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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섬 Mar 31. 2021

변곡점


우리 동네에 산업단지가 생겼다. 동네 위쪽으로는 신도시가 생긴단다. 또 아파트 단지가 하나 들어섰다. 다소 한적하던 동네가 딱 변화한 정도만큼 북적해졌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공원은, 내가 어릴 적에 비포장 흙길이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인지 이곳을 걸을 때마다 그때 느끼던 흙내음을 맡곤 한다. 또 꼭 붙잡고 있던 엄마 아빠의 따스한 손이 기억난다. 양손 꽉 붙잡고, 포장되지 않은 울퉁불퉁한 길 끝까지 걸어가서 주욱 늘어선 꽃가게들이 있는 어떤 곳에서 꽃을 사던 기억이 난다. 열 걸음, 또 백 걸음마다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것들이 급하게 앞으로만 나아가려 하는 내 발길을 붙잡는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조차도, 꽤 많은 부분이 변했다. 이제는 과거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복원하려면 대부분의 영역을 기억에 의존해야 할 정도다. 나는 얼마나 변했나. 내가 기억하던 나의 모습은 아직 남아있나. 


한결같다는 말은 언제나 나를 머쓱하게 만들곤 했다. 모든 것이 복잡하게 급변하는 각박한 세상 속에서, 너만은 그대로라 참 다행이고 보기 좋다는 의미라고 머릿속으로는 받아들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켕기는 게 있어 나만 변화하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아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어서다. 한때 내 인생의 대목표였던 대학교 진학이 좌절될 위기에 있었다. 재수라는 큰 결심을 하고 학원에 들어가 실패에 대한 극복과 성장이라는 드라마를 쓰기도 전에 막차를 타면서 예정된 시나리오대로 흘러가지 않아서일까, 그때부터 나는 큰 목표를 잃은 채 시간의 풍파에 이리저리 휩쓸려 지금으로 흘러왔다. 아무리 좋은 배와 나침반이 있어도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없다면 절대 도착할 수 없다. 이를 깨닫기까지 왜 이리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시기들 같지만 그 안에 나름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는 시간이라 그런지, 아무리 마음을 굳게 먹어도 도저히 쉽게는 그 시절을 헛된 시간이라고 부르지는 못하겠다. 


언젠가 들었던 서커스단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릴 적부터 줄에 묶여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 줄을 풀고 도망칠 수 없음을 학습한 동물은, 몸이 다 자라 조금만 힘을 주어도 자유를 손에 넣을 수 있음에도 학습된 기억에 지배되어 절대 탈출하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나는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케이스인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더 우스운 케이스다. 어린 나이에 스스로의 힘으로 줄을 풀고 세상으로 나갔던 짐승이, 더 힘이 세고 더 자유로운 다른 동물들을 보고 '내가 감히 여기에 있을 수준의 동물이 아니구나'라고 생각하며 다시 스스로를 묶고 그게 최선의 삶인 것 마냥 만족하며 살았다니. 한계를 먼저 짓고 생각하면 절대 발전할 수 없다. 분명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될 때까지 무려 7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래도 다행인 건, 7년의 세월 끝에 다시 내 가슴속에도 씨앗을 심어내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이 씨를 심어 내기까지 나를 지나쳐 온, 그러니까 내게 물을 주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자 이 글을 적는다. 중요한 건 이 씨앗이 나라는 토양에서, 또 환경에서 자라나지 못할 수 백 수 천 가지의 이유들이 아니다. 중요한 건 바로 이 씨앗을 심을 때의 두근거림, 또 자라나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 다 자라 열매를 맺을 때의 뿌듯함, 또 다음 씨앗을 준비하는 설렘,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상상하며 느끼는 희망과 가능성이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 씨앗 하나를 남기고 간다. 부디 당신이 이 씨앗을 잘 심어다가, 이왕이면 멋지게 키워줬으면 한다. 바라건대 이 사회가, 서로의 씨앗을 거리낌 없이 나눌 수 있는 세상이면 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각자의 마음속에는 너무나도 빈 공간이 많기에. 너무나도 허전하고, 또 평생 그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살아가면서도 끝끝내 채우지 못한 채 공허히 죽어가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기에. 또 인연을 소중히 했으면 한다.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만이 줄 수 있는 햇볕과, 눈길과, 정성과, 따뜻한 마음이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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