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어울려 노는 친구들은 내 곁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종종 천사가 되곤 한다. 팔꿈치 내주고 같이 걷거나 식사 자리에서 반찬 위치를 설명해 줄 때도 그렇지만 "승준이는 제 친구예요."라고 말 한마디만 내뱉어도 다른 것 따질 필요 없이 착한 사람으로 인증된다.
내 친구들이 대체로 착한 편이긴 하지만 그 녀석들이 착하기 때문에 나와 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니다. 어쩌다 보니 나와 친구가 되었고, 그로 인해 어울리게 되고 친해지고 하다 보니 만나고 함께 시간을 보내곤 하는 것이다. 다른 이들의 관계가 형성되는 과정과 크게 다를 것 없지만 사람들이 보기엔 뭔가 특별한 것으로 보이는 듯하다.
우리는 같은 학교에 다녔거나, 취미가 같았거나, 우연히 같은 장소에 있었거나 그도 아니면 둘이 동시에 아는 친구의 소개를 시작으로 친구가 되었다. 드물게 그런 경우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내 친구들은 내게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찾아왔었다거나 다른 친구 없는 내 모습이 안타까워서 내 곁으로 다가오거나 하는 감동 스토리를 필수적으로 가지고 있지는 않다.
나와 무언가를 같이 한다는 것이 때때로 불편할 때가 있긴 하지만 그들은 투철한 사명감으로 그런 어려움을 참아가며 내 옆을 지키는 것은 아니다. 함께 식사하고 술잔을 기울이고 여행을 가지만 시력을 꼭 사용해야 하는 행위가 동반된 모임에서 굳이 억지로 나를 초대해서 인내와 극복을 시행하지는 않는다.
교과서에서조차 장애 있는 학생과 놀아주는 아이를 착한 아이의 대표 격으로 묘사하지만 적어도 내 친구들은 착하기 때문에 나와 놀아주려고 노력하는 천사는 아니다. 그냥 친구이고, 친구니까 만나고, 놀아주는 것이 아니고 같이 노는 것이다. 때때로 내게 놀아줄 친구가 필요할 때 나의 일방적인 호소로 만날 자리를 만들고 놀아줄 친구들을 모으기도 하지만 나 또한 그중 어떤 녀석에게 반대의 임무를 수행한다.
내 친구들은 내게 멋지고 따뜻하고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이들이기가 분명하지만 나 또한 그들에게 그런 존재이기에 우리가 친구로 지내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나는 도움을 받긴 하지만 도움을 주기도 하고 따뜻한 배려를 받지만 속상한 일도 겪어내고 사이좋게 지내기도 하지만 다투기도 하는 그런 친구들이 있을 뿐이다. 친구들이 듣기에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어울리는 것만으로 내 친구들을 천사로 여긴다면 그건 큰 착각임이 틀림없다.
얼마 전 고위공직자 청문회에서 개인적인 일들로 청문위원들에게 지탄받는 후보자의 모습을 보았다. 그 행위들이 어떤 이유로 그리된 것인지 그것이 부적격의 근거가 될 만한 치명적인 사건인지에 대한 논의가 벌어지고 있는 중 한 위원의 발언이 내 귀를 쫑긋 세우게 만들었다.
"그분은 장애아이를 키우고 있는 마음 따뜻한 분입니다."
길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자녀가 장애가 있다는 것만으로 그의 인성 검증은 끝난 것 아니냐는 논조임이 분명했다. 그는 천사이고 그 인증의 근거는 장애아이를 키우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내 친구들을 천사라고 말하던 이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모가 아이를 양육하는 일은 숭고하고 존경받아 마땅한 일임은 누구라도 부정할 수 없는 것임이 분명하지만 그 대상이 장애아이기 때문에 더 특별하고 그 행위만으로 모든 인성 검증이 대체된다는 것에 나는 강한 거부감이 들었다.
신체적으로 불편한 아이를 돌보는 것이 그렇지 않은 아이를 키우는 것에 비해 현실적으로 몇 배의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을 잘 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장애아이의 부모님들이 천사이기 때문에 인내하고 견디며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아니다. 청문위원의 말은 많은 부모들은 장애아를 출산했을 때 대체로 양육을 거부한다는 전제가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일반적이라면 장애아를 양육하지 않으나 그는 천사이기에 특별히 예외적으로 훌륭하게 아이를 돌보고 있다는 듯 울먹이는 듯한 말투까지 보였다.
말하는 이도 그 말의 대상이 되는 이도 그 상황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길러내는 부모가 천사라면 자라나는 아이는 비장애인들 가운데 본인을 길러준 천사 같은 부모님께 장애인이기에 더 특별한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 청문회를 끝까지 지켜보지는 못했지만, 그런 발언들에 문제를 지적하는 이가 아무도 없는 것 같아서 이것이 정말 많은 이들의 동의하는 일반론인가 하는 마음에 속상했다.
모든 부모는 자신의 자녀를 사랑으로 돌보고 양육한다. 내 아이가 더 건강하고 똑똑하기 때문에 돌보거나, 더 힘든 상황에 있는 아이이기 때문에 부끄러워한다든지 천사의 사명감으로 견뎌낸다든지 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내 친구들이 나의 친구인 것에 다짐과 노력이 필요하지 않고 그것이 자신의 천사성을 인증할 수단이 아닌 것처럼 장애아이를 가진 대다수의 부모님은 그 행위가 자신의 인성 검증 도구로 활용하거나 천사성을 보여주기 위함으로 목적하지 않는다.
장애인과 함께 살거나 장애인과 어울리는 것은 별도의 따뜻한 마음이 필요한 고도의 윤리 행위가 아니다. 친구가 되고 싶을 만큼 호감이 느껴진다면 친구가 되면 되고 자녀이기에 사랑한다면 길러내면 된다. 어려움과 불편함을 논하는 것과 대상과의 관계 자체를 다른 차원의 선행으로 말하는 것은 많이 다른 이야기이다.
난 내 친구들에게 많은 고마움을 느끼지만, 장애인인 나와 놀아주어서 고맙다고 말할 마음은 없다. 장애가 있는 아이들도 부모님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감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스스로가 가진 장애로 인해 특별히 더 미안해하거나 더 감사해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