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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성평화지킴이 May 25. 2020

빛과 소리의 비단길, 화성 실크로드

1. 옛 신라인들이 오가던 길, 화성 실크로드를 찾아서 

터널을 지나는데 차창으로 아카시아 꽃 향기가 뭉클, 넘어왔다. 나를 둘러싼 대기에서 차가운 기운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 달콤하고 따뜻한 공기 덩어리가 채워가는 계절이다. 행여 늦지 않을까 망설이던 꽃들마저 막바지로 피었다가 우수수 떨어진 자리에 수줍은 연두 빛 잎사귀가 돋아나 진한 녹색으로 변해가는 시간, 늦봄에서 초여름으로 넘어가는 청명하고 화사한 계절이다.

격리라는 단어가 익숙해진 지 어느새 4개월, 꽁꽁 얼어붙은 겨울이 따스한 봄으로 녹아가는 시간은 코로나19에게 송두리째 빼앗겼다. 변해가는 바깥 풍경을 신경 쓰는 게 사치로 느껴질 만큼 감염자수가 폭발하던 곤혹스러운 시간을 우리 모두가 견뎌야 했다. 코로나19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모두가 날카롭게 신경을 세워야 했던 ‘사회적 거리 두기’에서 조금은 숨쉴 여유가 있는 ‘생활 속 거리 두기’로 방역체제를 전환하면서 잔뜩 움츠렸던 일상이 조금씩 기지개를 켠다. 그래도 꽁꽁 닫힌 실내보다는 넉넉하게 거리를 둘 수 있는 야외가 서로 마음이 더 편한 요즘, 화성군공항 예정지 주변을 걸어보겠다는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단단히 챙겨 쓴 마스크 안의 입김이 슬슬 후끈하게 느껴지는 초여름의 시간이 어느 새 찾아와 있었다. 


화성방조제의 북쪽 끝인 궁평항에서 시작해 화성 곳곳으로 이어지는 4개의 올레길, 참 걷기 좋고 볼 것도 많은 이 길을 ‘화성 실크로드’라고 부른다. 예로부터 중국으로 통하는 해상무역의 길목이자 삼국시대부터 서로 차지하려고 치열하게 다투던 교통요지였던 이곳의 옛 도보길을 재현한 것이다. 이번에 걸어볼 길은 그 중 1코스인 당항성길과 2코스인 황금해안길이다. 하나는 굽이굽이 산등성이를 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바닷가를 따라 이어지는 길이니 걷는 내내 다채로운 모습을 만날 수 있으리라. 오랜 세월 동양과 서양이 문물을 교환하는 통로였던 실크로드, 그 길의 한 부분이었던 화성 실크로드를 찾아가 본다. 



2. 옛날옛적 신라와 당나라를 오가던, 당항성길 

서서히 여름의 기력을 회복하고 있는 태양이 떠오르면 금세 공기가 달아오른다. 산을 타야 하는 길이니 해가 중천에 뜨기 전 서둘러 출발했다. 화성 실크로드 1코스인 당항성길은 동쪽 끝 사강시장에서 서쪽 끝 제부교차로 쉼터까지, 그 길이만도 11Km에 이르는 긴 도보여행코스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걸으면 어른걸음으로 서너 시간은 족히 걸릴 거리. 적당히 산책 삼아 걸으려면 코스중간 즈음인 당성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다. 당성 쪽에 방문자센터와 주차장도 있으니 짧은 도보여행의 출발지로 삼기에는 제격이다.  


이 올래길 이름의 주인공이기도 한 당성은 화성에 남은 크고 작은 산성 중에서 그 중요성으로는 으뜸이다. 일제시대에 간척사업을 하기 전만 해도 밀물 때면 성벽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항구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하는데, 덕분에 ‘당항성’이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중국의 산둥 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인지라 그 옛날 신라인들이 당나라를 오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항구였던 셈이다.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가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원효스님 역시 이 길 즈음을 따라갔다고 하니, 산성 주위를 걷는 한걸음 한걸음이 괜스레 예사롭지 않다.

