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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빅 Oct 28. 2022

알자스 라이딩

프랑스 ㅣ 가을 한복판의 와인 가도를 달리다


"마누 아저씨가 쁘띠 바토로 산책시켜준다고 했는데 결국 못 했잖아요. 난 배를 타고 강으로 나가고 싶었단 말이에요.”


양볼이 벌겋게 달아오른 녀석이 자전거 페달에서 발을 떼며 말했다. 늦가을 찬 바람을 가르며 철 지난 포도밭을 신나게 내달린 직후였다. 생각할수록 억울함이 차올랐는지 붉으락푸르락 변하는 낯빛에서는 불편한 심기가 그대로 드러났다. 누가보든 원인 제공은 녀석의 일방적인 항변을 듣고만 있는 나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는 사실과 달랐다.


"엄마가 분명히 말을 했을 텐데. 오후에 자전거를 타기로 한 이상 아저씨와 로슈 강 산책하기로 한 약속은 지킬 수 없을 거라고 했고 너도 동의했잖아. 자전거를 선택한 건 너잖니"


스스로를 향한 생떼에 가까운 화는 갈 곳을 잃고 말았다. 녀석은 언제 그랬냐는 듯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늘 이런 식이다. 자신이 했던 말이 그제야 기억이 난 것이 아니라면 반나절의 라이딩으로 인한 피로감이 몰려든 탓일 수도 있겠다.






쁘띠 바토는 콜마르에 머무는 동안 지냈던 숙소의 주인인 임마누엘 아저씨의 보트 이름이다. 도착한 날 체크인을 마친 후 우리가 사용할 방갈로 곳곳을 소개하던 중 마누 아저씨(임마누엘 아저씨는 본인을 그렇게 부르라고 하셨다)는 방갈로 옆 강가에 이르자 몸을 낮춰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고는 보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일은 아저씨가 보트 투어 시켜 줄게. 함께 이 보트를 타고 쁘띠 베니스까지 산책을 나가자"


결국 우리는 떠나는 날까지 이 파란색 작은 배에 오르지는 못했다.






리크위르는 작은 마을이었다. 아기자기한 분위기에 집들의 색감도 콜마르보다 다채로웠다.






마을 초입에 들어서자 향긋하고 기분 좋은 단내가 코끝에 닿았다. 주범은 도처에 산재한 꺄브였다. 와인 향기에 휩싸인 골목을 걷기만 해도 좋았다. 꺄브 앞을 지나치기라도 하면 곧바로 공격해오는 달큼한 와인향에 그 누구든 백기를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새로 보틀링 한 햇와인을 맞이하기 전 그간 꺄브를 채우고 있던 묵은 와인과의 자리 교체가 필요할 터, 이를 위해 분주한 시기가 지금이었다. 사람들을 태운 와이너리 투어 차량이 마을 어귀에 속속 진입할 때부터 진작에 알아봤다. 그들 또한 지금이 피노그리 와인을 맛보기에 가장 좋은 시기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입면에 다양한 컬러를 입힌 건물 사이로 완연한 가을색으로 치장한 담쟁이넝쿨이 덮인 건물도 보였다. 그 자체로 완벽한 데커레이션이었다. 알자스 지역 여행의 적기는 온갖 꽃들이 만개하는 계절이 아니면 크리스마스 마켓 시즌일 것이다. 이에 이견은 없으나 가을 한복판을 지나는 와인 가도에 점점이 뿌려진 작은 마을들 또한 뒤지지 않는 매력을 뿜어낸다.


중심가에서 몇 걸음만 옮겨도 마을 외곽의 풍광을 확인할 수 있다. 건물 사이로 보이는 노랗게 물든 완만한 구릉에 멈칫했다. 올 한 해 작황은 어땠을까. 나름의 소임을 다한 뒤 안식에 접어든 황금빛 물결. 지는 해를 맞는 너른 포도밭은 많은 얘깃거리를 품고 있는 것만 같았다.






리크위르에 안녕을 고하고 출발지였던 콜마르로 돌아왔다. 녀석은 골목길을 쏘다니는 동안 처음 얼마간은 장단을 맞춰주는 듯했으나 이내 따분해하며 터덜터덜 뒤따라왔다. 나도 알고 있었다. 이쯤 되면 녀석은 많이 참아준 것이었다. 예쁜 색감의 집들과 가을색을 입은 포도밭 풍광은 나만 좋았을 뿐 녀석에겐 어떤 감흥도 주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제부턴 녀석에게 당근을 투여할 시간. 진작에 녀석은 콜마르에 도착하던 그날부터 눈여겨봐둔 기차역 옆 자전거 대여소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대여용으로 마련된 자전거는 성인용뿐이라 어린이용 자전거 수배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으나 직원의 수고로 아이에게 딱 맞는 자전거도 구할 수 있었다. 자전거를 손에 넣은 우리는 곧바로 목적지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콜마르 반경의 마을 중 유독 한 마을이 눈에 들었다. 지도상으로는 좀 전에 다녀온 리크위르보다도 더 작은 마을이라는 것도 끌렸던 요인 중 하나였다. 이날 오전 리크위르를 향할 때만 해도 예정에 없었던 잠깐의 라이딩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자전거 안장에 체중을 싣자 비로소 녀석의 얼굴에 다시 생기가 차올랐다. 리크위르의 골목을 쏘다닐 때 보이던 따분한 표정은 더 이상 없었다. 나는 아이 뒤를 따르며 내비게이터의 경로 안내 음성을 그대로 반복했고, 녀석은 나의 안내에 따라 핸들을 꺾으며 경로를 살피더니 이내 꽁지에 불붙은 듯 냅다 치고 나가버렸다. 다리에 힘을 실어 페달을 미는 녀석의 뒷모습이 그렇게 경쾌해 보일 수 없었다.


