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을 파는 사람들(3) : 페르소나 굴에 갇힌 사람들

남자의 사회적 성공과 내면의 어린아이


페르소나 세우기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가면을 쓴다. 융(Carl Gustav Jung)은 이 사회적 가면을 ‘페르소나’라 불렀다. 라틴어로 가면을 뜻하는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마스크에서 유래했다. 그 마스크에는 ‘소리가 통과하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목소리는 내 것이지만, 얼굴은 타인의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우리는 이 페르소나를 만드는 법을 배운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고, 선생님의 칭찬을 받고,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우리는 우리 안의 어떤 감정은 숨기고, 어떤 자질은 드러내는 법을 학습한다. 그렇게 사회적 자아가 형성된다. 그러나 이 페르소나는 애초에 ‘살기 위해 필요한 도구’였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소속되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세운 전략이었다.

문제는 이 페르소나가 도구가 아닌 ‘정체성’이 되는 순간이다. 내가 쓰는 가면이 나 자신과 구별되지 않을 때, 나는 진짜 나를 잃는다. 내 감정이 진짜인지, 사회적 코드에 맞춰 만들어낸 반응인지조차 헷갈리게 된다. 많은 남성이 청년기에서 중년에 이르기까지 평생 이 페르소나 구축에 온 힘을 쏟는다. 좋은 학생, 좋은 아들, 좋은 청년이라는 이름 아래 학교에서 높은 성적을 받기 위해 애쓰고, 더 나아가 명문대 입학, 석사와 박사 학위, 사회적으로 보장된 직업, 빠른 승진과 높은 연봉 같은 외적 지표에 전 존재를 몰두한다.

처음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능력과 자존감을 세우기 위한 발판처럼 느껴지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자신이 만든 이 페르소나가 자신의 전부라고 믿기 시작한다. 더 이상 가면과 얼굴은 구분되지 않는다. 그의 언어, 습관, 심지어 인간관계마저도 ‘성공한 남자’,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내면의 감정이나 욕구는 점점 뒷방으로 밀려나고, 사회적 지위와 성과가 인간 존재의 핵심 가치처럼 자리 잡는다.

‘직장이 먼저냐, 가정이 먼저냐’는 질문에 그는 주저 없이 말한다. “나는 회사와 결혼했어.” 저녁 11시가 다 되어서야 퇴근하고, 주말에도 메일과 업무 보고서에 묶여 있다. 집에서 아내와 아이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려 있다. 그는 사랑받는 아버지가 되기보다는 인정받는 상사가 되기를 택한다. 아이가 성장하며 아버지를 기억할 시간, 아내가 외로움을 호소하던 시간, 가족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던 수많은 저녁은 ‘책임’이라는 명목 아래 희생된다. 그 책임이란 결국 ‘가면을 유지하기 위한 에너지’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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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에 있는 <영원한 소년>

사회적 체면을 지키고,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지 않기 위해, 탁월함과 완벽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그는 매일 경쟁한다. 동기보다 한 발 먼저 진급하고, 타인의 인정을 받으며, 늘 유능해 보이기 위해 자신을 채근한다. 그러나 그토록 강하고 유능해 보이는 남자의 내면엔 외롭고 불안한 어린아이, <영원한 소년>이 있다. 인정받지 못하면 버려질까 두렵고, 탁월함을 내려놓으면 무가치해질까 두려운 존재. 그 아이는 사실 오래전부터, 아주 어릴 적부터 외로웠고, 자기답게 살아갈 자유를 누려보지 못했다.

그 아이는 한 번도 “괜찮아, 너는 있는 그대로 소중해”라는 말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성공과 인정이 사랑의 대체품이 되었다. 높은 연봉은 존재의 가치를 증명해 주는 숫자이고, 승진은 존재 자체의 의미를 대신해 주는 배지다. 그는 끊임없이 바깥을 향해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만, 정작 그의 내면은 점점 메말라 간다. 감정은 억제되고, 관계는 기능화된다. 그는 더 이상 사랑받는 인간이 아니라 ‘역할 수행자’로만 존재한다.

결국 그의 삶은 점점 좁아진다. 페르소나는 그를 보호하는 갑옷이 아니라, 숨 막히게 조여 오는 철갑이 된다. 스스로 쓴 가면에 갇혀버린 남자. 언젠가 그는 묻게 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내 삶은 정말 내 것이었는가?”

그때 비로소, 그는 내면의 어린아이와 마주해야 한다. 인정받고 싶었던, 사랑받고 싶었던, 자유롭고 싶었던 그 진짜 나와. 진정한 변화는 그 아이를 만나주는 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진짜 관계, 진짜 자아, 진짜 삶은 그 만남 이후에야 비로소 피어나기 시작한다


윌리 로먼, 사회적 가면의 비극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은 이 페르소나의 함정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한 남자의 몰락이 아니다. 그것은 내면의 고통을 외면한 채, 오직 사회적 성공의 가면만을 붙들고 살아온 한 남자의 자아 해체의 기록이다.

