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든버러 ㅣ 평화로운 바다 위 펑키한 아일랜드라니
녀석은 잠에서 쉬이 헤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외출 준비를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에 머쓱해진 우리는 아이 깨우는 걸 단념하고 침대에 걸터앉아 곤히 자는 그의 곁을 지켰다. 시간이 제법 흐른 후에야 늦은 아침을 먹기 위해 객실을 나섰다.
에든버러에서 우리가 머문 호텔은 과거에 기차 역사가 있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당시에는 소위 잘 나가는 기차역의 경우 트렌드에 뒤질세라 역사 위에 호텔 정도는 얹어주는 게 기본이었다. 영국의 흥망성쇠와 궤를 같이 하면서 부침을 거듭했을 해당 기차역은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없다. 지금은 유명 호텔 체인의 식구가 되어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데, 리모델링에 들인 돈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호텔 메인 홀이라 할 수 있는 높은 천고의 라운지에 들어서면 그 옛날 역사 내부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고풍스러운 호텔에서의 느긋한 아침 식사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오늘 밤 웨이벌리 역으로 달려가 런던행 슬리퍼에 오르면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런던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다.
아침 식사를 마칠 무렵 에든버러에서 마지막 날을 어떻게 보내면 좋을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 하루는 올드타운을 벗어나 보는 게 어때?"
스코틀랜드의 수도인 에든버러는 영국에서 런던 다음으로 많은 여행자들이 찾는 도시로 알려져 있다. 중세 도시의 외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로열마일로 대표되는 올드타운은 에든버러 여행의 시작이자 끝이다. 세월의 더께를 얹은 고색창연한 거리를 느린 걸음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 누구나 하루 이틀 만에 거리 곳곳이 손바닥 안처럼 훤히 박힐 것이다.
지난 며칠간 시티 곳곳을 누비며 알아챈 사실이 한 가지 있다. 시간이 갈수록 여행자들이 밀려오는 속도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는 에든버러 페스티벌의 오프닝이 임박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난 수일 동안 매끈거리는 포석이 깔린 로열 마일을 오가며 쉼 없이 발자국을 남긴 우리는 오히려 축제를 앞둔 달뜬 분위기의 도심에서 잠시 떨어져 보는 것을 택하였다.
시티에서 멀지 않으면서 잠깐의 산책이 가능한 에든버러 근교의 마을을 물색해보기로 했다. 대개 이런 류의 즉흥적인 결의에는 한 줌의 모험심과 더불어 일차원적이면서도 직관적인 방법을 통하는 게 제일이다. 디저트 접시를 무르고 테이블 위에 휴대폰을 놓은 다음 머리를 맞대었다. 그리고 현재 위치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려보았다. 차츰 원의 크기를 키워가던 중 마음이 가는 지명이 눈에 들어왔다.
목적지는 쉽게 정해졌다. 크래몬드. 숙소 앞에서 버스에 올라 북서쪽으로 얼마간 달리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곧바로 밖으로 나가 버스에 올랐다.
출발지에서 멀어질수록 거리 풍경도 차츰 달라졌다. 시티의 분주함과는 대조적으로 한산한 거리를 따라 아담한 코티지들이 늘어서 있는 마을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는 마을길을 벗어나 키 큰 고목이 빼곡한 숲의 초입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숲 속으로 난 산책로로 접어드니 오솔길과 나란한 강줄기가 크래몬드를 처음 방문하는 여행자의 동행이 되어 주었다.
좁은 오솔길을 걷고 있자니 마을 사람들이 왕왕 눈에 띄었다. 운동복 차림의 러너들은 우리 곁을 빠르게 지나쳤고, 반려견을 대동한 이들은 걸음부터가 느긋했다.
차츰 물소리가 커지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에 시원한 물줄기가 나타났다. 낙차가 그리 큰 폭포는 아니었지만 소리는 생각보다 요란했다. 본격적인 크래몬드 산책은 이 크래몬드 폭포가 시작점이었다. 지도상으로 이 폭포에서 바다와 맞닿는 강의 하류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크래몬드 폭포를 배경으로 일부만 남은 석조 잔해들이 보였다. 과거 어떤 용도로 쓰였던 건물일까. 해답은 또 다른 안내문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1700년대 후반부터 해외에서 들여온 철을 이용해 각종 철물을 제조하던 공장 부지였다. 그 옛날 크래몬드 산업혁명의 심장부 역할을 했을 이곳은 한때에는 풀무질 소리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경영난과 더불어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 그에 더하여 현대화된 시설에 밀리면서 폐허와 같은 지금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는 설명이 그림과 함께 덧붙여져 있다. 물가에 있던 철물 제조공장은 담금질 공정에는 최적이었을지 모르나 마치 양날의 검처럼 홍수에 의해 반격을 맞게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석조 잔해는 지난 200여 년 세월의 부침의 흔적이었다.
