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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빅 Jan 10. 2019

중딩 아들 엄마라는 극한직업 (1)

# 01 식겁 ㅣ  뜻밖에 놀라 겁을 먹음


아이는 생후 24개월을 채운 후 당시 나의 회사안에 있던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다. 고사리 손으로 제 기저귀 가방을 핸드캐리 하던 등원길의 작은 어깨가 생각난다. 오랜만에 떠올려보는 바랜 추억이다. 아이의 뒷모습에 콧등이 시큰할 새도 없이 나는 발길을 돌려 출근을 재촉해야 했다. 우리는 그렇게 수년간 출퇴근을 함께 했다.


어린이집 생활이 익숙해질 무렵의 일이었다. 아이가 놀던 중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얼굴에 상처가 났다는 연락을 받게 된다. 하던 일을 팽개치고 응급실로 달려갔다.

상처가 깊어 봉합이 불가피하다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성형외과에서 선생님이 내려와 대기하고 있는데 어쩐 일인지 아이는 수면마취제가 잘 듣지 않아 재차 약을 투여했던 기억도 있다. 한동안 비몽사몽간에 버둥거리던 아이가 축 늘어지자 봉합용 바늘이 아이의 입 윗부분을 서너 차례 훑고 지나가는 것을 그저 무기력하게 멍한 눈으로 좇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 당사자는 잊었을지 모르나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선연히 남아 있는 봉합자국 때문에 매일 얼굴을 보는 우리는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다.

당시엔 몰랐다. 그 날의 사고가 향후 문턱이 닳도록 병원을 드나들게 된 포문이었다는 것을. 이후로도 어딘가가 부러지거나 찢어져서 정형외과를 특정하여 병원 문을 두드린 것만도 적지 않은 횟수였다. 초등학교 때는 아이의 담임 선생님들보다 학교 보건실 선생님과 더 친할 수 밖에 없었던 웃픈 상황이 연출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차이는 있겠지만 주위의 남자아이를 키우는 집들을 보면 대체로 비슷한 양상인 듯하다. 운동을 좋아하고 활동적 반면 조심성이 없다 보니 그렇지 않은 아이들에 비해 조금 더 병원 출입이 잦았던 것뿐.

집을 나서면 횡단보도 한번 건널 필요 없이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던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후, 이어서 배정받게 된 중학교는 통학을 위해 버스를 이용해야만 했다. 승하차 지점인 아이의 학교 정문 앞은 항상 차량 통행이 많았기 때문에 노파심에 입버릇처럼 아침마다 당부의 말을 건넸다. 천 번을 조심했다고 하여 행여 천한 번째라도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고 또 일렀다.






지난 초여름의 일이었다. 이전까지 정형외과 문턱을 드나들던 수준은 소소한 이벤트에 불과했음을 일깨워준 사고가 아이에게 일어났다. 큰 길에서 달리는 버스와 충돌했다는 연락이었다. 다 큰 아이의 사고 소식을 듣고 무슨 정신에 내달렸는지 지금도 설명하기 힘들다. 수시로 교통 통제가 이루어지는 대로변이라 때마침 근처에서 근무 중이던 교통경찰이 곧바로 달려왔다 한다. 차량으로 인근을 지나가다가 사고 현장을 목격한 아이 학교 선생님 한 분의 도움으로 단시간에 응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 또한 후에 전해 들었다.


아이가 실려온 곳은 근처의 대학병원. 십수년 전 좀처럼 마취가 안됐던 아이때문에 의료진들이 애를 먹었던 병원이며, 집근처이기도 하여 어른들이 수십년전부터 한결같이 왕래하시는 바로 그 병원이었다. 찰나와 같은 검사 시간에 뒤이은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던 속타는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응급실에서 12시간 넘게 버티다 나왔다. 감사하게도, 너무나 감사하게도 아이는 쇄골뼈 골절 외에 심각한 부상은 없었다. 가장 걱정했던 머리 쪽은 특이 소견이 없다고 했다. 정밀검사 후 일곱 시간가량 맘 졸이다 들은 말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에 걸쳐 타박상과 찰과상을 입었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일주일 정도 지나니 빠른 속도로 새살이 차 올랐다. 사고로 인해 놀란 마음이, 최근 몇 년 사이에 최고로 식겁했던 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되는데도 딱 그만큼의 시간이 걸린 것 같다.

