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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랑이 Oct 28. 2020

본능이 누르는 번호, 112 (上)

< 어느 지구대 경찰관의 평범한 하루 >

< 어느 지구대 경찰관의 평범한 하루 >

본능이 누르는 번호, 112 ()

※ 본편은 분량이 많아 두 편으로 나누어 게재합니다.



     

  "여러분, 집에 불이 났어요. 어떤 번호를 눌러야 할까요?"

 

   "119요~"

  

  "그럼 여러분 집에 도둑이 들었어요! 어떤 번호를 눌러야 하죠?"

  

  "112요~"

  

  유치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선생님들과 아이들의 모습이다. 범죄 신고는 112, 화재 신고는 119.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배워 온 기본 교육이자 상식이다. 유치원생들도 알고 있는 당연한 사실을 정상적 교육과정을 거친 대한민국 성인이 모를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경찰에 들어와 만났던 사람들은 조금 달랐다.










  “아이가 무언가를 삼켰는데 숨을 쉬지 않아요.”

  “옆 건물에서 검은 연기가 나고 있어요.”

  “아파트 난간에 사람이 매달려 있어요.”

  “길에 사람이 쓰러져 있는데 의식이 없어요.”

  “배가 너무 아픈데 병원에 갈 수가 없어요.”

  

  실제로 내가 겪었던 신고 내용들이다. '에이, 119 신고 내용인데 어쩌다가 112에 신고된 경우 아냐?'라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단언컨대, 위 신고 내용들은 112에 어쩌다 한 번이 아닌 비일비재하게 접수되는 ‘흔한’ 신고 내용들이다. 이 신고들은 최초로 112에 먼저 접수되었고, 그 이후에도 신고자는 119에는 따로 신고하지 않았으며, 우리가 직접 119에 공동대응 요청을 한 신고 내용들이다.

  

  물론 경찰(112)과 소방(119) 모두 구체적인 상황은 차치하고 위험에 처한 사람이 도움을 요청하면 지체 없이 출동한다. 다행히 양 기관 간에는 공동대응 체계가 잘 구축되어 있다. 공동대응이 필요한 경우 기관끼리 신고 장소와 신고 내용 등을 공유하고 공조 요청을 보낸다. 물론 이 공동대응이란 것이 모든 국가기관 사이에 통용되고 있는 시스템은 아니다. 정말 위급한 순간에 114(전화번호 안내)나 131(일기예보 안내)을 눌러서는 안 된다. 꼭 기억하고 명심하자.


  이처럼 적어도 경찰과 소방 간에는 공동대응이 가능하므로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112나 119를 명확히 구분해서 눌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위급한 순간에 직면하면 당황하기 마련이다. 당연히 알고 있던 것도 잊어버리고, 익숙한 것에도 실수를 하곤 한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그 순간에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됐다.’라는 식의 비유를 하곤 한다. 112가 필요한 순간에 119를, 119가 필요한 순간에 112를 눌렀다고 큰 잘못을 한 것은 아니다. 다만, 순간의 ‘실수’가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질 때도 있다.


  최초 경찰이 신고를 접수하고, 소방에 공동대응을 요청하기까지는 고작 3초가 채 걸리지 않는다. 따로 전화를 할 필요도 없고, 그저 버튼 한 번만 누르면 경찰이 접수한 모든 신고 내용이 소방에 전달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는 상황이, 소방의 공동 대응도 필요한 상황인지 명확한 판단이 서지 않는 경우다. 내가 지역경찰관이 아닌 112 종합상황실에서 신고 접수요원으로 근무하던 당시의 일을 소개할까 한다.

       

  (통화 연결음)  [뚜루루루-]

  

  “긴급신고 112입니다.”

  

  “(울먹이는 젊은 여성의 목소리) 저기, 저 좀 빨리 좀 도와주세요! 네? 빨리요!”

  

  “신고자분, 조금만 진정하시고 정확한 신고 위치와 간략한 신고 내용을 말씀해주세요.”

  

  “(다급하게 소리치며) 여기 OO동 OO아파트예요! 빨리 좀 와주세요!”

  

  “몇 동 몇 호 인가요?”

  

  “101동 801호요! 아, 제발 좀 빨리요!”

  

  “지금 바로 경찰 출동합니다. 신고자분, 지금 어떤 상황인가요?”

  

  (통화 종료음)  [뚜.뚜.뚜……]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 중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참고로 나는 웬만한 추리소설은 다 읽고도 이해를 하지 못하고, 반전 영화를 볼 때면 결말을 맞춰본 역사가 없다. 즉, 추리와는 거리가 멀다. 뭐, 모든 경찰관이 다 명탐정인 건 아니니까.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어쨌든 이렇게 부족한 나지만, 그래도 그 당시 신고자의 상황을 가정해보고 할 수 있는 조치를 다 하기 위해 노력했다. 혹시나 모를 위치 지정 오류를 예방하기 위해 핸드폰 위치정보를 파악했고, 현장으로 출동하는 경찰관들이 신고자의 상황을 참고할 수 있도록 신고 접수 당시 파악한 내용들을 참고사항에 기재했다. 코드는 긴급신고(Code0)로 지정했으며, 다시 신고자와 통화를 하기 위해 몇 차례 콜백(Call-back)을 하였으나 전화는 더 이상 연결되지 않았다.


