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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여름 Dec 09. 2019

조커(JOKER, 2019)

정의란 무엇인가

#조커







 뒤늦은 조커 리뷰입니다. 흥행의 필수 조건인 가족 오락성은 전혀 갖추지 않은 이 영화가 관람객은 500만명을 넘어섰고 이번 할로윈데이에 가장 많이 선택된 캐릭터 또한 조커 일 것입니다. 조커의 '아서'란 본명을 알게된 우리들은 왜 이 영화에 열광했을까? 라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와킨 피닉스가1조커 역을 맡는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부터 올 것이 왔구나 라며 1년 이상 기다려온 분들도 많겠지만 와킨 피닉스라는 배우의 존재를 잘 몰랐던 분들도 있겠죠. 와킨 피닉스가 꾸준히 많은 작품에 출연해 왔지만 국내에서 흥행에 성공한 영화를 들춰보자면 싸인, 글래디에이터, Her 정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나마 '싸인'이나 '글래디에이터'는 이제는 좀 시간이 지난 작품이니까요. 그렇다면 와킨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면 대중들은 이 영화의 어떤 점에 끌렸을까요. 행오버를 연출해왔던 토드필립스 감독에게 끌렸던 것도 아닐텐데 말입니다.









 매년 수많은 히어로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시대에서 빌런으로서 그 위치를 공고히 하고 있는 조커는 가장 인기있는 히어로 중 하나인 배트맨의 대척점에 있는 캐릭터입니다. 영화 스토리의 인과성을 위해 빌런들의 배경에 대한 설명이 대게 주어지는 반면에 조커는 그 배경이 그동안 감추어져 있었죠. 다크나이트에서 조커 스스로 자신의 과거에 대해 설명하는 듯 했으나 2번에 걸쳐 다른 스토리를 말합니다. 이름 그대로 이 쪽이 될 수도 저 쪽이 될 수도 있는 조커는 배트맨에게 있어서 필요충분조건 같은 절대악 같은 존재입니다. 듣기로는 코믹스 세계관에서도 좀 유별난 위치에 있는 존재로 설명되더라구요. 영화 '조커'에 대한 관심은 이 미스테리어스한 조커의 과거가 다들 그렇게 궁금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히어로가 아닌 빌런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에 대한 호기심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나면 우선 와킨 피닉스의 연기에 감탄할 수 밖에 없습니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메소드 연기의 달인으로는 왓킨 과 다니엘 데이 루이스 정도가 생각나네요. (아쉽게도 다니엘님은 은퇴하셨습니다.) 당연하게도 2020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의 수상은 왓킨이 가져갈 것으로 생각될 정도입니다. 다이슨 청소기는 비할 바가 아닌 그 놀라운 흡입력에 다들 영화를 보고나서 조커의 계단 춤을 따라 추셨을 것만 같습니다.










도입부의 웃음 장면, 계단 춤 장면등 소름끼칠 만한 장면들이 넘쳐나지만 제게 다가왔던 장면은 초반부에 아서가 상의를 탈의한 채로 신발 끈을 묶는 장면입니다. 멍자욱과 한없이 구겨진 것만 같은 등의 모습은 조커로 변모한 아서의 당당한 어깨와 극명한 대비를 이룹니다. 표정과 대사를 넘어 온몸이 함께 연기한다는 것을 관객들이 느끼게 하는 것이 사실 이 영화의 최대 장점이자 힘입니다. 또한 이 놀라운 흡입력에는 OST도 꽤 많은 지분이 있다고 느껴집니다. 와킨의 연기와 힐뒤르 그뷔드나도티르(Hildur Guðnadóttir)의 음악에 빨려든 관객들은 어느새 아서의 감정에 깊게 이입되는데 할로윈 날에 조커 코스튬이 제일 많았던 이유가 있었겠죠.














