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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령 Nov 19. 2019

불타는 집에서 들고 나온 것은

목숨과 맞바꾼 '가족의 추억'

2013년 가을, 무심코 돌린 텔레비전에선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이 불타고 있었다. 불길은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빠르게 번져다. 카메라는 인근 민가에서 대피 중인 화재현장 속절없이 타버린 자신의 집을 망연자실 바라보는 주민들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앞에서 리포터 잰 걸음으로 주민들에게 다가가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다급한지를 인터뷰하려 애다. 그런데 한 주민의 인터뷰 내용이 매우 인상적다.



불길이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번져 저는
가족과 함께 애견, 그리고 중요한 몇 장의 사진만 들고
서둘러 집을 빠져나왔습니다.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사진이라니? 절체절명의 그 짧은 순간, 그는 왜 값비싼 보석이나 금고가 아닌 사진을 선택한 것일까? 문득 그 황망한 손에 들려 있었을 사진들이 몹시 궁금해졌다. 눈을 감고 상상해본다. 거실 서랍장 위에 놓여 있던 조상의 초상사진이었을까? 아니면 그와 가족들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찍은 사진이었을까? 어쩌면 아이가 첫걸음마를 떼던 순간이나 결혼 전 아내가 보여준 아름다운 미소가 담긴 사진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죽은 부모의 건강했던 생전의 모습, 멀리 시집간 딸의 사진이었을지도.


위급 상황에서 구해낼 만한 사진 목록을 생각하자면 끝이 없지만, 그 모든 사진은 바로 '가족사진'이었을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그 주민은 불타는 집에서 마치 가족을 데리고 나오듯 가족사진을 들고 나왔다. 대체 얼마나 소중한 기억이길래 종이와 다름없는 사진이 살아 있는 가족의 가치와 맞먹는단 말인가.





불속에서 구조된 가족사진
일상적이고 평범하고 밋밋한 그 사진
왜 그토록 찍고 아끼는 걸까



c. Google images


카메라의 형태에 따라 가족사진의 역사도 많은 부침이 있었지만, 달라지지 않았던 단 한 가지 사실이 있다. 바로 가족사진을 찍는 주체는 대부분 한 가정의 부모라는 사실이다. 가끔 전문 사진가의 손을 빌리기는 하지만 일상의 대부분에서 부모가 카메라를 들기 마련이다. 반면 사진을 찍히는 대상은 주로 자녀들이다. 때로 자녀들이 성장해 늙은 부모를 찍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다. 보통 생애 전반기는 사진에 찍히는 대상으로 살다가 후반기부터는 사진을 찍는 주체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가족사진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생애주기 곳곳에서 일어나는  이벤트가 있을 때 만들어진다. 그리고 처음과 끝이 있는 한 주기의 사이클을 가진다. 아이가 태어난 기쁨을 증명하는 '탄생 사진', 그 아이가 돌이 된 것을 기념하는 '돌사진', 아이가 성장하는 단계마다 찍는 '성장 사진', 아이가 학교를 잘 마친 것을 기념하는 '졸업사진', 그 아이가 성인이 되어 새로운 가족을 구성하는 '결혼사진' 등이 그것이다. 아마도 아이는 출가를 해서도 자신의 자녀를 대상으로 또 다른 가족앨범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 가족사진은 가족의 가장 행복하고 건강 완숙했던 시절을 기념하는 트로피와 같다. 하지만 대개 가족사진은 한 사람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치르는 관혼상제와 인생의 중요한 이벤트를 기념하는 기록의 수단으로 쓰인다. 하지만 가족사진에는 어떤 특수한 목적도 없다. 단지 하루하루 소소히 스쳐 지나가는 일상의 흔적들이 지속적으로 기록될 뿐이다. 스펙터클한 주제도, 사회적인 이슈도 없이 인류가 보편적으로 겪는 '특별하지 않은 일'들이 평범하게 기록된다. 그런데 대체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이런 밋밋한 사진을 그토록 열심히 찍고 목숨만큼 소중히 생각하는 것일까?



죽음과 맞바꾼 가족의 추억
가족사진의 상실은 나와 가족의 부정
기억은 남은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어



2011년 동일본 대지진에 의한 쓰나미로 일본의 몇몇 마을이 완전히 파괴되었을 때에도 피해자들은 그 참혹한 재앙의 현장에서 가족사진을 찾아 헤맸다. 그들의 마음은 잃어버린 가족을 찾아 헤매는 심정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진흙더미 속에서 가까스로 가족사진의 흔적을 찾아낸 뒤에는 모두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아마도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슬픔과 좌절보다는 가족의 존재 증명을 다시 되찾았다는 기쁨과 안도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한 지 5일째 되던 날 쓰나미로 무너진 한 건물에서 발견된 79세 하마다 씨에 대한 뉴스는 가족사진의 의미를 새삼 깨닫게 만든다. 그의 시신을 수습하던 구조대는 충격 속에 숙연해질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하마다 씨의 시신은 가족사진 앨범을 가슴에 꼭 껴안은 채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쓰나미가 닥치던 때 그는 부인과 함께 2층으로 대피했지만 갑자기 "다른 건 다 버려도 가족 앨범만은 가지고 와야 한다"며 1층으로 발길을 돌리면서 불귀의 객이 되었다.


하마다 씨가 죽음의 순간에도 가슴에 안고 있던 기족사진 앨범. 생전의 하마다 씨가 손주를 안고 있다. c. 산케이신문


도대체 가족사진이무엇이길래 그를 죽음도 두렵지 않게 만든 것일까. '다른 건 다 버려도 가족 앨범만은 가져와야 한다'는 그의 마지막 말에서 단서를 찾아본다. 돈은 언제든 또 벌 수 있고 집은 언제든 다시 지을 수 있지만, 억은 두 번 다시 손에 넣을 수 없고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다는 것. 노인은 아마도 이 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남겨진 가족들은 되찾은 추억에 기대어 슬픔을 이겨내고 남은 인생을 이어나갈 것이다.




우리 삶을 지탱하는 것은 무엇일까. 불구덩이 속에서 살아남게 하고, 목숨을 걸게 하고, 남은 삶을 이어가게 하는 것은 바로 가족과 함께한 시간이다. 가족사진은 가족이 살아온 시간과 추억을 품은 기록물이자, 우리가 여기 함께 살아 있었음을 증명하는 증거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족사진이 사라진다는 것은 지난 인생을 송두리째 도둑 맞거나, 나 가족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것과 다름없다.


요세미티의 불타는 집과 쓰나미의 현장에서 구조해낸 것은 사진이 아니라 기억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모든 것을 잃어도 가족의 추억만 있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으리라 확신이 있었다. 어떠한 믿음도 이보다 더 견고할 순 없을 것 같다. 이 믿음이 결국 불에 타 잿더미로 변한 숲을 되살리고, 쓰나미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마을에 다시 온기가 돌게 하는 힘이 되었으니. 그렇게 마음은 기적을 만들고, 기억은 미래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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