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황진이 : 사랑받기 거부, 남자에게 군림하기

분석의 범주에서 벗어난 여성을 분석하다(2)

(앞의 글 참조)

가부장적 권위주의 틀에서 벗어난 여성들


그녀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으며 세 명의 여성이 떠올랐다. 전혜린, 프랑스의 여류 철학자 시몬 베유, 그리고 황진이였다. 이들에게는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모두 사회가 기대해 온 전형적인 여성성의 범주를 벗어나 존재했다는 점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향연』에서 제시되는 에로스의 구조는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의 관계로 정리되며, 이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구도로 귀결된다. 이후 2300여 년이 흐른 뒤, 프로이트 역시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능동성과 수동성이라는 상호관계의 범주로 설명했다. 이 구도는 오랫동안 사유의 기본 틀로 기능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범주화는 어디까지나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사회 질서 안에서 성립된 것이라는 분명한 한계를 지닌다. 흥미로운 점은, 그러한 사회 구조 속에서도 때때로 이 틀에 포섭되지 않는 여성들이 출현한다는 사실이다. 전혜린과 시몬 베유,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이와 유사한 결의 또 다른 여성들 역시 그러한 예에 속한다.


이들에게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삶이 길지 않았다는 점, 다시 말해 요절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연일까. 어쩌면 이들이 지닌 독특한 여성성, 즉 기존의 질서로는 감당할 수 없는 존재 방식이 가부장적 권위주의 사회 안에서 끝내 질식당한 결과는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그들의 삶은 단순한 개인의 비극이라기보다, 한 사회가 받아들일 수 없었던 여성성의 한 형식이 남긴 흔적으로 보인다.


매혹적인 불협화음의 등장


인간의 삶은 흔히 관계의 그물망이라 불린다. 우리는 그 안에서 사랑받기를 갈구하고, 인정받기를 원하며, 때로는 타인의 시선이라는 감옥에 스스로를 가둔다. 특히 ‘여성성’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는 수많은 미덕—친절, 배려, 수동성, 그리고 자신을 사랑해 주는 남자에게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헌신—은 오랫동안 한국 사회의 무의식을 지배해 온 문법이었다. 그러나 여기, 그 모든 문법을 비웃듯 파괴하며 나타난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지성적 열정으로 자신을 불태웠던 전혜린도, 고통받는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거룩한 굶주림을 선택했던 시몬 베이유도 아니다. 그녀들의 삶이 하늘을 향한 숭고한 수직적 비상이었다면, 이 여자의 삶은 철저히 세속의 대지 위에서 남성들의 욕망을 재료 삼아 쌓아 올린 견고한 성채다.

그녀는 여느 여성과 달리 사랑받기를 거부한다. 대신, 그녀는 남자에게 군림하기를 선택했다. 마치 16세기 송도의 거리를 누비며 문인 사대부들의 혼을 빼놓았던 황진이가 21세기의 세련된 페르소나를 입고 환생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녀를 관찰하는 일은 매혹적이면서도 서늘하다. 여러 남자를 동시에 거느리면서도 인격의 파탄을 겪지 않고, 오히려 그 분열된 역할 속에서 더욱 선명한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그녀의 능력은 정신분석학적으로나 실존적으로나 매우 기묘한 연구 대상이다. 이제 우리는 그녀가 가진 ‘거리감’의 정체를 추적하며, 주체적 욕망이 어떻게 관계의 권력을 재편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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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의 후예, 거리 조절의 미학


전형적인 여성의 서사는 ‘누구에게 선택받느냐’에 집중된다. 하지만 이 여성의 서사는 ‘누구를 허용하느냐’에서 시작된다. 그녀에게 남자는 정서적 안식처가 아니라 자신의 유능함을 확인시켜 주는 거울이자, 자신의 제국을 유지하는 부속품이다.


