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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어머니 동굴에서 벗어나기

모성성에서 여성성으로

                                         꿈 내용


침대가 두 개인 방이다. 남편이 침대로 나를 데리고 갔다. 남편의 팔의 감촉을 다정하게 느꼈다.  벽의 모서리에는 수세미가 달려 있다, 남편이 "언제까지 엄마랑 살려고 하느냐? 어머니 동굴에서 벗어나야지"라고 야단쳤다. 



나는 꿈주인(50대 후반 여성)에게 왜 이런 꿈을 꾸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어머니와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물었다. 


                                        본인 상황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부부싸움을 하는 것을 늘 지켜보며 지냈다. 아버지는 술 중독에 아내 폭력까지 일삼았다.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한 불평불만을 쏟아 내면 나는 그것을 받아주는 쓰레기 통이 되어야만 했다. 내가 보기에 어머니는 늘 불쌍한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한테 그렇게 두들겨 맞고도 늘 아버지 걱정이었다. 늦게 들어오면 늦게 들어오는 대로 걱정이고, 밖에서 사고나 치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였다. 아버지가 간암으로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신 후에도 어머니는 늘 아버지를 그리워하셨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그리워하실 때는 나쁜 기억을 다 지워버리고 좋은 기억들 그 장면만 억지로 남겨두었다가 스스로 위로하셨다. 그런 추억을 하시면 나는 또 나 대로 어머니를 위로해 줘야만 했다. 지금 어머니는 치매에 걸려 요양병원에 계신다.


남자의 문제와 여자의 문제는 다르다


남자의 문제

남자의 문제와 여자의 문제는 다르다.

남자의 문제는 그 안에 자라지 못한 <영원한 소년>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정치인을 보면 딱 답이 나온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있는 남자일수록 그 안에는 더 어린 <영원한 소년>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남자의 정서적 상태는 아무리 자랐어도 7살을 넘지 못한다.

어떤 남자는 3살, 어떤 남자는 4살, 어떤 남자는 5살. 어떤 남자는 6살, 어떤 남자는 1살.

그 남자가 하는 짓을 보면 내면 소년의 나이가 나온다.

입 하나 가지고 사람들을 좌지우지하고, 권력을 휘두르며 갑질하는 사람은 영원한 1살이다. 

요즘 국회에 이런 사람들이 많다.


길거리를 걷다 보면, 젊은 청년과 늙은 노인과 시비가 붙어 싸우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젊은이가 그 노인을 이기는 방법은 딱 한 가지이다. 


   "당신 말이지. 지금 꼰대짓 하는 것 알아? 당신 같은 늙은 것들은 정신 차려야 해! 어디 감히 젊은 사람들에게 말도 안 되는 것 가지고 훈계를 하고 있어!!"


하며 젊은이가 노인에게 호통을 친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여자는 일절 없다.

모두가 남자다.

이 남자의 정서적 나이는 3세이다.

어른 못 알아보고, 아버지 같은 어른에게 반말을 하는 것을 보면 3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자의 문제 

여자의 문제는 어머니와의 동체성이다.

대부분의 딸은 어머니와 정서적으로 한 몸이 되어 있다.

순간순간 느끼는 감정이나 이성적 판단 등 모두가 어머니 것인지 딸 자신의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액세서리 하나 고르면서도 내가 좋아하는 것의 기준이 대개 어머니가 좋아하는 것이다.

딸은 늘 어머니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아간다.

남자 친구를 사귀어도 어머니가 좋아할 사람인지 아닌지부터 살핀다.

남자와 대화를 하면서도 어머니의 가치관과 맞는지 아닌지를 살핀다.

그러다가 아니다 싶으면 헤어지자고 한다.

남자는 이해할 수가 없다.

서로 스타일이 맞고 대화도 잘 되고, 맞장구도 잘 칠 수 있고, 서로 좋아하면 다 된 것 같은데, 남자로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여자의 마음 깊은 곳에 작동하는 어머니의 취향이라는 변수이다.

아무리 내가 좋아해도 어머니가 싫어할 것 같으면 그때부터 갑자기 마음이 바뀐다. 

남자 입장에서는 분명히 저 여자가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다가갔는데, 여자는 어느 순간 남자를 밀어낸다.

그것은 내면의 어머니가 그 남자를 밀어내는 것이다. 

내면에 어머니로 가득차다 

여자는 결혼한 후에도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여자를 실망시키면 그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의 고향은 어머니이다.

반대로 여자가 남편을 사랑할 수 없다거나, 이혼하고 싶다고 할 때 남편은 '과연 이 여자가 나 없이 혼자 잘 살아갈 수 있을까?' 걱정을 한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

여자의 이혼에 대한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가 하면, 내면에 있는 어머니로부터 나온다.

바꿔 말하면, 결혼한 여자가 남편을 사랑할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가 여자 안에 어머니가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위의 꿈 주인에게 나는 내면에 가득 차 있는 어머니를 내 보낼 것에 대해 고민해 보라고 했다.

꿈 주인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녀는 어머니는 지금 치매에 걸려 요양병원에 계시는데 그런 어머니를 지금 내 안에서 내 보낸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투사적 동일시


꿈주인공의 내면을 장악하고 있는 어머니는 구체적인 어머니 인격체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어머니의 정서적 쓰레기통이 되어 어머니와 동일시되어왔다.