 조커가 분명 빌런이란 걸 알고 있음에도 관객들은 아서의 입장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아서는 자신의 폭력의 정당성을 주변에서 구합니다. 배려없는 주변인들과 부패한 사회, 자신을 버린 아버지와 학대했던 엄마에게 화살을 돌리고 자신은 조커라는 가면 안에 들어가 폭력을 행사합니다. 남들을 이기적이라 비난했던 아서도 결국 이기적인 틀에서 벗어나진 못합니다. 조커를 비질란테로 여긴 고담시의 시민들은 조커의 탈을 쓰지만 그들과 아서와는 유기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그저 서로 정당화의 수단이 될 뿐이지 설득력있는 정의 아래 서진 못합니다. 그럼에도 관객들이 아서의 입장에 서게 되거나 안타까움을 갖는건 많은 관객들이 자신의 처지를 아서와 동일시 여기기 때문이겠죠.













마지막에 아서가 얘기했던 웃지못할 조크는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자신의 죽음을 예기치 못하는 상담사에게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 영화의 마지막 조크였지만 크게는 이 영화를 보고 선동되어진 관객들에게 던지는 조크는 아니었나 싶습니다.



'조커는 빌런이다'라는 대 전제 아래 위와 같은 생각을 꾸려내지만 사실 영화속 고담시 사회의 일원이 된다면 저 역시 조커의 탈을 쓰게될지 모르는 일입니다. 개인의 이기심이란 것은 인간의 본질성 중에 하나일 것이고 이를 통제하는 사회의 통제력이 붕괴되어 갈 때 그 안에서 올바른 정의를 바라보는 것은 가능한가. 다시금 다크나이트에서 배트맨에게 '정의란 무엇인가'를 묻던 히스레저가 이어서 떠오르는건 조커의 오리진을 이 영화가 잡아내는데 성공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영화의 다른 부분을 짚어보자면 아서의 망상과 현실의 경계와 토마스 웨인과의 관계에서 의견을 달리 하시는 분들이 많더군요. 물론 해석은 자유지만 저는 어느 정도 영화에서 분명히 표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토마스 웨인의 아들이 맞냐 아니냐에 대한 얘기가 나름 재밌는 분기점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아들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아서는 엄마 페기의 말을 듣고 웨인을 찾아갔지만 아버지로부터 거부 당합니다. 이후 병원 기록을 보고 페기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하고 엄마를 죽이지만 나중에 발견된 페기의 사진에 남겨진 글귀와 T.H 서명은 분명 그 둘의 관계가 특별했음을 암시합니다. 하지만 이미 조커로 변한 아서는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아서가 페기의 정신병 유전자를 물려받아 싸이코패스의 성향을 보이는 것이다 라는 의견들이 많은데 그 보다는 토마스 웨인의 아들로 보는 것이 부패한 사회의 단면을 추가함과 배트만과의 필연적 관계를 더 깊게 한다는 것에서 이 쪽으로 읽고 싶어지네요.












처음에 생각을 시작할 때는 너무 쉽게 선동되어진 관객들의 반응에 코웃음 쳤다가도 글을 마무리하며 다시 생각해보니 아서를 객관적인 시각에서 빌런으로 바라보기는 매우 어려움을 느낍니다. 아서와 동일시되지 않고 한 발 물러나와서 보았다 하더라도 조커를 만들어낸 부패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느끼는 책임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각적인 해석의 논란 속에 훌륭한 작품이 나왔다라는 것에는 대체로 이견이 없습니다. 다만 이 작품에 대한 감독의 의도는 어디까지였냐 라는 것에는 의문들이 많더군요. 해석의 여지를 핑계로 별다른 말을 안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과연 이 영화가 와킨에 의해서만 하드캐리된 작품이 될 것인지 아닌지는 차기작을 기다려 볼 수 밖에 없겠습니다. 쉽지는 않아보입니다.







1) 호아킨 피닉스로 많이 표기되는데 'H'가 묵음이라 합니다. 본인이 와킨이라고 발음해 달라고 한 일화가 있어 왓킨으로 표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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