첫째, 인격의 다중성과 자아의 통일성이다.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이 여러 대상에게 서로 다른 자아를 보여주는 것은 극심한 에너지 소모와 자아 분열을 초래한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 앞에서는 안온한 가정의 수호자로, 애인 앞에서는 매혹적인 유혹자로, 자신을 추종하는 남자 앞에서는 도도한 여왕으로 완벽하게 변신한다. 이 다중 역할극 속에서 그녀가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녀가 그 어떤 역할에도 ‘진심’을 다해 함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모든 관계는 일종의 연극이며, 그녀 자신은 무대 위 배우인 동시에 객석에서 그 연기를 지켜보는 연출가다. 이러한 ‘자기 대상화의 역전’은 그녀를 상처받지 않는 무적으로 만든다.


둘째, 리비도의 경제학과 감질나는 거리감이다. 보통의 연애가 서로의 리비도를 합쳐 하나의 용광로를 만드는 과정이라면, 그녀의 연애는 상대의 리비도를 자신의 발치에 묶어두는 결박의 과정이다. 그녀를 10년이나 쫓아다니는 남자가 있다는 사실은 그녀가 ‘거리 조절’의 천재임을 입증한다. 그녀는 결코 상대가 절실하게 원하는 ‘그 무엇’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완전히 희망을 꺾지도 않는다. 딱 닿을 듯 말 듯 한 지점에서 멈추는 그녀의 멈춤 동작은 남자로 하여금 영원한 결핍과 갈증 상태에 머물게 한다. 남자는 그녀를 소유하기 위해 더 많은 자원을 투여하고 더 낮은 자세로 임하게 되며, 이 과정에서 관계의 주도권은 완전히 그녀에게 넘어간다. 이 '남자친구'는 그녀를 얻기 위해 결혼도 하지 않고 오로지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자신의 수입의 절반이상을 쏟아붓는다.


‘언감생심’의 경계선


남자친구에 대해 그녀가 내뱉는 말 중 가장 상징적인 단어는 ‘언감생심’이다. "어찌 감히 그런 마음을 먹느냐"는 이 고어(古語)는 그녀가 세상을 대하는 필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인간의 ‘수준’을 나누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녀가 사람을 평가하는 외적인 기준 중 하나가 그가 신고 있는 '신발'이다. 특히 그녀가 집착하는 ‘깨끗한 신발’은 단순한 청결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얼마나 철저히 통제하고 관리하느냐에 대한 척도다.

그녀에게 신발이 지저분한 사람이란, 자기 삶의 경계를 관리하지 못해 세상의 흙탕물을 묻히고 다니는 패배자다. 그녀는 그런 이들에게 자신의 에너지를 나눠주는 것을 혐오한다. "수준 안 맞으면 받아주지도 마, 잘라버려"라는 그녀의 충고는 냉혹하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존엄을 지키기 위한 극단적 방어기제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그녀의 ‘주인 도덕’이 빛을 발한다. 니체가 말한 주인 도덕이란 타인의 시선이나 가치관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자의 도덕이다. 그녀는 사회가 요구하는 ‘착한 여자’의 프레임을 과감히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자신이 세운 ‘수준’이라는 기준에 부합하는 이들만을 자신의 세계에 초대한다. 이러한 태도는 타인의 비난조차 자신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장식품으로 치부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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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삶의 제왕으로 산다는 것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결코 그녀의 삶의 방식을 찬양하기 위함이 아니다. 누구나 이 여성을 도덕적으로 비난하기는 쉽다. 가족을 기만하고, 남자의 순정을 이용하며, 오만하게 사람을 급으로 나눈다는 점에서 그녀는 전통적인 윤리관의 파괴자다. 그러나 그녀가 보여주는 ‘자기 동일성’과 ‘주체적 욕망’은 관계 속에서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서늘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당신의 경계를 허물고 있지는 않은가?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당신 내면의 뱀을 억지로 키우고 있지는 않은가?"


그녀는 사랑받는 객체가 되느니 미움받는 주체가 되기를 선택했다. 그녀의 거리감은 단순히 사람을 멀리하는 기술이 아니라, 누구도 자신을 함부로 훼손하지 못하게 만드는 자존의 요새다. 물론 그녀의 방식이 보편적인 정답이 될 수는 없다. 그녀가 가진 여러 역할의 완벽한 수행은 지독한 긴장과 고독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지성적이지 않기에 더 생명력 있게 세속을 장악한 그녀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가장 지적인 분석의 대상이 된다.


- to be continu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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