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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녀미 Feb 12. 2024

보리 찾기

 7년 반쯤 전이려나, 어쩌면 거의 8년 가까이 된 일이겠다. 보리가 아직 어린 고양이였던 시절, 온 가족이 당황해서 보리를 찾아 헤맨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장난감과 간식을 흔드는 걸로 쉽게 유혹할 수 있는 보리인데, 그때 우리는 온 가족이 고양이를 잘 모르는 초보 집사라 '보리야~ 보리야~' 하며 집 안을 돌아다녔다. 그렇게 온 가족을 당황시킨 보리가 발견된 곳은 부드러운 미닫이 문으로 거의 닫혀있는, 자잘한 짐들이 많이 놓인 다용도실의 팬트리 위에 정리된 등산가방 위. 주황색의 45리터 등산가방 위에 보리는 동글게 몸을 말고 자고 있었다. 주황색의 한 줌짜리 고양이가 주황색의 등산가방 위에서 세상모르고 잠들었으니, 급한 마음에 대충 둘러보고 이름을 외쳐본다 한들 찾을 수가 없던 거였다. 


 보리가 미국에 온 뒤에는 중문이 없는 현관을 나서면 바로 바깥인 탓에 자주 탈출을 했다. 우리가 그 장면을 보고 바로 따라간 적이 대부분이지만 두어 번은 보리가 밖에 나간 줄도 모르다가 보리를 찾아 나서기도 했는데 그래도 보리는 늘 멀지 않은 곳에서 짧은 자유를 만끽하며 신이 나 있다가 간식에 유혹당해 우리에게 잡혀 들어오곤 했다. 등과 옆구리에 낙엽 부스러기를 잔뜩 달고, 꼬질꼬질한 발로. 


 또 우리 집에서 자란 아기고양이 들 중에서는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한 곳에 숨어 들어가 놀거나 낮잠을 자느라 우리를 당황시킨 아기들도 있다. 아래의 뚫린 공간을 통해 들어갈 수 있었던 소파 테이블의 서랍에 자주 들락거리던 녀석, 소파 아래 부직포 공간을 찢고(!) 그 안에 들어가 놀았는지.. 나중에 소파를 버릴 때 그 안에 인형을 넣어놓은.. 아마도 큰공이로 추정되는 어떤 녀석도 있었고, 지금 있는 새로운 소파의 속 공간도 달래가 자주 들락거리는 아지트이다. 안방 수납장에 놓인 내 원단 상자에서 발견된 밀이와 장수왕도 있었고, 한 번은 아기 고양이 네 마리가 몽땅 사라져서 놀란 마음에 찾다 보니 아이들이 처음으로 캣타워를 올라가 신이 났는지 캣타워의 선반과 상자 안에서 옹기종이 모여 잠든 걸 발견하기도 했다.




 요 며칠은 집 안에서 할 일을 하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도 문득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만 같다. 옷 방에 갔는데 보리가 없을 때. 안방 창가의 커튼 안에도 보리가 없을 때. 벽장을 열었는데도 보리가 신난 목소리로 쫑쫑쫑 걸어오지 않을 때. 청소기를 돌리는데도 호다닥 달려서 안방으로 숨는 보리가 없을 때. 택배 박스를 뜯는데 궁금한 얼굴로 옆에서 상자를 노리는 보리가 없을 때. 캣 휠을 조립하느라 어수선한 거실을 신이 나서 뛰어다니는 보리가 없을 때. 비가 오는데 창가에서 비를 구경하는 보리가 없을 때. 


 빙수가 출근하고 구름이와 달래가 잠자느라 조용한 집 안에서 가만히 보리를 불러본다. 보리야, 하고 작은 목소리로 부르다가 문득 리보리! 하고 장난칠 때 보리를 부르던 것처럼 불러보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울음이 나지 않는 날도 있지만 가끔은 그러다 눈물이 나서 침대에 누워 보리를 부르다가 엉엉 운다. 


 보리를 보내고 하루 이틀은 조금 깨있으면서 울다가 그마저도 지치면 그냥 슬립에이드를 한 알 먹고 잠을 잤다. 빈 속에 잠 오는 약을 먹으니 약효가 기가 막히게 돌았다. 열두 시간쯤 자고 일어나서 멍하니 있다가 뭔가를 좀 먹고 그러다 또 눈물이 나면 울다가 또 약을 먹고 잤다. 삼일쯤 지나자 하루의 중간중간 일상에서 하던 일들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보리 생각을 하는 건 어려워서 하루에도 몇 번씩 보리 사진을 보거나 글을 쓰면서는 울음이 났다. 보리 생각을 하면서도 울지 않을 수 있게 된 건 일주일쯤 지나서이다. 하루를 온전히 울지 않고 지낸 날도 있다.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괜찮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괜찮은 순간들이 조금씩 생겨난다. 그러다가도 문득 시간이 더 많이 지나면 보리가 없는 삶이 익숙해질까 봐 그게 겁나서 또 운다. 


 보리가 없으면 어떻게 살까 싶었는데, 막상 보리가 떠나고 나니 보리가 없이도 살 수 있고 웃는 순간들도 생기지만 그건 보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는 때에만 가능한 같다. 순간순간 보리가 이 집에 없는데 찾으러 나갈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들면 앞으로의 삶은 그저 막막하고 남은 시간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지곤 한다. 

사진과 영상 속에서 보리는 너무나 보리답게도 느긋하거나, 귀엽거나, 멋있거나, 웃기거나, 예쁘거나, 버릇없거나 기타 등등 온갖 모습으로 생생해서 사진을 보고 있자면 웃음도 나오고 마음도 그리 아프지 않지만 다시 사진 앱을 끄고, 핸드폰 화면을 끄고 나면 이 집에 보리가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아프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언제나 사랑스러운 구름이와 달래가 천연덕스러운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 


 조금씩 괜찮아지는 것 같다가도 오늘 같은 날이 있다. 앞으로도 계속, 아마 할머니가 되어서도 꿈에서 보리를 찾겠고 다음날 조금 멍해지겠지. 엄마 꿈을 꾸고 난 아침처럼. 

그래도 보리가 희미해지지 않고 언제까지나 나와 빙수의 마음속에 생생했으면 좋겠다. 비록 그 때문에 더 자주 울게 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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