한강과 함께 손꼽힐 만큼 전략적인 요충지였기에 이 땅을 차지한 신라가 삼국통일의 기세를 잡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역사의 흔적은 800여 미터의 1차성벽과 1200여 미터의 2차성벽으로 남았다. 복원을 마친 구간도 있고 아직 공사가 한창인 부분도 있는데, 성벽 위로 만든 계단을 올라가면 금방 꼭대기에 다다를 수 있다. 살짝 가쁜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보니 땅과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전망 명당이 바로 이곳! 언덕을 넘어 다른 봉우리까지 길게 이어지는 성채는 마치 구불구불 하얀 뱀이 구릉을 타고 지나는 것 같다. 그 언덕 아래, 찰랑찰랑 물을 가득 채운 논 너머로는 서해 바다가 바로 코앞인 양 쑥 들어온다. 

슬슬 당성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면 언덕에서 보이던 서쪽 바다를 향해 마저 걸어갈 시간이다. 풀숲 사이로 이어진 길을 얼마 걷지 않아 신흥사의 뒤편에 다다랐다. 바다에서 건져 올린 석불과 옛 절터에서 찾은 석불을 모시는 사찰의 둥근 공터에는 커다란 부처상이 앉아 있다. 이 길은 봉화산 정상까지 이어지는데, 해발 163미터의 야트막한 산이라 아주 가벼운 트레킹 정도의 기분을 낼 수 있다. 중간중간 돌이나 나무로 만든 계단이 있고, 조금 올랐다 싶으면 금방 내리막으로 바뀌는 편안한 산책로다. 표지판이 잘 되어 있어 길을 잃을 염려도 없고,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의자와 운동시설 정자까지 있으니 두루두루 사랑 받는 동네 뒷산인 셈이다. 하내 테마파크 옆길로 계속 따라가 제부도의 입구인 제부교차로 쉼터까지 도착하면 당항성길도 끝. 오래 이어져 온 옛날 이야기도 만나고 근사한 전망도 볼 수 있어서 두근두근 설레던 화성 실크로드 1코스다.

며칠 전 내린 비 덕분에 잔뜩 물기를 머금은 풀잎이 싱그러운 산책로였다. 평일 오전 시간, 이 길을 걷는 이가 얼마나 있으랴 싶었는데 가는 내내 반대쪽에서 출발한 이들과 마주치는 다정한 길이었다. 편안한 복장으로 강아지와 산책을 나온 할아버지, 운동하듯이 힘차게 걷는 아주머니, 등산복에 등산 스틱까지 갖추고 일렬로 걷는 단체까지. 사람 만나는 것을 최대한 피해왔던 격리기간의 답답함을 서로가 잘 안다는 듯, 처음 본 사람에게도 ‘안녕하세요?’ 인사를 전하고픈 반가움은 이심전심이었다. 

숲길 옆의 나뭇가지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짙은 풀숲 사이로 어두운 색깔의 조그만 동물이 빼꼼 고개를 내민다. 귀를 쫑긋하게 세우고는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니는 청솔모다. 후다닥 소리를 낼 때마다 또 다른 나뭇가지 위로 올라가며 분주한 걸 보니, 여기저기에 숨겨 놓은 나무열매를 찾아 숲 탐사라도 하고 있나 보다. 점점 높이 올라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고개가 아프도록 쳐다 보았다. 사람이 아닌 동물도 무사히 살아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걸 보니 괜스레 반갑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길동무와 인사를 나누다 보니 그간 굳어 있던 몸에 한층 기운이 난다. 남은 길을 걷기 위해 발걸음을 옮길 시간이다. 

