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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진 Jan 08. 2020

몸에서 돌이 떨어지는 남자

#16 열심히 살지 않는 것은 어렵다

<세상에 이런 일이> 제보감은 아니고... 우리 집 세탁기에 종종 돌이 굴러다닌다. 남편 작업복에서 떨어진 것들이다. 석공인 남편은 제주 돌담을 쌓는데, 하루 종일 돌과 씨름하다 흙먼지 투성이가 되어 퇴근한다. 그래서 출산준비물로 다른 건 몰라도 아기 세탁기는 무조건 꼭 사자 했었다.


내가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자기를 석공이라 소개했지만, 돌이켜보니 일을 배운 지 얼마 안 된 데모도(조수)였던 것 같다. 이 일을 하기 전까지는 밭일 등을 도와 받은 품삯으로 생활할 뿐 별다른 직업이 없었다. 육지에서 회사를 때려치우고 제주에 와 한동안은 그렇게 살았나 보다. 그러다가 지인이 돌담 업체 사장님을 소개해줬고, 멘트 비비기부터 시작해 지금은 (본인 피셜) 방귀 좀 뀐다는 석공이 됐다. 재작년에는 문화재 수리기능에 합격해 이를 자랑하느라 한동안 자격증을 소지하고 다녔다.

제주돌담은 강한 바람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그게 기술이다.

밖에서 일하는 직업의 특성상, 연애 때부터 우리는 대개 비 오는 날에나 만났다. '퇴근 후에 영화 보고 커피 한 잔' 같은 평범한 데이트도 쉽지 않았다. 일이 끝나면 그는 항상 넝마가 되어 있었으니까. 땀에 절은 셔츠와 돌에 찢긴 바지, 안전화 때문에 구멍 난 양말. 타고 다니던 구형 코란도 역시 주인과 마찬가지로 늘 좌석에 흙이 묻어 있었다. 나는 쓰미망치(돌을 자르는 투박한 망치), 목장갑 등과 함께 그 차에 실렸다. 그러다 보니 하늘하늘 원피스 같은 건 진작 포기하게 됐다.


사시사철 땡볕에 그을린, 아니 정확히는 화상을 입은 피부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까무잡잡하다 알고 있지만 실은 배우 이영애보다 곱고 우윳빛깔이라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다. 자외선에 늙은 얼굴 때문인지 원래 나이보다 올려보는 경우가 잦다. 언젠가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동네 어르신이 그를 가리키며 내게 "아버지?"라고 물은 일화는 오래도록 놀림거리가 됐다. 우린 고작 2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데. 물론 노안의 주요한 원인은 섭섭한 머리숱이다.(이전 에피소드 참고) 풍성해 보이려 볶아보고 흑채도 뿌려보고 하다가 수년 전부터는 삭발을 고수 중이다. 비겁하게 머리카락을 길러서 이마 위 널지 않겠다는 의지 같은 게 르라니 깎은 머리에 서려 있.


는 20대에 잠깐 스쳐 지나간 미모 성수기 시절 '증명'사진을 지갑에 늘 넣고 다닌다. 동일인물인지는 아내인 나도 알 수 없다. 당시 생'겼었던' 남편은 마트 정육코너에서 일했는데 얼굴을 보러 아주머니들이 고기를 사러 오곤 했다는 썰을 연애 때부터 서른다섯 번인가 들었다. 길거리 캐스팅도 당했다고 했던가. 알게 뭔가! 내가 결혼한 사람은 그 사람이 아데. 나마 이를 낳고 보니 함께 사는 남자의 얼굴 같은 건 안중에 없어져 억울함을 덜었다.


단순히 늙을 뿐이면 괜찮다. 돌을 들었다 놨다, 망치로 내려치고 쪼개는 험한 일은 늘 상처를 남긴다. 돌에 찧여 검게 죽은 손톱은 흔한 일이고, 자외선과 먼지바람이 결막을 변형시키기는 검열반도 생겼다. 친정엄마는 "보안경은 쓰니, 마스크는 꼭 쓰라고 해라" 사위 걱정을 달고 산다. 나도 말로는 "오늘은 춥네" "오늘은 덥네" "오늘은 미세먼지가.." 고 안쓰러워하면서도 하루라도 더 출근하길 바란다. 일당직이니 어쩔 수 있나. "좋은 소식이 있어, 내일 비 온대!"라며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남편과 나의 속내는 르다. 비가 오면 데이트한다고 설레던 연애시절은 지났다.