콜마르 중심가를 벗어나는가 싶더니 이내 시야가 탁 트였다. 우리의 목적지인 에기솅 또한 눈앞에 보이는 철 지난 포도밭 사이 어디쯤에 있겠지? 황금빛 포도밭과 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작은 마을 몇 개를 지나쳤고 수확이 끝난 옥수수밭도 제법 달렸다. 그리고 얼마 후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이 익숙해질 무렵 에기솅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만났다.






마을로 들어가기 전 초입에 있던 공원에 들러 간식을 먹으며 잠깐 쉬었다. 오랜만에 자전거를 탄 나는 두 다리를 위한 휴식이 필요했던 반면 녀석은 공원 옆 놀이터를 종횡무진하며 덜 풀린 몸을 깨우는데 여념이 없었다.  


시내만 벗어나면 길은 매우 단조로운 편이다. 콜마르에서 에기솅까지는 운동신경이 둔한 엄마와 자전거 타기에 익숙한 아이라면 어렵지 않은 난도인 것은 맞다. 다만 콜마르 시내 주행 시 그리고 교차로나 군데군데 차로를 이용해야 하는 지점에서는 주의가 필요하다.





짧은 해가 채비를 서두르고 늦가을의 한기가 찾아들 무렵 손바닥만 한 미로와도 같은 에기솅의 올드타운에서 헤어 나왔다. 되돌아오기 위해서 이번에는 반대로 얕은 산 아래 펼쳐진 포도밭을 왼쪽에 두고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동행을 만나 한결 수월한 라이딩이 되었다. 무엇보다 핸들을 잡자마자 도파민 상승을 보이는 녀석의 완급 조절을 도와준 이가 있어 시시때때로 녀석을 향하는 나의 샤우팅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점이 달랐달까.


급조된 팀의 리더는 만성절 휴가를 알자스 일원에서 보내는 중이라는 4인 가족의 가장이 맡았다. 누가 보아도 여행자이고 초행길인 게 뻔한 우리에게 자신들도 또한 길눈이 매우 어두운 초보 라이더임을 고백한 가장을 비롯한 친절하고도 유쾌했던 그의 가족들 덕분에 심심하지 않게 라이딩을 마쳤다. 폰은 고사하고 지도 하나 없이 초행길을 달려온 그들과 비교하여 그나마 내가 나았던 게 한 가지 있었다면 속도는 형편없을지언정 필요할 때마다 구글맵 확인이 가능했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가던 길을 되돌아와 뒤쳐지는 나에게 걱정 어린 핀잔을 날리던 좀 전과는 달리 녀석은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나를 챙기는 제스처조차 없었다. 나의 속도는 안중에도 없고 파리에서 온 가족들과 같이 빠르게 가을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시선강탈, 색감 깡패, 여심 저격 마을 등의 미사여구는 녀석과는 무관한 것들이었다. 엄마와 둘만의 여행 중 오로지 이날 하루는 '자전거를 탔던 날'로만 기억될 테니까.

보트 투어는 물거품이 되었고 라이딩을 마친 우리는 해가 완전히 떨어진 후에야 숙소에 돌아왔다. 마누 아저씨는 주말 오후까지도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건축가인 그는 콜마르 시내에 새로 들어서게 될 레스토랑 오픈 준비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 중이라고 했다.


오로지 신나게 자전거를 탄 장면만 도려내어 기억에 탑재한 녀석은 정작 우리가 내달렸던 그곳이 어디였는지 여전히 알지 못한다. 그저 당시에 손에 쥔 두 장의 카드 가운데 자전거를 선택함으로써 기회를 가지지 못한 쁘띠 베니스 뱃놀이를 아쉬워할 뿐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놀이에 열중하는 와중에도 다음 놀거리를 궁리하는 녀석이다. 11살을 채운 사내아이들은 대개 그렇다. 양손 가득 사탕을 움켜쥐고서도 미쳐 집어 올리지 못한 남은 사탕을 향해 미련을 뚝뚝 흘리는 모양새에 다름 아니다. 아이들은 한정된 놀이 시간을 최대치의 고효율로 채우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하여 열심히 논다. 극강의 몰입도로 그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도 놀이를 갈구하며 놀이에 목말라하는 게 아이들이다.


긴 말을 싫어하는 녀석은 아빠를 서울에 둔 채 엄마와 단둘이 여행한 소회 혹은 가장 기억나는 것에 대한 물음이 날아오면 문장이 아닌 세 단어로 갈음하곤 한다. 놀이터, 축구 그리고 자전거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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