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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이형 Jan 09. 2016

우리는 추억을 먹고 산다

삶이 주는 다양함에 대해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 노래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이별을 노래하는 구슬픈 가락에 이 말이 이별의 아픔을 한층 더 심화시키고 있다. 연인과 함께 했던 추억이 다른 의미로 기억되기에 이별의 강도가 다르고 슬픔도 다른 것이다.


개인마다 사건을 다르게 보는 시각이 있다는 전제를 해석학이라 한다. 해석학은 객관을 부정한다. 대신 주관을 당연한 것으로, 그리고 더 지향해야 할 것으로 바라본다. 해석학에서 정답은 없다.


정답주의가 만들어낸 획일화된 사고방식이 팽배한 우리 교육에서 해석학은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어낸다. 누군가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만드는 교육 본연의 작업에 집중하도록 하는 것이다. 수능이라는 정답과 오답만 존재하는 시험을 통과하는 아이들에게 자기 생각은 불필요하지만 각자 갖고 있는 경험과 인식으로 자기 생각을 만드는 기회를 많이 가진 아이들은 다양성이 주는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다.


교육이 획일적이라고 우리가 모두 로보트처럼 획일적으로 사는 건 아니다. 해석학이 주는 풍요로움은 우리의 기억에 이미 존재한다. 우리는 같은 경험을 하더라도 거기에 대한 각자의 기억이 다르다. 게다가 거기에 부여하는 의미도 제각각이다. 예를 들어, 시험을 본 후 똑같이 1개를 틀리더라도 매우 기분이 좋은 아이가 있는 반면 망했다며 절망하는 아이도 있다. 수학여행을 다녀온 후 좋은 기억으로 며칠 간 친구들과 수다 떨 소재로 사용하는 아이가 있지만 같이 논 친구들과도 얘기를 중단하는 아이도 있다. 같은 수업을 듣더라도 이해의 정도가 다를 뿐만 아니라 수업의 재미에 대해서도 다르게 인식하기에 배움은 다르게 적힌다.


그런데 각자 다르게 인식하는 게 왜 풍요로움이 되는가? 그건 단지 전체적인 시각에서의 다양함이 존재할 뿐, 흔히 말하는 부정적인 인식에는 풍요로움은 없는 것으로 보이는데 말이다. 시험에서 백점을 맞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으로 살아가는 아이는 사실 풍요로움보다는 곤궁함이 더 어울린다. 작은 실패라도 모두 자기 존재의 실패처럼 크게 받아들이는 이에게는 실패는 좌절일 뿐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자. 삶에는 희노애락이 있다. 난 이것들이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삶은 풍요롭다고 전제할 수 있다고 본다. 올라가면 내려가는 때가 있고 내려가야 다시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앞의 글, 삶과 죽음의 역설에서 말한 것처럼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공존하기에 역설의 가치가 있다. 희노애락에서 우리는 희와 락을 더 좋아하지만 노와 애가 없다면 희와 락도 사실상 없는 거나 다름없다. 이렇듯 긍정과 부정이 함께 할 때 비로소 풍요로움이 만들어질 수 있다.


난 여기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상황들을 근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물론 우리의 해석 체계는 외부로부터 자신을 좋지 않게 바라보는 지속적인 유입에 의해 부정적으로 형성되는 측면도 있다. 그래서 작은 실패도 큰 좌절로 생각하는 경향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사건을 해석하는 건 우리의 인식만이 아니다. 감정이 인식보다 선행한다. 그러니까 슬픔은 우리의 인식을 따라간다기보다 인식보다 앞서 느끼는 것이다. 여기에 인식, 즉 해석이 뒤따르면서 감정이 억압되거나 다른 감정이 덧붙여지거나 기존 감정이 증폭될 수 있다. 인식이 해석하고 감정이 추가되는 과정이 너무나 자동적으로 빠르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내 주장은 감정과 해석체계가 어찌되었든 일단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위에 나온 가사처럼 이별이 너무도 애절하게 다가와 마음을 후벼파는 아픔이 있더라도 난 왜 이리 느낄까 분석하거나 고치려고 하지 말고 수용하자는 것이다. 아픔이 애잔하게 마음에 남아 우울증에 걸릴 것 같더라도 부정하거나 피하는 것보다는 직면하는 게 좋다.


내가 고찰한 바로는 직면하여 그대로 느낄 때 감정은 자신의 존재를 알아준다 여기고 점차로 에너지가 약해지는 것 같다. 감정을 부인할 때 그 에너지는 점차 커지는데 이것은 해석체계에 상당한 영향을 주는 방식으로 이루진다. 즉, 감정이 자신의 존재를 더욱 드러내려고 하면서 자꾸 격해지는 것이다. 분노나 슬픔이 그렇다. 부정하면 커지고 인정해주면 이들은 약해진다.


또한 각 상황은 어느 순간 우리의 기억에 적히고 과거가 된다. 즉 추억으로 남게 된다. 추억은 우리에게 영양소가 된다. 삶이 다양하다는 걸, 희노애락이 있을 때 풍요로워진다는 걸 깨우쳐주는 영양소이다. 그리고 추억으로 바뀔 때 우리는 여기에 새롭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입은 듯한 이별의 아픔은 시간이 흘러 추억이 되고 그때 우리는 사랑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고 사람을 수용할 능력이 커지게 된다. 삶의 위대함을 경험하게 된다.


추억이 다르게 적힐 수 있기에 다양함이 생긴다는 점도 좋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 해석을 절대적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그게 아님을 압증하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내 것이 항상 옳지 않다는 건 다른 사람의 해석이 나와 다를 때, 즉 보는 시각이 다를 때 가능해진다. 물론 '그건 네 해석이지' 하면서 거부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서로의 해석을 존중해주지 않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이지 해석이 다름으로 인해 생기는 다양함의 유익을 부정하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또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건 우리의 시야가 좁으며 한계가 있음을, 그래서 인간은 유한하며 언제나 헛점이 있음을 인정하는 겸허함을 창조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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