폐허가 된 건물 여기저기를 살피던 아이는 잔해 틈새에 붙어있는 커다란 우렁이 한 마리를 발견해내고는 기어이 그의 곤한 단잠을 깨우고 말았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세상모르고 잠에 취해있던 자신의 모습과 다름 아니었을 텐데. 낮잠을 즐기던 우렁이는 별안간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녀석은 그런 우렁이를 손바닥 위에서 한참을 데리고 놀더니 처음 발견한 곳에 놓아두었다.
강가에서 신이 난 듯 물놀이를 즐기다 밖으로 나온 강아지가 세차게 물기를 털어낼 기세를 보이자 우리는 서둘러 뒤로 한걸음 물렀다. 집채만 한 대형견이 떠난 텅 빈 벤치에 앉아 귀를 때리는 폭포 소리 들으며 한동안 시간을 보내다 다시 몸을 일으켰다.
바다로 향하는 산책로를 따라 내려가다 보니 볕 좋은 테라스가 있는 카페가 눈에 띄었다. 버스에 오르기 전부터 목이 마르다고 노래를 불렀던 녀석이 반색을 하며 카페를 향해 냅다 달렸다. 크래몬드 폭포 카페. 군더더기 없는 직관적인 네이밍.
카페의 테라스를 차지한 이들은 대부분 산책 나온 동네 주민들이었다. 살가운 인사와 더불어 내내 밝은 에너지를 지닌 카페 주인과 테이블을 지키는 이들 사이의 격의 없는 분위기가 편안했다.
카페에서 원하는 만큼 목을 축인 녀석은 한결 기분이 좋아졌는지 길안내를 자처하며 앞서 내달렸다. 바람을 타고 바다내음이 느껴지는 듯했다. 점차 숲이 뒤로 밀려나자 탁 트인 하늘이 시야에 들어왔다. 크래몬드 보트 클럽이라는 안내판이 보였다. 요트 정박지가 보인다는 것은 바다에 다다랐다는 뜻이다.
대체적으로 스코틀랜드의 날씨는 잉글랜드의 그것보다 고약했다. 체감적으로도 그랬다. 그래서였을까, 맑은 하늘이 반가웠다.
"아이스크림 트럭의 아르바이트 누나는 정말 친절하고 예뻤어요"
한 손에 초콜릿 아이스크림 콘을 치켜들고는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표정으로 달려오는 녀석의 첫마디였다. 아르바이트 누나를 볼 수는 없었으나 아이스크림 카의 귀여운 외관은 확인할 수 있었다.
크래몬드 비치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사진에 보이는 인상적인 콘크리트 기둥이다. 독특한 구조물은 2차 대전 당시 잠수함 항행과 관련된 일종의 방어 장벽이라고 한다. 독특한 구조물과 어우러진 근사한 일몰 때문에 출사 차 크래몬드 비치에 방문하는 이들도 많다.
하루에 두 차례 바닷길이 열리는 간조에는 잠겨있던 길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때는 길을 따라 앞에 보이는 크래몬드 아일랜드를 걸어서 오갈 수 있다. 우리가 크래몬드 비치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1시 전후였는데 그때는 이미 물이 서서히 차오르고 있었다. 8월의 경우 오전 8시 20분부터 약 네 시간, 그리고 오후 8시 40분부터 네 시간가량이 섬까지 오고 가기에 안전한 시간대라고 적혀 있었다.
크래몬드 비치 앞에는 두 달 단위로 일별 간조 시간이 안내되어 있다. 해안가에서 섬까지 도보 이동 가능한 안전한 시간대가 가이드되어 있으니 섬이 궁금하다면 간조 때를 맞추면 된다.
크래몬드 아일랜드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top 10에도 이름을 올린 섬이라고 한다. 밖에서 보는 풍광 못지않게 섬 내부에도 특별한 무언가를 지닌 것일까.