그녀는 어머니를 상처받은 보호 해야 했고 약해진 어머니를 세워드려야 했다.

문제는 어머니를 보호하고 세워드리는 과정에서 그녀 자체도 어머니의 상처를 공유해야 했고 어머니의 정서적 상태처럼 연약해져야 했다.

지금은 어머니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어머니와 같은 상태에 있는 사람만 보면 어머니가 받은 상처를 떠올려야 했고, 그 사람을 보호해 주고 세워줘야 했다.

바로 그런 사람만 보면 어머니와 경험했던 정서적 상태로 돌아가면서 투사적 동일시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모성성을 사용하게 되고 집단적 사고를 하게 된다.


모성성과 집단적 사고


꿈 주인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에게 베풀고 남을 사랑하는 일에 매우 익숙하다.

바로 이런 부분에서 그녀는 신앙적 가치관과 지나치게 사용하는 모성성과 혼합이 일어나면서 자신을 지나치게 희생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녀는 자신이 처한 공동체에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다 챙긴다. 

어쩌다 동네 노숙자를 보면 자기 주머니에 있는 돈을 선 듯 내어 주고,

남편과 이혼한 후 아들과 단 둘이 사는 동네 사람에게 반찬 해다 주고, 

누군가 어려운 처지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먹고 싶은 것 사 입고 싶은 것 참고 현금을 모아 건네준다.

어머니가 입원한 요양병원이 차로 3시간 거리에 있는데, 각기 돌아가면서 한 번씩 가기로 되어 있지만, 언니가 같이 가자 하면 같이 가고, 오빠가 같이 가자 하면 같이 가고, 여동생이 같이 가자 하면 같이 간다.


얼마나 고결한 성품을 가지고 있는가?

기독교적 사랑을 얼마나 잘 실천하고 있는가?


그러기를 몇 년을 해 오다가 최근에 무리가 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지가 몇 달 전이다.

첫째, 위의 사례의 공통점은 그녀의 도움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절대 고마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절실했고, 고마워했지만, 날이 갈수록, 그녀가 일관성 있게 돕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그들의            태도는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게 되었다는 점이다.

       최근에는 그녀가 베푸는 텀이 길어지면 그들은 화를 낸다고 한다.


둘째, 불면증이 왔다는 점이다.

       그녀는 낮에는 누구를 도울까?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누굴까를 찾는 중에 늘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자신이 원하는 반응이 안 나오면 서운해서 잠을 못 잔다. 

        낮에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에너지를 다 쏟다가, 밤이 되면 그때야 더 이상 남 시선 의식할 필요가            없어지면서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게 되니까, 그때부터 의식이 맑아져서 눈이 말똥말똥해지면서 잠을            못 자게 되는 것이다.


여성의 과제, 모성성에서 여성성으로

       

여성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과제는 바로 모성성에서 벗어나 여성성을 찾는 것이다. 

많은 여성들이 모성성이 자신의 고유한 여성성이라고 생각한다.

모성성과 여성성 중 핵심을 드러내는 차이는, 모성성은 집단적인 것이고 여성성은 매우 개별적인 감정이라는 점이다.

여성의 불행은 여성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모성성을 사용하며 인생을 마감하는 데에 있다.

여성성을 찾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모성성으로 살아온 삶을 저녁상 뒤집듯이 뒤엎어야 한다.

아무도 그런 시도를 하지 않는다.

어떤 인문학에서도, 철학에서도, 심리학에서도, 상담학에서도, 심지어 부부상담에서도 이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지식의 전달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인생은 원래 공허한 것으로 결론 맺는다.


인생은 결코 공허하거나 허무한 것이 아니다.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여성성으로 살아 본 적이 없는 인생이 허무한 것이다.


남자가 철이 든다는 것도, 여성성을 찾아가는 아내를 보면서 남성 안에 있는 여성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여성성은 지금까지 인류가 만들어낸 지식보다 훨씬 우주적 진리에 가깝다.

그것을 살짝 엿본 철학자가 있다.

바로 니체이다.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서] 서문에,


   . "진리가 여자라면..."


라고 적고 있다.

그렇지만 니체 자신도 여성성을 제대로 만나보지 못했다.  


어머니의 동굴에서 벗어나기

꿈주인이 내면의 어머니를 내 보내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내가 이미 제시했다.

어머니에 대한 효도를 멈추는 것도 아니고, 

어머니와 관계를 끊는 것도 아니다.

어머니의 요양병원 찾아가는 회수를 줄이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바로 집단적 사고를 멈추며, 모성성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부부관계에 집중해야 한다.

꿈주인은 남편과 감정 교류가 되지 않는 우울함을 그렇게 남을 돕는 모성성을 사용하는 것으로 대체해 왔다.

모성성을 거둬 들이고 여성성으로 거듭나면, 남편이 그녀를 보는 관점이 달라질 것이다.

그녀는 집단적 사고에서 벗어나 개별적 사고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그냥 생각을 바꾼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긴 분석이 필요하다.

꿈주인이 이 꿈을 꾼 것은, 분석을 통해 인생을 바로 그런 방향성으로 잡아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밖으로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모성성을 베푸는 것보다 그녀에게 시급한 것은 어머니 동굴에서 벗어나 모성성을 여성성으로 전환해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꿈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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