사고 다음날 아이의 사고 영상이 담긴 블랙박스를 확보한 교통조사계 담당 조사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사고에 관한 기본적인 질의응답을 마친 후 웬일인지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머뭇거리고 있었다. 블랙박스 영상을 확인한 조사관또한 놀란 나머지 엄마인 내게 아이의 현재 상태에 대해 차마 묻기 힘들어 전화를 걸고도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더 보태셨다.   

"나중에라도 어머니께서는 사고 현장 영상은 안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얼마후 진술서를 작성하러 태어나서 처음 경찰서 출입을 하게 되었다. 나의 경험의 폭이 확장시켜주는 효자 아들이다. 사고 당시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발견하고 횡단보도를 건너던 아이와 충돌했던 광역버스의 순간 시속이 표시된 그래프를 확인했다. 시속 60km에 육박하는 속도였다. 이어서 내 앞에 내민 사고현장 촬영자료는 정면으로 볼 용기가 없어 고개를 돌렸다. 버스 앞 라이트가 깨어져 있었다고 했다. 결국 나는 물론이거니와 경찰서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애써 담담해하던 남편 또한 사고영상 확인을 거부, 아니 포기했다.  


머리를 비껴서 부딪히고 넘어진 것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두고두고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감사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을 듯하다. 평소 운동을 좋아하는 아이라 본능적으로 몸에 가해지는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자세를 취하지 않았을까 하는 근거없는 추측을 해보기도 했다. 아이는 사고 직후의 상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 순간 보이지 않는 선하고도 강한 힘을 가진 누군가가 아이의 눈을 가린채 번쩍 들어 안아 안간힘을 다해 안전하게 내려놓은 게 분명하다고 우리는 믿고 있다.

그 일 이후 앞으로는 정말 정말 착하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아이에게 반복하고 있다. 평소 같으면 뻔한 잔소리로 치부하고 반기를 들었을테지만 녀석은 그때만큼은 어떤 대응도, 수긍도 않고 듣기만 했다.  

놀란 마음이 지나간 자리에 온통 감사함이 들어찼다. 연일 제쳐두고 아이가 우선이었으며, 뭐에 홀린 것처럼 아이 입에 들어갈 음식들을 지지고 볶으면서 지냈다. 한 달여의 시간이 지나고 활동의 불편을 주었던 보조장치의 도움이 필요 없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녀석은 사고 전 일상에 가까운 모습을 되찾았다. 옆집 아이보다 조금은 더 심리적 격변을 겪고 있는, 딱봐도 내일없이 사는듯한, 나도 잘 모르겠는 ‘내안의 그놈’에게 시달리는, 중학교 2학년 남자아이의 모습으로.

그런 아이를 대하면서 나 또한 종전에 나의 모습으로 재빠르게 포지셔닝했다. 심연에서부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가 울대를 거치며 스크래치 창법을 장착한 뒤 이어서 육두문자를 장전, 녀석을 향해 속사포처럼 쏘아 올리는 바로 그 모습으로 말이다.

이때 옆에서 이런 둘을 보며 안절부절하는 남편의 모습이 의외의 관전 포인트랄까. 한 달 전 응급실에서 마음 졸이면서 그토록 바라 왔던 본래의 일상으로 다시 돌아왔구나!하는 안도의 마음 반, '아! 이 출구 없는 닮음 꼴 모자간의 팽팽한 배틀이 다시 시작됐구나!' 하는 탄식의 마음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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