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정오가 되어서야 거리로 나왔다. 숙소가 위치한 레알Les Halles에서 출발해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즐비한 호지에 거리Rue des Rosiers를 지나 바스티유 광장Place de la Bastille까지. 볼거리가 차고 넘치는 마레지구Le Marais를 횡단하는 데엔 늘 그렇듯 예상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여름의 정중앙을 관통중이던 그날의 파리는 선물처럼 완벽한 날씨라 할만했다. 적어도 그 그림 속에 내가 들어가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그렇다는 얘기다! 정수리에 내리 꽂히는 햇살이 과하다고 느껴질 즈음 남편과 아이의 입에서도 슬슬 원성이 새어 나왔다. 나는 내내 쉴 수 있는 목적지가 코앞에 있노라 그들을 부추기며 때론 달랬다.
직전에 시간을 보냈던 한가롭고 평화로운 보주광장Place des Vosges이 왕의 명을 받아 지어진 완벽한 아름다움의 표상이라면, 다음 행선지인 프롬나드 플랑테Promenade plantée는 오래전 운행이 중단된 고가철도가 있던 자리를 선형 공원으로 꾸며 시민들에 내어 준 휴식공간이다. 바스티유에 온 이상 이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생 마르탱 운하Canal Saint-Martin도 아울러 들러볼 요량이었다.
우리는 프롬나드 플랑테 방면으로 가기 위해 바스티유 광장에서 남쪽으로 꺾어 얼마간 걸었다. 당시 무엇에 대해 그토록 열을내며 대화를 이어나갔는지 더는 알 수가 없지만 끝 간 데 없는 이야기에 빠져 줄곧 직진만 하며 한참을 걸었던 모양이었다. 모두가 동시에 싸한 느낌이 엄습했던 순간이 있었다. 그제야 구글맵을 확인해 보니 예상대로 우리의 현재 위치는 목적지에서 한참 벗어난 상태였다.
지나온 길을 되짚어가는 것 만큼 힘빠지는 일은 없다.좀 전과 다르게 해를 정면으로 받아내면서 걸었던 우리의 입과 더불어 두 다리 또한 묵직해지고 있었다. 비로소 짧은 물음을 불쑥 내뱉으며 침묵을 깬 것은 남편이었다.
"아까 당신이 찾던 산책로라는 게 혹시 이 길 아냐?"
"그럴 리 없어... 프롬나드 플랑테는 경의선 숲길처럼 옛날 철도 부지 위에 지어진 고가 공원이거든..."
대답하는 나의 시야에 파스텔톤의 화사하고 예쁜 집들이 나란한 작은 거리가 들어와 버렸다. 곧이어 두 다리가 이끄는 대로 눈앞의 골목으로 들어섰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들어선 골목은 크헤미유 거리Rue Crémieux라 했다.
당초 목적지라고 언급했던 생 마르탱 운하 그리고 가로수 산책길이란 뜻의 프롬나드 플랑테와 이 곳을 꼭짓점 삼아 연결하면 작은 역삼각형이 된다. 지척에 있다는 뜻이다. 위치적으로 크헤미유 거리는 바스티유 광장보다 리용 역에서 가깝다.
저마다 다른 파스텔톤의 컬러가 돋보이는 집 앞에는 높낮이가 다른 식재 화분들이 여름 햇살을 받고 있었다. 특히 올리브 나무를 둔 집들이 많았다.
자연스러운 수형의 올리브 나무들을 보니 남프랑스 어디쯤이 연상되었다. 뜨거운 여름날의 컬러풀한 외관이 나란한 집들은 이곳이 파리 중심부가 아닌 쿠바의 어느 골목인 듯 잠시 착각도 일었다. 정통 타운하우스들이 자리하고 있는 이 골목은 좁고 짧지만 유니크함이 살아있다.
개성 있는 파사드의 집들과 그곳에 사는 이들이 가꾸는 식물이 어우러진 모습에 눈이 즐거운 것은 분명하다. 충분히 인스타그래머블한 매력의 골목은 맞으나 지나쳐온 다른 스팟에 비한다면 붐비는 편은 아니었다.
골목의 끝 지점에 도착해서야 안내문을 보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사진과 영상 촬영에 주의를 기울여달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실제 주거공간이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가이드라인만 주어지고 강제적으로 제지하지는 않는 분위기인 걸 보니 거주민들을 위한 배려가 더 필요해 보였다.
일단 방문하게 된다면 셔터 소리와 소음 그리고 현관 앞에 앉거나 머무르는 일이 없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특색 있는 골목은 늘 그러하듯 평온함을 갈구하는 주민들과 구경을 위해 유입되는 사람들 사이의 아이러니가 서려있는 듯하다.
컬러풀한 여름 한낮의 골목은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활력보다는 짧은 이 골목을 지나며 흔적을 남기려는 여행자들의 걸음만 분주했다. 마치 테마파크에 온 듯한 혹은 비어 있는 집 앞에 인위적으로 데커레이션을 해 놓은 느낌이 언뜻 스치기도 했다. 때는 여름 한복판이었기 때문에 '바캉스의 민족' 답게 집을 떠나 기나긴 여름 휴가를 보내고 있을 터였다.
이 날의 우리처럼 우연히 마주한 경우가 아니라면 동선을 벗어나 일부러 찾아올 필요까지는 없을 듯싶다. 바스티유 광장이나 생 마르탱 혹은 마레 지구나 라탱 지구 근처라면 잠깐 건너와도 좋겠지만.
만약 크헤미유 거리에 들러 꼭 사진을 남기고 싶다면 아침에 일어나 쨍한 햇볕을 확인한 후 곧장 달려올 것을 권한다. 아마도 엑스트라 없는 인생 샷이 가능할 것이다.
파리 한복판에서 길을 헤매다 또 다른 파리를 만난 날로 기억하고 있다. 어떤 마법에 이끌려 이토록 다채롭고도 인상적인 거리를 만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니 파리를 단연코 원톱의 매력 부자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