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릿함에서 뿌듯함으로
프로이트에 의하면, 아기는 젖을 먹을 때마다 마약을 먹듯이 짜릿함을 느낀다. 엄마의 손이 아기에게 닿을 때마다 아기는 짜릿함을 느낀다. 목욕통 속에 담긴 아기에게 손으로 터치가 이루어질 때마다 아기는 짜릿함을 느낀다. 안아 줄 때마다, 흔들어 줄 때마다, 아기는 엄마의 손길을 통해 짜릿함을 느낀다.
또한 아기는 존재상승욕구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성장을 위해 대근육의 발달, 소근육의 발달과 같은 사소한 성장 가운데서도 짜릿함을 느낀다.
몸을 뒤집고, 엎고, 앉고, 기어 다니고, 어느 순간 스스로 벌떡 일어서는 순간, 아기는 작은 발달을 성취로 여기게 되면서 짜릿함을 느낀다.
아기는 수많은 짜릿함의 경험을 하면서 삶의 생생함으로 기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엄마의 공감을 필요로 한다. 아기가 새로운 동작을 할 때마다 엄마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기뻐해 줘야 하고, 즐거워하며 박수를 쳐 줘야 한다. 아기가 자신의 발달 동작으로 짜릿함을 느낄 때 엄마로부터 공감과 칭찬, 찬사를 받음으로써 그 짜릿함은 뿌듯함으로 바뀌면서 생생함을 유지해 나가게 된다.
만일 짜릿함은 있지만, 뿌듯함이 없을 때 사람은 반복해서 갈망하게 된다. 아기의 발달에 대해 엄마가 공감해 주지 못함으로 인해 짜릿함은 뿌듯함으로 완결 짓지 못해 생생함을 잃어버린다. 사람은 유아기에 잃어버렸다고 해서 그것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잃어버린 것은 어떻게든 찾아내고자 한다. 그렇지만 그 짜릿함이 뿌듯함으로 완결되지 못하면, 계속 반복을 하게 되는 데 그것이 바로 중독의 속성이 된다.
사람은 일평생 생생함을 추구하기 때문에, 잃어버린 생생함을 어떻게든 회복하고자 하기 때문에 중독의 형태를 취해서라도 생생해 보고 싶다. 그렇지만 중독에서 경험하는 생생함은 그 순간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유아성욕이란 이러한 생생함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무의식으로 억압될 수는 있으나 사라질 수 없는 것이다. 유아성욕을 자극시켜 주고, 잠시나마 무의식에 있던 것을 의식화시켜 주기 때문에 그 행동을 반복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중독이다.
술 중독, 성 중독, 자위 중독, 도박 중독, 마약 중독 등 중독의 본질 밑바닥에는 유아성욕을 채우고자 하는 욕망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이들 현상에는 삶의 생생함을 회복하려는 필사적인 몸짓이 숨어 있다.
하인즈 코헛은 인간이 생생한 자기로 태어난다고 말한다.
아기는 스스로 안에 넘치는 에너지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생명력을 지닌 존재로 세상에 태어난다.
이 생명력은 건강한 공격성, 자기 주도성, 욕망으로 표현된다.
코헛이 보기에도, 젖을 빨기 위해 입을 벌리고, 손을 뻗고, 울고, 몸을 뒤집으며 욕구를 표현하는 아기는 스스로 생을 밀고 나가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 힘은 ‘살고자 하는 열망’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생생함이 가장 잘 표현되는 순간은 엄마의 따뜻한 시선과 품 안에서다.
엄마는 아기의 눈빛을 마주하고, 작은 시도 하나하나에 감탄하고, 기뻐하고, 안아준다.
이 안아줌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존재의 확인이며, 자기 감각에 대한 공명이다.
이 과정을 통해 아기는 ‘내가 이렇게 행동해도 괜찮구나’라는 뿌듯함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짜릿함만 있고, 공감이 없다면 문제가 생긴다
아기에게 젖을 먹는 행위는 단순히 배고픔을 해결하는 행위가 아니다.
젖을 빠는 동안 아기는 생리적 자극과 함께 강렬한 짜릿함을 느낀다.
그 짜릿함은 “나는 살아 있다”는 생생한 감각과 연결된다.
이 짜릿함이 생생한 자기감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그 순간 엄마로부터 받는 공감과 응답이 필요하다.
아기가 새로운 동작을 시도하고, 그에 대해 엄마가 기뻐하며 반응할 때,
아기는 짜릿함을 넘어 존재의 기쁨과 발달의 뿌듯함을 경험하게 된다.
이 뿌듯함은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하지만 엄마가 반응하지 않거나 무시하고 냉담하게 대할 경우,
아기는 자극만 남긴 채 그 감각을 자기 안에 억눌러야 한다.
이때 짜릿함은 고립된 감각으로 남고, 중독의 씨앗이 된다.
도박, 성, 술, 약물 등의 중독은 공통적으로 짜릿함을 반복해서 추구한다.
하지만 이 짜릿함에는 공감이 결여되어 있으며, 뿌듯함이 없다.
정신분석가 위니캇은 아이의 공격성이 자연스럽고 건강한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 공격성이 부모에 의해 부정되거나 억압될 경우,
그 공격성은 꺾이게 되며, 그 자리에 무기력이나 왜곡된 행동이 남는다.
중독은 꺾인 공격성, 억눌린 생생함이 다른 형태로 되살아나는 현상이다.
엄마의 품에서 따뜻한 응시를 통해 “너는 괜찮아, 그대로 좋아”라는 메시지를 들어야 했던 순간이 생략된 채,
짜릿한 자극만을 반복해서 갈구하게 된 결과다.
중독을 겪는 사람들과 상담하면서, 그들이 과거 어느 시점에서 삶의 감각을 잃고 짜릿함만을 좇기 시작한 계기를 발견할 수 있다.
내담자로 하여금 그 시점을 함께 되짚어 보게 하면서, “그때 그 감각을 느낄 때 곁에 누가 있었나요?”라는 질문을 해 본다.
대부분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라고 대답한다.
이 대답에서 중독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다.
중독은 고립된 자기감의 결과이며, 외로움의 증거다.
생생함은 관계를 통해 태어나고, 관계를 통해서만 회복될 수 있다.
우리는 삶을 다시 살아내고 싶다는 감각, 즉 생생함을 회복해야 한다.
짜릿함이 아니라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좋다”는 뿌듯함을 느끼는 순간이 필요하다.
이 뿌듯함이 회복될 때, 중독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다.
중독은 죄가 아니라 꺾인 생명력의 신호다.
그리고 생생함은 관계 속에서 반드시 회복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