  과연 신고자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비록 나로서는 이 상황에 대한 복기(復棋)지만, 이 글을 처음 읽는 사람이라면 함께 추리를 해보자. 먼저 위 신고 내용에서는 알 수 없지만, 신고 당시 일시는 평일 오후 2시경이었다. 이제 112 신고 통화 내용을 토대로 유추할 수 있는 단서들을 추려보자. 경찰의 도움을 필요로 하며 112에 신고, 목소리로 보아 신고자는 20대~40대의 여성으로 추정, 장소는 아파트 내부로 신고자 혹은 타인의 집, 신고 당시 울먹이고 있었고 상황조차 이야기하지 못할 정도로 긴박한 상황,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다급하게 통화 종료. 실제 내가 신고를 접수하며 파악한 단서는 이 정도뿐이었다.



 이제 위 단서들을 토대로 상황을 가정해보자.


  ① 여성은 20대로, 외출을 하려고 집을 나서던 중 얼마 전 헤어진 남자 친구가 보복을 하겠다며 집 앞 까지 찾아와 핸드폰 메시지로 협박을 하고 있어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


  ② 여성은 30대로, 혼자 살고 있는데 외출 후 집에 돌아와 보니 큰 방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져 급하게 작은 방으로 들어가 몸을 피한 채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


  ③ 여성은 40대로, 남편과 말다툼을 하던 중 갑자기 남편이 칼을 든 채 가정폭력을 하려 하여 화장실로 대피해 문을 걸어 잠근 채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



  내가 가정할 수 있는 상황은 이 정도다. 추리 능력이 뛰어난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상황을 떠올렸을지 궁금하다. 이제 실제 있었던 위 상황에 대한 답을 공개하고자 한다. 당시 이 신고를 접수한 후에도 수십 통의 112 신고 접수 전화를 받았지만 위 신고의 상황과 결과가 궁금해서 몇 번이나 그 현장 파악 내용과 조치결과를 확인하려 했다. 신고를 접수하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 드디어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들이 당시 상황에 대해 종결한 기재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신고자는 3살 남자아이의 엄마. 아이는 거실에서 있었고 신고자인 엄마는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는데, 아이가 무언가를 삼켰는지 바닥에 드러누워 숨을 헐떡이고 있는 걸 목격한 후 경찰에 신고를 했다는 진술. 신고자는 119에는 따로 신고하지 않았다고 하여, 경찰관이 현장에 도착하여 상황을 파악한 후 바로 119에 공조 요청을 하였음. 119 구급대 도착까지 지체할 수 없어 하임리히법(기도이물폐쇄 응급처치)을 실시, 아이는 기도에 걸린 작은 장난감 조각을 뱉어내어 정상 호흡을 되찾았고, 이후 119 구급대가 도착하여 병원으로 응급 이송함.]

   

  위 내용이 본 사건의 전말이었다. 과연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위와 같은 결말을 예상한 사람이 있었을까? 그렇다면 그 추리 능력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고 싶다. 어쩌면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꼭 범죄 상황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다치거나 아픈 상황일 수 있는데 왜 경찰에 신고했다고 경찰만 출동했을까? 그냥 위급상황이라고 판단되면 모든 신고 상황에 경찰과 소방이 함께 출동하면 되지 않을까?’ 옳다. 완벽한 정답이다. 모든 순간에 경찰과 소방이 함께 출동한다면, 설령 신고자가 112와 119를 혼동하여 신고한다고 하더라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모든 일이 늘 그렇듯, 언제나 문제는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에 있다. 경찰도, 그리고 소방도 자체적으로 접수하는 신고를 처리하기에도 항상 인력의 부족함을 느낀다. 그런데 만약 각 기관에 단독으로 접수되는 모든 신고에 공동대응을 요청한다면 지금 인력의 두 배, 아니 세 배를 늘린다고 해도 부족할지도 모른다. 정말 안타깝고 속상하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신고 접수 당시 명확히 타 기관의 대응이 필요한 경우, 혹은 위 상황처럼 직접적으로 현장을 파악하여 타 기관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현장이 확인되지 않은 모든 신고 내용에 공동대응을 요청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행히 위 상황에서는 출동한 경찰관이 하임리히법을 알고 있어 응급조치를 할 수 있었고, 이후 공동대응 요청으로 119 구급대가 병원으로 이송하여 아이의 생명을 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경찰관은 전문적인 의학적 지식이 없을뿐더러, 모든 응급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응급조치 요령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119 구급대처럼 응급조치에 필요한 장비들이 확보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위의 경우처럼, 그나마 즉각적으로 할 수 있는 응급조치 방법인 하임리히법이나 심폐소생술을 할 수 있는 상황이 곧 천운인 셈이다. 이러한 이유로 가능한 1분 1초가 급박한 상황, ‘골든타임’을 놓쳐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는 명확한 신고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위 상황과 유사한 상황이지만, 경찰관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119가 도착할 때까지 신고자와 함께 발만 동동 구르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그 무력한 경찰관은 다름 아닌 바로 나였다.



(下)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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