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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탄재 Jul 02. 2022

ㄴr는 가끔 눈물을 흘린ㄷr

너른 빈터에서 이불을 덮습니다. 조만간 찰 것 같긴 하지만.

※사실 이 글은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를 읽고 지극히 사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쓴 독후감입니다. 


 습관적으로 불평불만을 뱉어내고 있으면 주변 사람들과 가끔씩 "그럼 하고 싶은 게 뭐냐"라는 주제로 대화를 하곤 하는데, 나는 항상 '글쓰기'라고 대답을 해왔던 것 같다. 맞춤법도 잘 틀리는 마당에 무슨 글이냐 싶겠지만, 꽤 오랜 시간 수줍은 작가 지망생의 태도로 살아왔다. 그런데 왜 쓰고 싶은지, 어떤 걸 쓰고 싶은지 물어보는 후속 질문은 없었다. 왜 쓰고 싶은지를 충분히 맵게 설명하지 못했다.  


"바람의 맛을 표현해 보고 싶습니다."


 또 사춘기 직장인이 하루키 컨셉 잡고 앉았네라고 한마디 하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것이 사춘기라면 또 받아들여야 한다는 마음으로 온전히 이불 킥을 준비해 보련다.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느낀 바람의 맛

 대학 시절 우연한 기회에 영화 현장에서 막내로 일을 한 적이 있다. 현장에서 주로 간식 테이블을 세팅하고 짐을 옮기는 허드렛일을 했는데, 고참 스태프들 옆에서 대기하면서 바로 심부름을 해 드려야 했기 때문에, 항상 고참들의 동태를 살피며 '존재는 알리되, 보이지 않게' 생활해야 했다. 지방 촬영이 대부분인 현장이었기 때문에 숙소 생활까지 생각하면 고참들과 대부분의 하루를 붙어서 함께 지내야 했다. 

 그렇게 몇 달을 지내다가 진급 비슷한 것을 해서 서울로 필름(!)을 배달하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현장에서 찍은 필름을 받아 서울에 있는 현상소까지 배달을 하는 꽤 중요한 역할이었다. 배달 사고가 나면 하루치의 촬영분을 날리는 것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수면 시간이 보장되는 자리였다.

 남들이 모두 현장에 나가 일을 하고 있을 때 필름을 기다리며 모텔방에 있는 시간이 좀 어색해서 밖으로 나와 담배 한 까치를 꼬나물었을 때, 한 줄기 바람이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바람이 어떤 맛인지 느껴졌다. 계절 특유의 냄새랄까? 생활감이 느껴지는 할머니 집 냄새랄까? 그동안 맛보았던 공간의 냄새와는 약간 다른 그 맛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골똘히 생각하며 한참을 앉아 있었다.


알량하지 않은 일정과 마음의 여유를 가져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많은 스태프들이 고생하며 만든 그 영화는 결국 잘 되지 않았다. (다들 잘 지내시죠?) 나 또한 생계를 위해 (다행히!) 취직을 했고 시간이 많이 흘러 어떻게 이 자리에 앉게 되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직장생활을 하는 내내 의도적으로 그 바람의 맛을 느껴보기 위해서 계속 노력해왔다는 것이다. 어렵게 시간을 내어 같은 장소에 가본 적도 있지만, 그 순간 그 맛은 어디서도 다시 느낄 수 없었다.
 이제는 이 바람의 맛을 표현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희미해졌지만, 잠깐의 찰나에 느꼈던 바람이 나를 계속해서 어디론가 끌고 왔다고 생각한다. 영화인 지망생, 몇 년간의 해외 살이, 그리고 두 아이의 아빠까지 십수 년간 아이덴티티를 바꾸며 달려오는 내내, 몇 번의 계절을 겪으며 이 바람의 맛을 글로 표현해 보고 싶었다.
 내가 재능이 모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나에게 허락된 알량한 며칠간의 휴가와 어디론가 떠나도 사무실에 두고 온 마음 때문에 시작을 못했다고 핑계를 댄지도 시간이 꽤 흘렀는데, 얼마 전 큰 마음을 먹고 육아 휴직을 시작하면서 글쓰기 단련을 못하는 핑곗거리가 없어졌다.


 바람의 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그 소리를 되짚어 나가는 과정을 기록해 두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며 우선 책장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책을 읽을 때 뭔가 단서가 될만한 것들은 마크를 해두는 편인데, 마크만 해두고 한 번도 다시 돌아보지 않은 책들이 마음에 걸렸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그 자리에서 곱씹어 보지 못했지만, 어떤 마음으로 구절을 체크를 해두었는지 생각해 낼 수 있다면 아마도 바람의 맛을 느낄 수 있는 미뢰 세포들이 살아나지 않을까?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중

"... 자연을 찬탄한다는 관념 자체는, 빙하나 사막이나 폭포 앞에서 종교적인 경외심을 느낀다는 것은, 우주의 힘에 비해 인간이 왜소하고 미약한 존재임을 느끼는 것과 관련이 깊다. 달이 아름다운  우리가 그곳에 다다를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바다가 장엄한 것은 우리가 그곳을 무사히 건넌다는 확신을 절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심지어 꽃을 보는 즐거움도 그런 식의 신비감이 있기에 가능하다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자연에 대한 인간의 힘이 점점 커져가고 있다. 원자탄을 쓰면 우리는  그대로 산을 옮길  있다. 심지어 극지방의 빙상을 녹이고 사하라 사막에 물을 댐으로써 지구의 기후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스윙 음악보다 새소리를  좋아하는 데에는,  지표면을 인공 태양등이 넘치는 '아우토반'망으로 덮어버리기보다 여기저기 야생 지를  남겨뒀으면 하고 바라는 데에는 어딘가 감상적이고  계몽적인 구석이 있는  아닌가?

이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건, 인간이 물질세계는 탐사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탐사는 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 때문이다. 행락이란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 중 상당수는 의식을 파괴하려는 노력일 뿐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필요한 건 무엇인가, 인간이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면 인간으로서 잘 산다는 것이 단순히 일을 하지 않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전등 아래서 녹음된 음악만 듣고 사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만이 다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인간에겐 온기가, 사회가, 여유가, 안락이, 안전이 필요하다. 또 고독도, 창조적인 작업도, 경이감도 필요하다. 그런 걸 알게 되면 인간은, 언제나 어떤 것이 자신을 인간적으로 만드는지 비인간적으로 만드는지의 기준을 적용하여 과학과 산업화의 산물을 선별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지고의 행복이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고, 포커를 하고, 술을 마시고, 사랑을 나누는 것을 한꺼번에 하는 게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울러 삶이 점점 더 기계화되는 현실에서 민감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본능적인 공포가, 옛것을 선호하는 감상적 취향에 불과한 게 아니라 십분 정당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삶에서 단순함의 너른 빈터를 충분히 남겨두어야만 인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의 수많은 발명품들은 인간의 의식을 약화시키고, 호기심을 무디게 하며, 대체로 인간을 가축에 더 가까운 쪽으로 몰아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너른 빈터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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