주인공 윌리 로먼은 평생 세일즈맨으로 살아왔다. 그는 사람들에게 인기 있고, 잘 나가는 외향적인 사람이 ‘성공한 남자’라고 믿는다. 인간관계가 곧 돈이고, 인상이 곧 상품이 되는 세계에서 그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포장한다.


“나는 잘 나가던 사람이야. 사람들은 나를 좋아했어.”


그의 반복적인 이 말은 자기 암시이자 자기기만이다. 그는 진짜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한다. 가면은 점점 두꺼워지고, 내면의 아이는 점점 작아진다. 아내 린다는 그의 거짓된 세계를 어렴풋이 알지만, 그를 떠나지 못한다. 사랑과 연민으로 붙잡고 있을 뿐이다.

그는 외친다.


“나는 괜찮은 아버지야, 괜찮은 남편이야.”


하지만 그는 한 번도 진짜 자신의 고통이나 실패를 인정하지 못했다. 그가 강조한 건 늘 ‘괜찮은 모습’이었다. 페르소나의 모습.

하지만 그 안에는 외로움, 불안, 실패감, 열등감이 뒤엉킨 진짜 자아가 숨어 있었다. 그의 마지막은 사회적 파산이 아니다. 그의 죽음은 자아의 붕괴이고, 가면이 진짜 자아를 삼켜버린 한 인간의 완전한 소멸이다.


강한 남자, 그러나 내면은 <영원한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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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작품을 볼 때마다, 실제로 수많은 남자들(여기에는 나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이 윌리 로먼의 그림자 아래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특히 사회적 성공을 거머쥔 중년 남성들 중에는 내면의 감정에 서툴고, 성취와 역할로 자신을 정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유능하고 강하다. 책임감 있고 열정적이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아이와 감정적인 눈을 맞추는 법을 잊어버린 지 오래다. 아내와는 일상의 정보만 나눈다. 마음속 외로움과 상처는 절대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 감정을 들여다보는 순간, 지금까지 지탱해 온 존재감이 흔들릴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더 단단한 페르소나를 만들어낸다. 더 멀쩡한 척, 더 성공한 척, 더 흔들리지 않는 척. 그렇게 위로 올라간다. 하지만 정작 그 마음 안에는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소년 하나가 울고 있다.

분석심리학에서는 이를 ‘puer aeternus(푸에르 아에테르누스)’, 즉 영원한 소년이라 부른다. 사회적으로는 어른이지만, 심리적으로는 아직 감정적으로 자립하지 못한 존재다.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고, 비판에 취약하며, 관계 속에서 불안을 느낀다. 그들은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고, 사장이 되어도 여전히 그 마음 깊은 곳에는 소년 하나가 숨어 있다. 단지 너무 깊이 숨겨져 있어서, 자신조차도 그 존재를 잊고 산다.


“그냥… 다 놓고 싶어요.”


나는 한 중년 남성 내담자를 기억한다. 그는 큰 회사를 운영하는 CEO였고, 누구보다 성실하고 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상담 초반, 그는 자신의 감정을 전혀 말하지 못했다.


“언제 슬퍼보셨나요?”

“언제 외롭다고 느껴보셨나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자신의 감정을 느끼는 법조차 잊은 듯 보였다.


내가 이렇게 물었다.

“그럼, 회사를 그만두고 뭐 하고 싶으세요?”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사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다 놓고 싶어요.”


그 순간, 나는 그의 페르소나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가 지금껏 살아온 삶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가면 뒤에 얼마나 지친 아이가 숨어 있었는지를 느꼈다.


<참 자기>로 돌아가는 용기


페르소나는 필요하다. 그것은 사회에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문이다. 하지만 진짜 삶은 그 문 안으로 들어갈 때 비로소 시작된다. 페르소나는 문이지, 집이 아니다. 우리는 그 문을 통해 타인과 만나고, 사회와 연결되지만, 결국 돌아와야 할 ‘내 자아의 집’이 있어야 한다.

특히 남성에게는 이 작업이 절실하다. 많은 남성은 어릴 때부터 ‘느끼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남자는 울면 안 되고, 약하면 안 되고, 실수하면 안 된다는 메시지 속에서 자랐다. 감정은 억누르고, 이성과 성취로 존재를 증명한다.

그러나 인간은 감정의 존재다. 내면의 상처를 외면한 삶은 언젠가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 그것은 병이 되거나, 관계의 파탄이 되거나, 내면의 공허함으로 돌아온다.

나는 오늘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페르소나를 쓰고 있는가, 아니면 페르소나가 나를 쓰고 있는가?”


사회가 요구하는 얼굴로 살아가는 것과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 것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그 차이를 직시하고, 가면을 벗을 용기를 낼 때, 비로소 우리는 ‘어른’이 되어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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