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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요 Jun 15. 2022

에이전시 출신 디자이너의 스타트업 적응기

스타트업으로 이직했다

5월 초, 스타트업으로 이직했다. 에이전시에서 일하며 여러 회사를 위한 UX 솔루션을 제공하다 보니 ‘내’ 프로덕트를 키우고 싶었다. 프로덕트에 더 깊게 관여하고 내가 만든 변화에 대한 실제 시장의 피드백도 받고 싶었다. 그렇게 프로덕트 디자이너라는 새로운 직함을 안고 의욕에 활활 타서 첫날 출근했다.


부푼 기대감만큼 눈을 번쩍이며 인계를 받기 시작했는데 곧장 머릿속에는 수만 가지 질문이 피어났다. 아무래도 에이전시와 스타트업의 인하우스 환경이 대비되어 차이를 더 크게 실감했을 것이다.

에이전시에서는 기획자/디자이너들끼리 프로젝트마다 팀을 꾸렸기 때문에 같은 목표와 이해관계를 가진 채로 질주하는 환경이었다. 서로의 업무를 이해시킬 필요가 없었으며, 모든 것이 디자인에 초점이 맞춰졌었다.

이직한 스타트업은 한 명의 PO, 한 명의 디자이너, 다수의 개발자로 구성된 집단이었다. 개발자의 업무 사이클에 기획자와 디자이너가 편입되어 움직이는 구조가 생소했다. 무엇보다 디자인 업무 환경에 당황했다. 스타트업이고 프로덕트 팀이 꾸려진지 얼마 안 된 것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세팅 안된 것들 투성이었다. 디자인 시스템은 차치하고 정리된 IA도 없었고, 피그마 파일도 관리가 안돼 최종 디자인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에이전시에서는 짧은 프로젝트더라도 기본적으로 세팅해온 것들이었다. 어디서부터 뭘 시작해야 할지 몰라 아득한 기분과 당장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책임감에 마음이 무거웠다.


경력자의 온보딩은 신입 때와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쌓아온 커리어와 경험에 기대어 빠르게 실무를 소화할 수 있으리라고 회사도 나도 기대했다. 그러나 새로운 회사는 역시 새롭다. 전혀 다른 사람들과 환경에 녹아들어 같이 굴러가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입사 전 스타트업에 종사하는 분들의 경험에 대해 많이 묻고 다녔는데, 공통적으로 가서 경험해보기 전까지는 모른다고 답했다. 두세 달은 조급함 없이 주변을 살피고 조직을 알아가는 데 시간을 충분히 쓰라는 조언을 받았는데, 지금 와 생각해보니 100번 되새겨도 모자람이 없다. 세상 아래 같은 스타트업 없다는 마음으로 우리의 조직을 살피기 시작했다.




스프린트와 디자인 싱킹 그 중간 어딘가

스타트업은 한정된 리소스로 빠르게 도약해야 한다. 처음에는 성장만 할 수 있다면 그만이지만, 프로덕트와 함께 팀의 규모가 커지면서 업무 프로세스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다. 이직한 스타트업은 이제 막 2주 단위의 스프린트 방식을 도입해 자리 잡아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스프린트 (Sprint)

스프린트는 애자일과 스크럼 방법론의 대표적인 방안으로, 팀에서 짧은 주기를 설정해 기간 내에 할 일을 정하고 실행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스프린트가 반복되며 프로덕트는 꾸준하고 작은 시도로 디벨롭된다. 스프린트는 액션 아이템을 설정하는 ‘스프린트 플래닝’, 스프린트 기간 동안 진행 상황을 점검하는 ‘데일리 스크럼(혹은 스탠드업)’, 스프린트 후 작업 내용을 공유하는 ‘스프린트 리뷰’, 다음 스프린트 사이클을 보완하기 위한 ‘스프린트 레트로’로 이루어진다.

Atlassian Agile Coach, https://www.atlassian.com/agile/scrum/sprints


스프린트 첫 사이클을 참관하듯이 경험한 후 아래의 점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팀원들은 이때 나를 ‘fly on the wall (벽에 붙은 파리)’로 장난스레 칭했다. 별다른 액션 없이 벽에 붙어 가만히 지켜보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만큼 처음에는 의견을 내기보다 상황을 파악하는 데 집중했다.

   

개발팀의 업무 사이클: 개발자들이 어떻게 일하는지를 파악하고 그들과 어떻게 협업할지 논의할 수 있었다. 이야기하다 보니 이들도 디자인 가이드에 대한 니즈를 크게 느끼고 있음을 발견했고, 장기적으로 어떻게 구축해갈지 계획할 수 있었다.

현재 이슈와 일의 우선순위: 팀이 현재 어떤 이슈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지, 무엇에 가장 집중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팀의 방향성에 공감하고, 일을 제안할 때 우선순위를 정하는 기준을 세울 수 있었다.

Todo 제안 방식: 언제 누구에게 어떻게 일을 제안하고 의논 해아 할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스프린트 플래닝, 리뷰, 레트로 등 어떤 회의에 참석할지도 정해져 내 업무 루틴도 정리할 수 있었다.


디자인 싱킹

에이전시에서 익숙하게 해온 방식은 디자인 싱킹에 가까웠다. 디자인 싱킹은 ‘Empathize(사용자에 공감하기)’ > ‘Define(문제 정의하기)’ > ‘Ideate(해결방안 탐구하기)’ > ‘Prototype(검증을 위한 목업 만들기)’ > ‘Test(사용자에게 실험해보기)’ > ‘Implement(인사이트 반영하기)’로 구성된다. UX 디자이너들이 선호하는 방식이며 ‘Double Diamond’처럼 해결 방안을 찾기 위해 확장하고 수렴하는 것이 핵심이다.

