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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승준 Oct 14. 2024

이븐하게 익어가나요?

©Pexels/고르게 잘 익은 스테이크

요리 예능이 인기를 얻으면서 식사 자리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주워들은 한마디씩을 유행어처럼 내뱉는다.


"이븐하게 잘 익었네."


"퀴숑이 타이트해야 하는데 좀 느슨하네.”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만 다니다 보니 이런 음식은 영혼이 없어 보이네."


할 줄 아는 요리가 손으로 꼽을 정도인 나지만 정성을 담은 음식이 맛나다는 것에 120% 동의한다.


스테이크를 구울 때도 당연히 그렇지만 라면 한 봉지를 끓일 때도 각종 재료 섞은 볶음밥을 만들 때도 최대한 집중하는 편이다. 시간을 재는 것은 기본이고 소리도 냄새도 젓가락 끝으로 느껴지는 촉감도 예민하게 느끼려고 노력한다. 라면 물이 부글부글 끓을 땐 고른 익기와 면발의 탄력 유지를 위해 얼음 한 덩이씩을 정성스레 던지고, 익어가는 고기는 겉은 바삭 속은 촉촉하도록 끊임없이 살핀다. 볶음밥은 모든 밥알이 노릇노릇 코팅되도록 쉬지 않고 저어준다. 최선을 다한 요리는 스스로를 배신하지 않는다. 면발은 활어처럼 탱탱하고 고기의 풍미는 형언할 수 없이 깊고 볶음밥의 밥알들은 한알 한알 그 모양을 유지한 채 고소하다.  


유명 셰프들의 혀와 평가는 나의 감각들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수준이겠지만 나름대로 요리에 진심인 난 그 방향성과 의미가 무엇인지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음식을 구성하는 재료들은 결과만 본다면 적당히 섞여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속성과 맛이 가지는 특성에 따라 넣는 순서도 불의 세기도 다르게 해야 한다.


같은 재료라 하더라도 목표하는 음식의 종류에 따라 또 다른 레시피로 정반대의 접근이 필요할 때도 있다. 야채와 고기 사이에서, 물과 면 사이에서, 양념과 주재료들 사이에서 때때로 나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섬세하게, 때로는 군대를 이끄는 장군처럼 강력하게 조절하고 리드해야만 한다.


"합격입니다." 소리를 듣기 위한 예능 참가 요리사들도 그렇지만 가족이나 지인에게 내어놓는 나의 요리도 "정말 맛있네." 소리를 들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모든 참가자가 '합격!' 모든 지인이 "맛있다!"하면 참 좋겠지만 유명한 셰프도 탈락하고 최선을 다한 내 요리도 혹평을 받을 때가 있다.


특정 재료에 집중하다가 밸런스가 무너지기도 하고 한쪽으로 욕심을 부리다 요리 전체의 방향성이 흐트러지기도 한다. 맛있는 재료라도 적정한 양만 넣어야 하고, 내가 좋아하는 음식보다는 먹어주는 이의 취향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 오늘 합격하지 못했다면 과감히 새로운 방법으로 다시 요리해야만 한다. 같은 방법으로 다시 시도한들 같은 결과가 기다린다.


삶이란 것도 하루하루가 하나의 요리를 만들어 가는 과정과 흡사하다. 내 개인의 시간도 직장과 가정과 여가 사이에서 적절한 비율로 고르게 익어가야만 한다.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친다면 다툼이 생기거나 스스로 지칠 수 있다.


선배들과 후배 사이에서도 제자들과 학부모님들 사이에서도 시댁과 아내 사이에서도 퀴숑을 타이트하게 유지하는 일은 매 순간 심혈을 기울여야만 한다. 모든 재료들을 밀리 단위로 균일하게 썰어내는 파인 다이닝은 지나친 집착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 정도의 노력 없이 내 삶이 고급 레스토랑이 될 수는 없다.


적당한 반찬들로 채워진 그저 그런 식사로 매일매일의 식탁을 채우면서 살아갈 수도 있지만 그런 밥상에서 진심 어린 감탄사가 나오기는 어렵다. 매번 합격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영혼 없이 삶을 요리하는 것을 권하고 싶지는 않다.


시각장애 가진 40대 가장이란 재료는 나 스스로 느끼기에 파인 다이닝을 위한 만만한 재료는 아니다. 다른 이들에겐 각자의 재료들이 그러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훌륭한 요리사는 어떤 재료 어떤 상황에서도 최고의 요리를 만들어 낸다. 독특하고 어려운 재료는 셰프들에겐 설레는 도전이 되기도 한다.


내 삶은 어제도 오늘도 여전히 이븐하지 않을 때가 많다. 쓸데없는 욕심으로 채워지기도 하고 어리석은 판단을 하기도 한다. 그것은 내게 주어진 성별, 시력, 나이 같은 재료 탓이 아니라 요리에 좀 더 깊은 영혼을 담지 못한 나 때문이다.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서 참가자들은 편의점 재료만으로도 엄청난 결과물을 만들어 내었다. "이런 디저트라면 호텔에서 수십만 원 받고 팔아도 매일 먹겠어요."라는 심사위원의 평가는 요리에서 중요한 것이 비싼 식재료나 고급의 스킬만은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우리에겐 이미 훌륭한 재료들이 주어졌다. 각각의 재료에 맞는 이븐하고 타이트한 텐션을 찾아서 파인 다이닝을 하는 일만 남았다.


"당신의 삶은 이븐하게 익어가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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