를 건설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현실의 우주가 빛나는 별과 행성, 블랙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크레페 케이크를 닮은 우리의 작은 우주는 우리가 읽은 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들이 조용히 우리 안에서 빛날 때, 우리는 인간을 데이터로 환원하는 세계와 맞설 존엄성과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인공지능 '인형사'와 결합하여 새로운 아이로 태어난 모토코의 미소에서 오히려 슬픔같은 것을 느꼈다. 그것은 작품 전체를 감상하고 엔딩씬까지 연결되어 이어진 내 감정의 단면이다. 작품 속 인공지능은 고린도전서를 인용하면서 성장과 거듭남의 신화 속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였지만, 모토코가 진정으로 원한 것이 과연 그것이었을까. 마치 아시아의 어느 도시 뒷골목인 듯한 여러 장면에서 묘사된 투박한 서민들, 철가방을 든 음식배달원, 장바구니를 든 여인, 낡은 함석지붕과 야채무더기, 녹슨 간판들과 손으로 쓴 듯한 글자들. 이러한 일상의 불규칙하고 예측불가능한 유동성이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유난히 물이 많이 등장하는 이 작품의 쓸쓸한 풍경을 보면, 촉촉하게 내린 비로 더욱 생기를 찾고 스며들 곳을 향하여 계속 흘러가는 움직임 자체가 감정을 찾아 떠도는 영혼의 활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마음 한구석이 퍽퍽한가. 혹은 그리움으로 아련해지는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듣고 싶은 하루. 잠든 아이의 뺨을 어루만지면서 하지 못했던 말을 속삭여줄 때의 흐뭇함, 혹은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기 위해 하루종일 밖에서 기다리던 수난의 기쁨을 되찾고 싶은가. 어쩌면 인간이라는 것은 '행복'을 찾아 떠나는 여행길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노련한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 작품에서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 어찌 보면 인간존재의 목적은 고유성이나 독자성, 대체불가능성이나 혹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우월함도 아니다. 신기술과 결합한 존재양식의 새로운 패러다임도 모두 부차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근본적인 목적은 '행복'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 작품을 감상한 이들은 모토코에게 이렇게 물어야 할 것이다. '새롭게 진화한 그대, 이제 행복할 것인가'라고.


Ghost.in.the.Shell.1995._ending.jpg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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