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승준 Aug 12. 2024

숟가락 드는 순서

©Pexels/접시에 담긴 음식을 막 뜨려는 손

우리 학교 식당에서는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꼬마부터 교장선생님까지 같은 메뉴로 밥을 먹는다. 학교에서 일하는 나 역시도 같은 식당 같은 메뉴를 공유하는데, 시간표에 따라 함께 하는 이들의 면면은 매일 다르다. 점심시간 가까이에 수업이 있으면 조금 일찍 먹기도 하고 반대로 오전에 수업이 몰려있는 날엔 늦은 식사를 하다 보니 어떤 날엔 제자들과 먹기도 하고 또 어떤 날엔 경력 많으신 어른 선생님과 먹는다.

식당에 도착한 순서대로 배식대에서 밥을 뜨고 앉은 순서대로 수저를 들지만 어른 선생님과 함께 식사하게 될 땐 아무래도 먼저 한 숟가락 뜨시기를 기다리게 된다. 배식은 먼저 받았지만 먹지 않고 기다리는 나를 보신 어른들은 "왜 기다리고 그래요? 내가 무슨 어른이라고!!! 얼른 밥 뜨셔요."라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해서 다음번에 만날 때에 아무 신경 쓰지 않고 먼저 내가 우걱우걱 밥을 먹게 될 일은 없겠지만 한마디 말씀으로 괜스레 마음이 편안해진다.

지내다 보면  “감히 네가 나보다 먼저 숟가락을 들어?”하는 어른을 만날 때도 있지만 그런 엄하고 근엄한 꾸지람이 나의 예의 지수를 높여주지는 않았다. 장난기 심한 성격 때문에 어릴 적엔 회초리도 많이 맞고 혼나기도 많이 혼났지만, 꾸중의 강도가 내 행동 교정의 정도와 비례하지는 않았다.

오늘 식사 시간엔 어린 선생님들과 한 식탁에 앉았고, 한 번쯤 해보고 싶었던 말을 했다.

“먼저들 드세요. 제가 무슨 어른이라고!”

별것도 아니었지만 뭔가 좋은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어른이 되면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진다. 혼을 낼 수도 있고 심부름을 시킬 수도 있고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시킬 수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어른은 할 수 있는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어른이다. 화를 내기보다 이해하고 조용히 하라고 하기보다 들어주고 심부름을 시키기보다 먼저 움직여야 한다. 밥 한 숟가락 먼저 뜰 수 있다고 그 권한으로 존경받을 수는 없다. 누구라도 편히 식사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낫다.

권한을 가진 이가 권리를 누리는 것보다 내려놓는 것이 몇 배는 어렵다. 권한을 나누는 것이 힘을 독점하는 것보다 몇 배는 멋있다.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면 다른 이들의 숟가락부터 먼저 들게 해 보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