확실히 애자일 방법론에 비교하면 빠른 실행보다 앞단의 고민하는 단계에 많이 집중된 방식이다. 아이디어를 바로 개발하거나 구현하는 대신 프로토타입을 통해 가설을 검증하는 단계가 있어 서비스를 신규 기획하거나 개편하는 큰 규모의 프로젝트에 많이 적용했다.


Nielson Norman Group, https://www.nngroup.com/articles/design-thinking-study-guide/


위에 언급한 PO와 한 명의 디자이너는 더 효과적으로 스프린트의 방향성을 잡기 위해 디자인 싱킹 칸반을 따로 만들어 관리하고 있었다. 굵직한 목표를 잡거나 백로그 아이템에 오르기 전 문제점들이나 가설을 취합해 보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입사 직후 서비스를 살피며 발견했던 다수의 문제점들이 여기서 논의되고 있음을 알고 팀원들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칸반에 있는 아이템들이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디벨롭할 수 있도록 스프린트와는 별도로 디자이너들의 워크숍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 중간 어딘가

작은 스타트업 조직임에도 하나 이상의 업무 프로세스를 동시에 시도해보고 있음을 보고, 이전에 보았던 “Lean, Agile, & Design Thinking by Jeff Gothelf at Mind the Product Singapore 2019” 영상이 생각났다. 많은 조직에서 이상적이라고 여겨지는 Working Process를 도입했다가 실패하는 케이스와 절차(process) 보다 중요한 principle(원칙)에 대해 다룬다.

Lean, Agile, & Design Thinking by Jeff Gothelf at Mind the Product Singapore 2019


처음에 채용될 때 디자인팀이 아직 없으니 온보딩 후 디자인팀의 프로세스를 새로 잡아가도 좋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팀원들과 다시 상의해본 결과, 직무 별로 프로세스를 달리하면 서로 호흡이 달라지고 바라보는 방향성이 달라질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아래 세 마리의 개 이미지처럼 말이다. 기본적으로는 개발팀의 스프린트에 맞추되 장기적인 디자인 프로젝트나 별도로 운영해오던 디자인 싱킹 칸반을 어떻게 병행할지는 현재 논의하는 단계다.

Jeff Gothelf의 <Lean, Agile vs Design Thinking Principles Over Process>


리서치하다 보니 Design thinking, lean startup, agile development를 전부 융합해야 한다는 기사와 이미지도 발견했다. 어떻게 일하는 것이 최선인지 알기란 정말 어렵다. 결국 같이 일하는 팀원들과 끊임없이 조율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목표와 원칙을 근간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SmartOrg, https://smartorg.com/




조직에 소프트랜딩 하려면

이직해서 공감했던 또 다른 말은 스타트업은 사람이 핵심이라는 것이었다. ‘좋좋소’에 나올 법한 말처럼 들리지만, 정말이다. 열정 있고 동기부여가 확실히 된 사람들이 모여 개인의 역량을 실컷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라고 느꼈다. 따라서, 스타트업에 잘 적응하는 길은 그들의 열정에 동화되는 것이라는 혼자의 결론을 내봤다. 조직이 어딜 바라보고 무엇을 위해 달려가는지를 알고 설득만 된다면, 나도 같이 가고 싶어지지 않을까. 사실 온보딩을 위한 시스템이 전혀 없어서 다른 선택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소프트랜딩을 위해 조직에 적극적으로 기대기로 했다.


조직에 공감하기

반복하는 말이지만, 스타트업은 다이내믹하고 동적이라 체계적인 세팅이 없더라도 팀은 쉴 새 없이 나아간다. 이전 회사와 비교해 뭐가 부족하고 안돼 있는지 찾는 것은 무의미할 수 있다고 느껴 내 마인드를 다시 세팅하기로 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한 결 편했다. 팀의 상황을 이해하고 팀원들에게 공감하기 시작하니 내가 어떤 역할을 수행하면 좋을지, 당장 어떤 일부터 시작해야 할지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팀 내부에 효율성을 증진시킬 수 있는 업무와 프로덕트 업무 크게 두 갈래로 나눠 업무를 세분화했다. 그 후 업무에 들어가는 공수 대비 효과를 측정해 팀원들과 일의 순서도 정할 수 있었다. 다음 스프린트 플래닝부터 본격적으로 함께한다.


조직과 친해지기

코로나 이후로 지속적으로 재택근무를 해왔어서 이직 후 출퇴근하는 것이 정말 고역이었다. 다시는 안 볼 거라 생각했던 출퇴근 시간대의 빽빽한 줄과 지옥철에서 하루 두 시간씩 시간을 보내니 체력이 모자람을 느꼈다. 운동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아무튼 온보딩 하는 동안은 출근할 것을 권유해 반강제로 시작한 통근 생활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장점이 많다. 팀원들과 출근하고 밥 먹으며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기 좋다는 것이다. 앞으로 할 일의 방향성도 확인할 겸 어떤 일을 수행할지 설명하다 보니, 팀원들과 신뢰도 자연스레 쌓이고 있음을 느낀다. 무엇보다, 수시로 몰아치는 궁금증을 해소하기에 편리하다. 아직 배워가는 중임을 빌미로 마음껏 물어보고 있다.


한 명 한 명이 귀한 스타트업에서 어떻게 자리 잡아갈지, 어떤 시너지를 낼 수 있을지 스스로 기대된다. 앞으로 할 일이 무궁무진한 상황도 스타트업의 어수선한 분위기도 재밌고 새롭다. 연말에 올해를 회고하며 “스타트업 성장기”로 다시 찾아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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