국제 페스티벌이 열리는 8월 한 달 내내 에든버러 시티만 들끓고 있는 건 아니다. 이 조용한 마을에서도 해마다 여름이 되면 아주 특별한 이벤트가 열린다고 한다. 매년 8월에 열리는 펑크 페스티벌이 그것인데 개최 장소가 다름 아닌 앞에 보이는 크래몬드 섬이다.
하루에 두 번, 허락된 시간에만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망망대해 한복판 외딴섬에서 취향을 공유하는 이들끼리 함께하는 페스티벌이라니. 사람들의 외양에서 이미 축제의 정체성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축제 안내문에는 어린아이도, 반려견 대동도 기꺼이 환영한다 하지만 우연히 페스티벌 영상을 본 적이 있는 내게 묻는다면 반려견은 모르겠으나 아이들 동행은 적극 말리고 싶다.
우리는 물이 차올라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때까지 다가갔다가 크래몬드 아일랜드를 뒤로하고 해안가로 발길을 돌렸다.
크래몬드 비치에 오면 탁 트인 해안가를 따라 여유로운 산책은 가능하다. 그에 반해 거친 자갈과 수질로 판단하건대 물놀이가 가능한 여건은 아니다. 이 해변에서의 산책이 일상일 댕댕이들만이 바다를 들락날락하며 비치를 즐기는 모습이다.
배우자의 손을 꼭 잡은 채 해안가를 거니는 이들이나 아이들 혹은 반려견을 대동하고 산책을 즐기는 이들 가운데 어느 누구 하나 바쁜 걸음은 없다.
크래몬드에는 낮은 담장의 아담한 코티지, 장난감 같은 소형차, 친구 같은 반려견 그리고 시간 부자인 그 집에 사는 사람들. 그뿐이었다.
현재의 소소한 행복은 외면한 채 손에 잡히지도, 그렇다고 담보되지도 않은 보다 반짝거리는 무언가를 쫓아 질주하듯 삶을 소모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문득 나 자신에게 그리고 내 옆에 걷고 있는 남편에게도 물음을 던져본다.
통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를 나누는 아빠와 엄마를 더는 참을 수 없었던 것인지 혹은 밀려오는 허기를 참을 수 없었던 것인지 해안선 끝까지 걸어갈 작정이냐며 아들 녀석이 제동을 걸어왔다. 녀석의 불만 섞인 아우성이 귓전에 닿을 즈음에서야 우리는 해안가를 벗어나 주택이 늘어선 거리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에든버러 시티로 되돌아가는 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식당부터 찾았다.
마을 사람들의 사랑방과 다름없는 공간이었다. 실내 석을 권했으나 볕이 좋아 건물 뒤편의 비어 가든에 자리를 잡았다. 꽤나 넓었던 뒤뜰에는 화창한 하늘 아래에서 삼삼오오 맥주잔을 놓고 햇볕 샤워 중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피시 앤 칩스가 놀랄 정도로 정도로 썩 괜찮았다. 단맛이 도는 칩스에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많이 마시는 맥주 중 하나인 테넌츠를 곁들였다.
누가 봐도 이방인임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우리에게 다가와준 동네 주민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생각지도 못했던 조앤 롤링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과거 해리포터 시리즈 탈고를 마친 그는 당시 살던 집을 처분한 후 이곳 크래몬드에 있는 한 트리하우스를 구입했다고 한다.
해리포터를 집필한 장소로 널리 알려져 해리포터 팬들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관광객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시티의 카페에서 조앤 롤링을 마주칠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매우 희박하다.
반면에 크래몬드의 바닷가에서 혹은 동네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빵집이나 카페에서 뜻하지 않게 그를 마주치는 성덕이 될 가능성이 훨씬 높지 않을까. 나 또한 실제로 빵집 입구에서 우연히 그를 맞닥뜨리는 즐거운 상상을 해 보았다.
크래몬드 비치는 조용하고 한적했다. 짧은 일정으로 에든버러에 머무는 일반적인 여행자의 관심까지 끌어낼 만큼의 매력이라? 글쎄 잘 모르겠다. 물론 당신이 펑크 락의 신봉자이거나 해리포터 덕후임을 자처한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만일 둘 중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지만, 다만 평화로운 바다만으로 이미 충분하다고 여기는 누군가가 있다면 나는 그에게 어서 크래몬드로 향하라고 말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