 

3. 넘실넘실 춤추는 바다를 따라, 황금해얀길  

짙푸른 풀숲에 둘러싸여 걸으며 내내 탁 트인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산과 바다를 한 걸음에 오갈 수 있는 올레길. 우리 땅의 한쪽 끝을 가득 채운 서해바다가 바로 코앞이라 누릴 수 있는 호사다. 화성 실크로드의 두 번째 코스인 황금해안길은 북쪽의 전곡항에서 남쪽의 궁평항까지 내내 바다를 따라서 이어진다. 그 길이만 해도 42킬로미터에 달하는 해안탐방로이다 보니 각자의 취향에 따라서 적당한 지점을 걷는 것이 좋다. 가족 단위 여행자에게는 바다의 풍경과 해양체험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백미항-궁평항 구간이 인기 있다. 드넓은 갯벌로 지는 경이로운 석양을 만날 수 있어서 황금노을길이라고도 불리는 산책로로, 쉬엄쉬엄 걸어서 한 시간 반이면 돌아볼 수 있는 편안한 코스다.  

백미리 마을로 들어서면 ‘백미리 어촌 체험마을’이라는 커다란 비석이 가장 먼저 방문객을 환영한다. 마을 앞에 부드럽게 펼쳐진 갯벌은 오랜 세월 백미리 주민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든든한 지원군이었는데, 이제는 수도권 사람들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생태체험공간으로 거듭났다. 이 모두가 백미리 앞바다의 깨끗하고 인심 좋은 갯벌 덕분이다. 너무 깊게 빠지지 않아서 크게 힘들이지 않고도 다닐 수 있는 갯벌에서 조금만 발품을 팔면 바구니 한 가득 조개를 캘 수가 있으니 도시사람에게 이 보다 신기한 체험은 없다. 이제 곧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제철을 맞은 낙지며 굴을 건져 올리며 까르르 웃는 아이들의 소리가 번져갈 테다. 밀물을 따라 들어온 물고기의 퇴로를 막아 잡는 그물인 ‘건강망’이나 커다란 뜰채로 물고기를 당겨 올리는 전통고기잡이 ‘사두질’도 체험할 수 있으니, 말보다는 몸으로 배우는 향토문화의 산 교육장인 셈이다. 

항구를 향해 슬슬 걸어가다 보면 이제 막 모내기를 마친 논이 나른하게 휴식 중이다. 논두렁 안을 가득 채운 물이 찰랑찰랑, 바람이라도 불면 물 위로 삐죽 고개를 내민 모 잎이 파르르 떨린다. 논 주변에는 뭐 먹을 거라도 없나 어슬렁거리는 새들이 여러 무리다. 등에 척하니 올린 날개는 뒷짐이라도 진 양반처럼 느긋하지만 먹이를 찾는 눈길은 이리저리 분주하다. 하얗고 긴 목을 뽐내는 백로도 있고, 쌍쌍이 짝을 이룬 채 논을 헤집고 있는 흰빰검둥오리도 보인다. 

사람들마냥 바지런하면서도 평화로운 풍경에 잠시 넋을 잃고 구경하다 보니, 주걱처럼 부리 끝이 넙적한 새 무리가 등장했다. 이런, 환경생물도감의 사진에서나 보던 저어새다! 전세계에 3~4천 마리 밖에 남지 않았다는데, 그 귀한 1급 멸종위기종이 이리도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다. 겨울이면 더 따뜻한 남쪽으로 갔다가 봄이면 돌아온다고 하니, 지난 한겨울 어디에선가 잘 보내고 새봄을 맞아서 다시 찾아온 저어새를 만난 것이다.  

반가우면서도 문득 걱정이 앞선다. 인천 강화도와 서해안 일대에 보금자리를 일구는 철새지만, 거대한 건설 프로젝트들이 서해안 지역에 연이어 추진되면서 점점 생활할 공간이 줄어든다는 소식을 들은 터였다. 대형공사에 밀리고 밀려서 어쩌면 수도권 일대에서는 여기가 마지막 터전일 텐데, 군 공항이 정말 이 지역에 들어온다면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할까? 한 무리의 저어새가 날개 짓을 하는 한없이 평화로운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울컥울컥 미안해졌다. 

