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감사할 줄을 모르고 살았었다. 감사하면 복이 온다는 말을 흔히 들었지만 감사보다는 원망이나 한탄이 먼저 튀어나왔고 그게 자연스러웠다. 당시 내게 감사는 가식이었고 불평불만보다 거리가 멀고 낯설었다. 어쩌다 맘 먹고 감사를 해보기도 했지만 그런 마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사람들과 환경이 바뀌지 않는데 감사 해봤자 소용없다는 자괴감으로 스스로 불행에 빠지거나 당하기 일쑤였다. 그런 내 눈에 감사를 했더니 잘 살게 되었다거나 인생이 바뀌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사탕발림이나 거짓말로 들렸다. 아니면 살만하니까 떠드는 잘난척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감사에 관한 책을 쓰고 감사의 기적을 간증하던 유명인이 얼마안가 가정의 불화와 각종 구설로 물의를 일으키거나, 감사보다 저주에 가까운 말로 서로를 비방하고 다투는 모습을 보면서 불신을 확신하기도 했다.
그렇게 감사는 내게 떨떠름하고 별로 신뢰가 안가는 존재였다. 그건 감사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였음을 깨닫는데 너무 오랜 세월을 허비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고 지나치게 어리석었지만, 감사보다 원망과 분노가 컸던 내게는 진짜가 보이지 않았었다.
사실 알고보면 난 '감사'가 뭔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었다.
감사에 법칙있고 원리가 있으며 그 법칙을 준수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무시하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를 흔히 듣고 말하니까 그까짓거 하고 싶으면 백번도 천번도 더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감사'가 뭔지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채.
'감사'를 일종의 예의로만 배우고 형식적으로 입에 달고 살던 때, 내 삶은 '감사'뿐만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예의상, 어쩔수없이 하고 있거나 해내야했던 일들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내가 하는 감사엔 늘 수식어가 붙었다. 생일이라서, 명절이라서, 답례로, 그리고 자식, 아내, 며느리, 엄마, 친구, 이모, 고모, 강사, 위원, 이사, 원장 등 호칭이 늘고 수식어가 늘어날수록 감사의 이유도 다양하게 늘어났다. 감사할 일이 많다는 건 내게 챙길 것도 많고 신경쓸 일이 많다는 것과 연결되어 별로 달갑지않았었다. 그렇게 지나온 내 삶은 의무적으로 감사할 것이 많아서 되려 감사를 잘 모르고 겉만 그럴듯하게 흉내내고 있었다.
결국 진정한 감사를 모르는 삶은 위기가 찾아왔을 때 쉽게 바닥을 드러냈다.
남편의 사업이 힘들어지고, 돈을 빌려주는 입장이 아니라 빌려야 하고, 내가 가장이 되어 살림을 꾸려가야할 형편에 처하자 내가 얼마나 겉으로 감사치레를 하고 살아왔는지 티가 났다. 물질적으로나 심적으로나 누굴 챙길 형편도 여유도 없어지자 허투루 감사하고 살았던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제일 쓸모없는 순서대로 사람들이 떨어져 나갔다. 혹시 보증이나 돈 빌리는 부탁을 할까봐 먼저 상처를 주는 사람 덕분에 인생수업을 톡톡히 할 수 있었다. '행복은 혼자서 오고, 불행은 한꺼번에 온다.'는 속담처럼, 시부모님은 두분다 병원에 입원하고, 남편도 다치고, 아이는 한창 사춘기로 예민해져서 어떻게 감당해야할지 길이 보이지 않았다.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내가 도망친 곳은 책이었다. 도서관을 가든, 서점을 가든 책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고 책 속에 파묻혀 지냈다. 할 일이 산더미같았지만 손에서 책을 놓치않고 살았다. 무엇보다 위로와 격려가 필요했던 나는 어떻게라도 치유와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책들을 찾아 읽고 또 읽었다. 책을 읽다가 울며 반성하고, 회개하고, 용서를 빌고, 용기를 얻고, 감사를 배웠다. 사람들에게 우스갯소리로 '내가 교회 가서는 회개가 안나오는데, 책을 읽으면 회개할 때가 많다.' 말할 정도로 책은 나를 깨우치고 인생에 변화를 가져왔다.
