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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이형 Jan 29. 2016

낯섦과 친해지기

익숙한 세계의 껍질 벗기

인간은 적응이라는 놀라운 기제를 갖고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낯선 환경은 생존의 문제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엄마를 찾고 젖을 물면서 적응한다.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낯섦은 우리에게 예고없이 다가온다.


생각해보면 낯선 환경은 새로운 경험의 기회이다. 아이는 새로운 걸 보면 신기해하고 해보고 싶어한다. 그러면서 뭔가를 배운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낀다. 이런 과정은 자기를 열어 확장하는 고통이 수반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꾸준히 하면서 체화시켜나간다. 물론 몇번 하다가 금방 포기하는 모습도 있다. 하지만 그러다 다시 도전하는 모습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이런 시절에는 익숙함이 오히려 지루함이다. 그런 모습을 보면 낯섦이 배움의 원천이 된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낯섦은 언제부턴가 불편함이 된다. 새로운 건 두려움이고 피하고 싶은 대상이 된다. 경험의 폭을 넓히는 신나는 기회가 아니라 적응하면서 겪는 고통에 주목한다. 새로운 것이 자기 안에 들어올 때 자기를 확장해서 받아들여야 하는 수고를 감당하기 싫은 것이다. 그래도 꼭 해야 하는 것이면 자기 확장은 하지 않고 적당히 변형시켜 겉만 잠깐 핥다마는 정도에 그친다. 그러니까 살짝만 경험하고 다 아는 것처럼 치부해버리거나 나에겐 맞지 않는 걸로 한쪽으로 제쳐두는 것이다.


낯섦은 왜 경험의 확장과 삶의 풍요로움을 만들어줄 기회에서 두려움과 회피의 대상이 되는가? 나이가 들면서 두려움이 커지는 것일까? 아니면 경험이 어느 정도 차면 자연스럽게 새로운 경험을 거부하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렇다. 사회의 공기가 적응하기 어렵게 되어 있고, 외부나 내부의 소통이 잘 되지 않고 알아서 해야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고, 수직적 구조가 심해 개인의 자유가 많이 침해당하는 구조인 경우 낯선 환경은 대단히 두렵고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특히 뚜렷하게 말로 하지 않고 눈치로 알아서 해야 하는 고맥락 문화의 경우 낯섦은 결코 배움의 기회가 될 수 없다.


배움이란 체화될 가치가 있는 낯섦을 내 삶 안으로 끌어와 삶의 확장을 가져오는 경험인데 눈치가 늘어나는 게 삶의 확장을 가져온다고 보기 힘들다. 눈치가 늘어나면 사람들을 잘 대하는 기술이 늘어날 수는 있지만 그게 삶 속에서 뿌듯함을 생산하지는 않는다. 물론 잘 처세하는 자신이 뿌듯할 수는 있다. 하지만 삶의 뿌듯함은 보람되고 가치로운 일을 했을 때 얻는 것이기에 거리가 멀다. 또한 처세술은 진정성이 떨어진다. 앞에서는 웃고 뒤에서는 욕하는 이중성을 보인다. 전화에서는 친절하게 응대하고 끊고 나서는 욕하는 모습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낯섦을 배움의 기회로 삼는 건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본능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나이가 든다고 배움의 열정이 떨어지는 게 아니다. 다만 숨막히는 환경에 오랫동안 노출되다보니 배움에 회의가 드는 것이다. 그것이 당장 눈치기술을 늘려주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으면서 중요도를 떨어뜨린 것이다. 그런 열정 가져봤자 당장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살면서 변화가 찾아와도 수박 겉핥기식이 된다. 위에서 요구하는 것만 알고 하는 척하기만 해도 된다는 걸 아는 것이다. 그러니 새로운 환경은 배움의 기회가 되지 못하고 마냥 싫은 것이고 두려운 것이며 피하고 싶은 대상인 것이다.


배움의 열정을 회복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새로움이 신기함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건 순진함이 아니다. 겉치레의 껍데기를 벗어던지는 용기있는 행위이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첫째, 가치를 붙잡아야 한다. 가치는 긴 안목이 필요하다. 오랜 시간 숙성되어야 나타나고 자랄 수 있다. 가치는 삶에서 급한 불만 끄는 식으로 당장 필요한 것에만 급급한 행위에는 절대로 생기지 않는다. 생존욕구에만 매달리는 행위, 즉 불안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삶을 그만둬야 한다. 남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뒤처지면 안된다는 강박의식으로 살아가는 삶이 생존본능에 충실한 것이다. 가치는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가치는 존중과 믿음에서 생긴다. 존중은 자기 삶을 돌아볼 줄 아는 용기이고 믿음은 그런 삶을 받아주고 수용과 지지를 해주는 용기이다. 비교로부터 만들어지는 삶은 그런 용기를 파괴할 뿐이다.


둘째, 불완전함에 머물러야 한다. 완전함은 아름다움이고 최상급이며 가장 선한 것으로 그리는 이 세상에서 불완전은 추함이요 하위등급을 나타내는 표식이다. 그러나 배움은 실수로부터 나온다는 말을 상기하면 불완전함이 성숙을 키워내는 효소임을 깨달을 수 있다. 진짜 성숙한 사람은 자기의 불완전함을 거리낌없이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다. 이게 용기이고 용기가 진짜 성숙이다.


셋째, 낯선 환경에 도전해야 한다. 우리는 점점 낯섦을 피한다. 두렵고 불안해한다. 가진 게 없다고 생각할수록 그런 경향은 심해진다. 사실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어서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노력 여부와 상관없이 쉽게 자기 환경으로부터 탈출이 어려워진다. 그러나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환경에 대한 놀라운 적응력을 갖고 있다. 경제력만 보면 그 틀안에 쉽게 갖히지만 우리의 능력에 집중하면 얼마든지 배움의 기회를 만들 수 있다. 그 배움은 꼭 돈을 많이 버는 기회가 아니다. 사회를 거시적으로 보고 무엇이 사람들을 불안으로 몰고가는지 깨닫게 된다. 내면에 집중할 때 진정한 용기를 얻고 세상이 만들어내는 거짓 불안에 휩싸이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다. 난 그런 능력이 진정한 배움이라고 생각한다.


낯섦을 다르게 보자. 그러니까 낯섦을 익숙하게 보지 말고 낯설게 보자. 위축과 불안으로 보지 말고 새로움과 신기함, 그리고 배움의 기회로 바라보자. 그것이 우리가 천성적으로 갖고 태어난 놀라운 능력을 다시 일깨워줄 원천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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