백미리 항구 옆으로 화성 실크로드의 표지판이 보이면 쉬엄쉬엄 바닷길 산책이 시작이다. 바다 옆으로 길게 이어지는 철조망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느긋한 한 걸음 한 걸음, 곧 인공적인 소리들이 사라지고 파도소리와 바람소리와 풀잎소리만 귓가에 한 가득 이다. 숨을 깊게 내쉬었다가 한껏 들이쉬니 짭조름한 바다 냄새와 싱그러운 풀 냄새가 한데 섞여 들어 온다. 참 근사한 향기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바닷물이 스르륵 저 멀리로 사라지는 간조시간이 되었는지 파도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파도소리의 볼륨이 서서히 줄어들고 예상하지 못했던 바다에서 맞는 적막의 시간. 저 멀리 방파제를 걷는 부부의 두런두런 이야기소리가 바람을 타고 나에게까지 전해진다. 아기의 옹알이 소리처럼 다정한 소음이다. 걸음을 멈추면 잦아 들었다가 다시 걷기 시작하면 귓가를 간지럽히는 바닷바람은 마치 부드러운 천이 귓가에서 펄럭이는 듯 하다. 중국과의 교역에 쓰던 길이라 화성 실크로드라는 이름을 붙였다지만, 직접 걸어보니 자연의 소리가 비단처럼 감싸는 길이라 실크로드인 건 아닐까 생각도 들었다. 

해가 뉘엿뉘엿 져갈 무렵 황금해안길의 남쪽 끝인 궁평항에 도착했다. 햇살이 서서히 희미해져 가는 시간, 갈매기도 하루를 마무리하려는 듯 모래밭에 다닥다닥 내려앉는다. 하루 중에서도 제일 찬란한 석양의 시간을 넉넉하게 만끽하고 싶어서 궁평항에서 백미항으로 가는 황금노을길을 다시 걷는다. 되짚어 돌아가는 길 내내, 이름처럼 바다를 가득 채운 황금빛 노을이 친구가 되어 주었다.


백미항에 도착하니 방파제를 어슬렁거리는 고양이 한 마리가 잘 돌아왔다며 맞아준다. 시원하게 비가 쏟아진 후라 더욱 쾌청해진 저녁 공기, 바다에 떠 있는 섬들의 검은 실루엣도 한층 선명해졌다. 바다로 가라앉기 직전 한층 동그래진 태양은 오늘의 마지막 불빛을 태우는 것처럼 저 멀리 굴뚝에 걸려 있다. 그 태양마저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 삼십 분, 하루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다.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색깔을 다 보여주며 변해가는 하늘과 바다는 매일 봐도 질리지 않을 신비롭다. 골든 타임이 지나간 후 찾아 드는 적막과 고요 역시 또 하나의 색이니, 오늘 만날 수 있는 모든 세상의 빛은 다 본 셈이다. 


4. 지킬 것도 많고 아름다운 것도 많은 

오늘 세상의 온갖 빛깔과 자연의 모든 소리를 만끽하며 걸은 길들은 화성군공항 예정지인 화옹 지구의 북쪽 편이다. 매일 찬란한 노을을 선물하는 궁평항은 군공항 예정지에서 불과 차로 5분 거리. 간척지인 화옹 지구가 넓은 편이긴 하지만 교육훈련을 하는 군공항의 특성상 비행횟수가 많고 소음이 큰 선회비행이나 이착륙 훈련이 잦을 수 밖에 없다. 


당항성길과 황금해안길을 걷던 한나절 동안 몇 번이고 머리 위를 울려대는 제트엔진소리에 하늘을 쳐다 보았다. 그 때마다 F-5 전투기가 두어 대씩 편대를 이루며 서쪽 바다를 향해 날고 있었다. 수원군공항에서 출발한 비행기 소리도 이리 크게 느껴지는데, 훨씬 더 가까운 화옹지구에서 날아 오르는 소리는 어느 정도나 될까? 비행소음과 진동으로 묻어 버리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것이 많은 자연의 보고라 그저 속이 탄다. 참 오래된 경구이긴 한데, 백문이 불여일견. 귀한 자연과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화성실크로드를 한번 걸어본다면, 소중하게 지킬 것이 많다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재미있는 구경으로 나섰던 산책이 마냥 아쉽고 애타는 마음에 공감하는 걸음으로 변하는 길, 화성 실크로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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