얼마 전에는 점심시간이 지나자마자 남편이 조기 퇴근했다. 일용직은 칼 같다. 반나절 일하면 돈도 반만 준다. 아연실색한 그의 표정은 조퇴의 정당성을 피력하고 있었다. 같이 일하던 형님이 떨어진 돌에 맞아 손가락이 절단됐단다. 처참한 광경을 눈앞에서 보고 놀란 그는 "더 일할 수가 없어서 그냥 왔"고 했다. 남편은 며칠 동안이나 잘린 손가락 이야기를 했다. 그 손이 자기 손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까 심란했던 모양이다. 그가 사무직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 본 적은 없었는데, 이때만큼은 책상에 앉아 하는 직업이면  불안할까 싶었다.


상상만으로 그치는 건 이 일을 그만두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남편이 제주에 와서 사귄 지인들의 직업은 한정돼 있다. 게스트하우스 아니면 카페를 운영다. 십 년 전쯤이라 리잡기가 가능했던 거지, 지금은 숙박업과 요식업 둘 다 포화상태라 개폐업이 난무한다. 남편처럼 모아놓은 자금 없이 믿을 건 몸뿐인 이들이 주로 선택한 건 목수나 석공, 타일공 등 노가다꾼이었다.('막일'을 가리키는 용어로 잘못 쓰이지만, 공사현장의 힘들고 고된 일을 칭한다) 제주도 유입인구가 늘고 건축경기가 활성화되며 일거리가 한창 많았다. 실력에 따라 일당이 다르지만 20~30만 원으로 도내 웬만한 일보다 임금이 높은 편이다. 데모도로 시작해 기술을 익혀서 몇 년 만에 사장이 되기도 했. 이외엔 마땅한 일자리 많지 않을뿐더러 육지에서의 경력을 이어갈래도 받던 임금에 못 미치기 때문에 차라리 노가다계에서 기술을 익히는 게 낫겠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다.


문제는 기술을 익히기까지 버티기가 쉽지 않은 노동 강도. 남편이 일하는 현장에서도 데모도 며칠 하다가 안 나오는 경우는 자주 있었다. 애달픈 건, 그렇게 힘들게 우릴 먹여 살리는 '작업복 입은 남편'이 우리 집에서 천덕꾸러기 신세라서다. 나는 수유복을 입었단 이유로 작업복에 손을 대지 않고, 아기는 더더욱 아빠 근처에 못 가게 한다. 퇴근해서 "아빠!"하고 달려오는 아이를 안아 올리는 게 꿈이었던 남편은 현관에서 아들 얼굴을 보려 까치발만 동동 구르다가 욕실로 들어간다. 그 아쉬운 표정이 종종 눈에 밟힌다. 작업복을 벗고서야 아빠가 되지만 저녁 먹고 나면 몸이 천근만근이라며 곯아떨어진다. 다음날 벽에 출근하기 위해선 9시부터 자도 부족하다. 단순히 돈 때문에 꾸역꾸역 하는 일이면 속상하겠지만 육지에서도 문화재 관련 회사에서 일했던 그는  나름대로 돌일에 흥미를 갖고 있다. 집에 오면 바둑기사처럼 '그 돌을 여기에 놓을 걸, 저기에 놓을 걸' 복기하곤 한다.


신생아보다 잘 자는 남편

열심히 사는 것. 이거 하나만 보고 이 사람과 결혼을 결심했다. "이제 열심히 살지 않겠다!"며 제주로 온 나로서는 뜻밖의 결정이었다. '할 거 없으면 퇴직금으로 작은 카페나 차리지 뭐~' 정도의 안일함에 취해 있던 내게 매일 넝마가 되던 그 사람은 이 섬의 노골적인 현실 그 자체였다. 남편은 나처럼 일하지 않고 힐링 운운하는 부류를 비롯해, '그래도 노가다는 안 할래요'라며 고상한 척하는 이들을 경멸했다. 매우 개인적인 의견임을 밝힌다. 각자의 가치관과 사정이 다르므로 삶도 다른 게 당연하다. '적게 일하고, 적게 벌어, 적게 쓰며, 대신 많이 쉬기', 도시를 떠나 제주행을 결심한 이들에게 자주 듣는 이야기다. 나 역시 꿈던 삶이고, 제대로 실천되고 있다면 참 부러운 일이다. 하지만 지극히 보통의 가정을 꾸려보니 열심히 살지 않기란 어려웠다. 군다나 제주에 특화된 직업이라 이곳을 떠날 수도 없는 우리로서는 더 부지런히 뿌리를 내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노가다 남편이 짠하면서도 출근하라 등을 떠민다. 미세먼지 심한 날보다 비 오는 날이 싫은 독한 아내다. 크리스마스에도 출근할지 묻는 남편에게 우리 아기가 아직 산타할아버지를 몰라서 좋다고 하는 모진 엄마이기도 하다. 이러다 몸에서 돌이 아닌 돈이 떨어지길 바라게 되는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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