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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쥬드 Feb 05. 2024

본래의 기능을 잃어버린 레몬 착즙기

필립 스탁의 쥬시 살리프

 대학에서 제품 디자인을 공부할 때부터 필립 스탁의 쥬시 살리프는 위시리스트에 항상 존재했다. 나는 원체 미래적 형태에 환장하는 터라, 기다린 다리에 물방울 비슷한 머리가 달린 모양새가 연상시키는 '고도로 성장한 문명의 외계인'의 느낌이 꽤 마음에 들었다(아마 영화 '우주전쟁'의 영향도 있었던 듯하다). 같은 이유로 '레이몬드 로위의 연필깎이' 또한 위시리스트 한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우주전쟁'에 나오는 외계인. 영락없는 쥬시 살리프 아닌가!

 학부생 때 전공 교수님 댁에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거기서 주시 살리프의 실물을 영접했다. 기대 이상이었다. 번쩍이는 알루미늄 바디와 안정적인 삼각 다리의 밸런스는 묘한 쾌감을 주었다. 교수님께선 '실질적인 쓰임새는 별로 없으나, 심미적으로 완성도가 높아 선물하기 좋다'라고 얘기하셨다. 아- 나도 주시 살리프를 선물로 건네며 젠체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고 다짐했었던 듯하다.


 필립 스탁은 제품의 모든 순간을 디자인한다. 사용되지 않고 놓여있는 순간까지 아름답도록 설계한다는 이야기다. 1990년에 이탈리아 주방 용품 브랜드 '알레시 Alessi'를 통해 나왔던 쥬시 살리프가 그러하고, 마찬가지로 알레시에서 발매된 파리채 'Dr Skud'가 그러하다.

필립 스탁이 디자인한 파리채 'Dr Skud'. 구멍의 크기를 통해 사람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그러나 미려한 모습과는 상반되게 형편없는 기능성을 가지고 있다. 쥬시 살리프를 통해 레몬을 짜면 손으로 짜낸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결과물을 얻게 된다. 닥터 스쿼드는 파리채에 사람 얼굴이 그려져 있어 벌레를 잡을 때 묘한 불쾌함이 따른다. 당시 디자인사를 지배하던 'Form Follows Function' 즉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에 철저하게 반하는 사례이다. 'Form Follows Emotion'인 셈이다.

 그럼에도 쥬시 살리프는 당당하게 시대를 대표하는 디자인의 아이콘이 되었다. 기능적 결함을 이겨내는 디자인 완성도의 힘이다. '이 즙짜개는 기능이 형편없어'라고 투덜대는 사람에게 '그래서 예뻐 안 예뻐'라고 물으면 '예뻐. 그렇지만..'이라고 답할 것이다. 적어도 내 눈에는 완벽하다.

 돈을 버는 직장인이 되고 나서, 광교에 위치한 편집샵 'STROL (지금은 문을 닫았다)'에서 잊고 살던 이 제품을 다시 조우했다. 유려한 자태는 여전했기에, 기쁜 마음으로 지갑을 열었다. 그렇게 나의 오랜 위시리스트는 침실을 장식하는 하나의 오브제가 되었다. 본래의 기능인 '레몬 착즙기'로는 단 한 번도 사용된 적 없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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