어느날 우리집을 방문했던 언니는 벽마다 높이 들어선 책장에 가득 꽂힌 책들을 둘러보면서, '이렇게 책을 많이 읽으니, 네가 뭐가 되도 되겠다.'며 중얼거렸다. 내 처지를 누구보다 맘 아파하고 헤아려주던 언니는 한숨을 쉬며 혼잣말처럼 했지만 내겐 그 말이 고맙고 아팠다. 내가 힘든 상황을 독서로 이겨내고 있다는 걸 언니는 잘 알고 있었고 그래도 희망을 끈을 놓치않고 나를 바라봐주는게 고마웠었다.
'은혜는 겨울에 자란다'는 말처럼 인생의 혹독한 겨울 지나고 있던 나는 사소한 것에도 감사하고 기뻐할 줄 아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마치 세상에 다시 태어난 것처럼 매일이 새롭고 신기하고 감사했다.
금세 폭우가 쏟아질 것처럼 우중충한 날인데도 창문밖을 보면서 '와! 오늘 날씨 참 멋지다.'고 했더니, 그림을 배우던 학생이 피식 웃으며 나를 놀렸다.
"선생님이 안 좋다는 날씨가 어디 있어요?"
녀석의 말이 의아해서 물었더니, 내가 매일 창밖을 보면서 '오늘 날씨 참 좋다.'고 말한다는 것이었다. 비가 오든 눈이오든 천둥 번개가 쾅쾅 내려치든 난 언제나 날씨가 좋다고 말해서 믿을 수 없다는 거였다. 그 말에 난 허허 웃고 말았지만 속으로는 소름이 끼치게 놀라웠다. 인생의 겨울이 내게는 삶의 소중함과 감사를 일깨워준 고마운 시간이었다는걸 확인할 수 있었다. 십수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가 또렷이 그려지는 걸 보면 내게 꽤 뜻깊었던 말이었다.
언제부터 내가 긍정적인 변화를 하고, '좋다'와 '감사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 수 있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본받고 싶고 깨달음을 주는 인물들은 예외없이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긍정적이고, 사고가 유연하며,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존중하는 삶을 살았다. 감히 나는 힘들다는 말을 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힘겨운 삶을 살면서도 악보다는 선을 택하고, 부정보다는 긍정을, 허물보다는 장점을 칭찬하고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감사'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들의 삶은 그야말로 축복 받은 삶이였다.
나 역시 축복 받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래서 부자들과 성공한 사람들을 흉내내며 분주하게 살았지만 내가 원하는 축복은 나를 피해다녔다. 그때는 이유를 몰라 답답하고 원망했지만 돌아보니 애초에 방향이 틀렸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야말로 고생을 죽으라고 한 후에 겨우 깨달은 것이다. 이제라도 깨달아 다행이다싶지만 미련하고 어리석은 내가 씁쓸하고 안타까운 건 어쩔 수 없다. 얼마든지 일찍 깨닫고 '감사'하며 즐겁게 살 수 있었는데 내 욕심과 조급함이 진실을 가려 너무 오래 헤매고 다녔으니까.
"가장 축복 받는 사람이 되려면 가장 감사는 사람이 되라."
- 존 캘빈 쿨리지(John Calvin Coolidge, Jr.)
미국의 30대 대통령이었던 캘빈 쿨리지는 "가장 축복 받는 사람이 되려면 가장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했다. 이 말은 누구보다 축복 받는 삶을 살고 싶었던 내게 비수처럼 꽂혔다. 축복보다 감사가 먼저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