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 적에 치킨은 자주 먹는 흔한 음식은 아니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다른 집에 비해서는 먹고 싶은 것을 사 주시는데 후한 결정을 내리시는 편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먹고 싶을 때마다 오늘이고 내일이고 사 먹는 쌀밥에 김치 같은 그런 것은 또 아니었다.
치킨보다는 통닭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던 그것이 그때의 물가를 고려할 때 비싼 축에 속하는 것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족끼리 사 먹을 때에도 여러 가족이 모였을 때도 두 마리 세 마리 주문하기보다는 한 마리로 되는대로 나눠 먹었던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그런 연유로 다리와 날개는 항상 정직하게도 두 개씩만 존재했다. 대체로 사람들이 더 맛있는 부위 혹은 더 귀한 부위라고 동의했던 두 쌍, 네 조각의 그것들의 분배에 대해 치킨을 먹을 때마다 어른들은 누구에게 주어야 하는지 각자의 의견을 나누곤 하셨다.
"승준이 아빠 드셔요."
"아니에요. 우린 자주 먹어요. 손님이 드셔야죠."
"아이들 주세요."라는 각각의 주장에는 그럴듯한 이유가 존재했지만 몇 명이 모이더라도 결국 다리와 날개를 먹을 수 있는 권리는 두 명씩에만 주어졌다. 모인 사람 중 누가 더 그 부위가 먹고 싶은지 혹은 누구에게 주는 것이 더 합리적인지를 정하는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근거가 존재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구성원은 날개와 다리를 먹고 싶어 했고 한두 명의 선택 받은 이를 제외한 사람들은 아쉬운 양보를 해야만 했다.
어리다는 이유로, 어른이라는 이유로, 지난번에 먹었다는 이유로 먹고 싶은 부위를 먹지 못하고 양보한 이들의 마음이 진정 진심이었을 수는 있지만 한 마리밖에 없는 치킨의 희소 부위로 모두가 원하는 부위를 맛있게 먹는 상생의 결과는 발생하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흘렀을 때 우리의 풀리지 않던 과제는 대형 프랜차이즈 치킨집들에 의해 너무도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다리만 혹은 날개만 그것도 아니면 다리 반 날개 반을 골라서 시킬 수 있는 메뉴판은 너무도 쉽게 해묵은 과제를 해결시켜 주었다. 몇천 원 정도의 금액을 추가로 지급해야 하긴 했지만, 그것은 모두가 만족하게 된 행복한 결말을 구매하는 데에는 절대로 비싼 지급이 아니었다.
우리 가족만 있든지 여러 가족이 모이든지 우리는 모두 귀하게 여겨지던 그 특수 부위를, 서로를 설득하고 양보하는 지난한 과정 없이 편하게 먹을 수 있었다. 웃어른에게 다리를 양보하는 것이 전통의 예의인지 군침 더 흘리는 어린아이에게 날개를 주는 것이 미풍양속인지 결론도 나지 않는 대화 같은 것은 할 필요가 없었다. 모두가 만족한 행복한 상태에서 그런 것은 아무런 필요가 없어져 버렸다.
요즘 지하철 역사에 설치된 엘리베이터 앞에서는 드물지 않게 누가 먼저 타야 하는지에 대한 다툼이 벌어지곤 한다. 엘리베이터 외에는 선택권이 없는 중증 장애인이 우선인지, 동방예의지국이니 어르신이 우선인지, 촌각을 다투는 급한 일이 있는 또 다른 누군가가 우선인지 각자에게는 양보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 사정 모르는 이들에겐 엘리베이터 한두 번 양보하는 것이 뭐 그리 큰 일인가 싶겠지만 붐비는 역사에서 매번 같은 상황 마주하는 이들에겐 치킨 다리 양보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문제가 된다.
한 번의 양보가 두 번이 되고 오늘의 양보가 내일로 이어지는 동안 내 삶의 시간은 이해할 수 없는 논리들에 굴복한 강제적 기다림과 느림으로 채워진다. 어릴 적 치킨 한 마리에 들어있던 두 개의 다리보다도 더 적은 한 대뿐인 지하철 엘리베이터 앞에서 이동이 불편한 이들은 서로를 경계하고 다투고 마뜩지 못한 양보를 한다.
오늘 방문한 대형 쇼핑몰엔 여러 대의 빠른 엘리베이터들이 쉴 새 없이 건물을 오르내렸다. 대략 보아도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승강기를 이용했지만 충분하게 설치된 그것 앞에서 우리는 누구에게 우선권이 있는지에 대한 토론 따위를 고민하지 않았다. 지하철 역사의 느릿느릿하고 붐비는 엘리베이터가 오버랩되면서 씁쓸했다.
엘리베이터 설치 비용이 얼마나 비싼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화려하게 진열된 물건 사고파는 백화점에서는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천 원짜리 한두 장 내밀고 이용하는 서민의 대중교통에서는 매일의 다툼이 되어버리는 상황이 가슴 아팠다. 교통약자 엘리베이터가 처음 설치되던 꽤 오래전에 비해 우리의 경제 사정은 나아졌고, 지하철의 요금도 올랐고, 무엇보다 엘리베이터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많이도 늘었지만, 약속한 듯한 곳엔 한 대의 엘리베이터만 설치되어 있다.
사람이 이동할 권리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닭 다리나 날개 따위를 양보하는 것에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권리이다. 사람들은 원하는 부위의 치킨을 먹는 데에도 몇천 원을 더 지급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교통약자들의 반복되는 슬픈 다툼을 없애는 가장 쉬운 방법은 엘리베이터의 대수를 늘리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대중교통만이라도 더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된다면 조금의 금액을 더 지급하게 되거나 일정 금액의 세금을 더 내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어른도 아이들도 손님도 초대한 이도 이제는 치킨을 주문할 때 큰 고민 없이 먹고 싶은 부위를 먹는다. 아파트에도 작은 건물에서도 우리는 누가 더 불편한지 누구에게 더 필요한 것인지를 논하지 않고 대부분의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한다. 대중교통이라는 말에 어울리게 누구든지 우선권과 양보를 고민하지 않고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여러 대의 엘리베이터가 설치되기를 바란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도, 지팡이 짚은 어르신도, 유아차 동반한 젊은 엄마에게도 그렇지만 지친 퇴근길의 청년도 폭염에 지친 이들에게도 불편한 마음 없이 탈 수 있는 품 넓은 대중의 엘리베이터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