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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이형 Mar 06. 2016

타율(他律), 자율(自律) 그리고 사율(社律)

공동체로 살아가기

교육의 에너지가 아동 외부에서 내부로 향하는가, 아니면 내부에서 외부로 향하는가에 따라 교육을 다르게 정의할 수 있다. 외부에서 내부로 향한다는 의미는 배워야 할 것을 선정하고 이를 아동에게 주입하여 지력을 발달시키고 국가나 교회, 사회의 체제를 공고히 할 목적을 가진 교육을 뜻하는데 이런 교육은 아동에게 무엇이든 필요한 것을 가르칠 수 있다는 입장이며 아동의 입장에서는 수동적 교육관으로 볼 수 있다. 반면에, 내부에서 외부로 향한다는 의미는 아동이 갖고 있는 본성이 외부의 것을 수용하면서 자기 것으로 삼고 점점 확대되는 것을 말한다. 이 때 교육은 아동을 주체로 보는 능동적 교육관이다.


수동적 교육관은 기본적으로 아동을 불신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이 말은 아동은 항상 부족하고 미약한 존재이기에 어른의 판단을 배워야 하며 조상이 쌓아올린 지식의 유산을 습득하고 사회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정해놓은 것을 최대한 정성들여 배워야 한다는 뜻이다. 아동은 배움의 시기를 모두 마칠 때까지 수동성을 견지하고 훈련과 연습을 통해 선조들의 지식을 전수받아야 한다. 그래야 사회와 국가에 필요한 자원이 될 수 있다. 필요하면 강제적 수단이 동원될 수도 있는 타율적 교육이다.


그러나 아동을 주체로 바라보는 능동적 교육관은 교육의 에너지가 내부에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즉, 아동은 스스로 배움을 이루어가는 주체적이고 능동적 존재이며 스스로 성장의 욕구와 원동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교육은 아동을 잘 관찰하여 성장에 필요한 양분을 공급해주어야 한다. 이를테면, 코메니우스로부터 시작한 감각적 체험 제공이 그것이다. 이 입장에서 교육은 아이를 끌고 가는 강한 성격이 아니라 아동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해주는 보조적 역할의 약한 성격이다. 비록 교육이 이끄는 힘은 약하지만 아동에게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기에 아동의 힘은 강해진다. 아동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며 행동하는 것을 중시하는 자율적 교육관이다.


타율과 자율 중 무엇이 옳은가는 교육에서 중요한 논제이다. 타율을 강조하는 쪽에서는 아동이 수동적인 존재가 되더라도 사회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꼭 전수해줘야 한다는 입장이다. 교육 내용을 변하지 않는 것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배우는 과정에서 아동이 무엇을 선택하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오히려 혹시라도 필요한 것을 다 배우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있다. 교육 내용을 미리 정하고 가르치며 아동이 얼마나 알고 있는지 평가하여 실력의 우열을 가리고 사회에 적절하게 배치하는 데 관심을 둔다. 아는 것이 권력화 될 수 있기에 공정하고 객관적인 평가방식이 중요하다. 그리고 교육 내용 선정과 평가는 국가가 정해주는 것이 시비를 최소화하는 방안이기에 국가의 역할이 강조된다. 하지만 아동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에 수동적인 인간이 된다. 누군가 시키는 것은 잘 할 수 있으나 스스로 생각해서 결정하는 것은 잘 하지 못한다. 암기와 이해가 가장 주된 방식이 되고 자기 생각이 별로 없는 낮은 단계의 사고력에 머물게 된다. 경험은 별로 확장되지 않고 권력자의 지시를 어김으로 인해 그 분노의 대상이 될 가능성에 대한 불안으로 자기 마음을 채운다. 효능감은 떨어지고 실패를 너무 쉽게 받아들인다. 배움의 단계가 높아질수록 자신이 사회에서 어떤 지위를 차지할 수 있는지가 결정되면서 스스로를 성장과 발전의 가능성을 가진 대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좌절과 허무의 늪으로 빠져든다. 이것이 주체가 되지 못하고 타자에 의해 지배당하는 타율적 삶의 모습이다.


자율을 강조하는 교육은 어떠한가? 아동의 능동적인 활동과 참여를 강조하며 배울 내용을 미리 정하고 그것을 일률적으로 가르치기보다 아동의 발달 단계에 맞는 형태로 바꾸어 제시한다. 체험의 기회를 가능한 많이 제공하고 경험을 통해 학습한 것이 삶의 에너지가 되도록 격려하고 촉진한다. 아동의 흥미를 가장 중요한 교육의 원동력으로 삼는다. 그런 의미에서 아동을 교육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교육의 주체로 보고 아동을 유심히 관찰하여 특성에 맞게 교육 환경을 제공해준다. 이를 통해 삶의 경계를 넓히는 것은 아동이 하는 일이지 외부의 누군가가 해주지 않는다. 아동을 자율적으로 활동하도록 하는 것이 결국 아동을 성장시키며 그로 인해 국가와 사회는 더욱 강해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러면 타율과 자율은 학교 교육에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내가 관찰하고 경험한 바에 의하면 거의 대부분 타율이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가가 교육과정과 공문으로 학교를 지배하고 있다. 공문은 통제의 강한 시스템이다. 공문 시스템은 교사를 가르침에서 멀어지게 만들며 행정 체제 안에 복속시킨다. 경력이 많아질수록 수업보다는 행정을 잘하는 교사가 우대받고 관리자로 승진하는 길이 열리게 된다. 교육과정도 국가 주도로 변경되고 교사는 이를 실현하는 도구로 전락해 있다. 세계적인 추세에 맞춰 교사의 자율성을 보장한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그것이 허울뿐이라는 냉소를 거두지 않는다. 무엇보다 평가가 선발이라는 역할 수행에 매몰되다보니 공정성과 객관성이 타당성을 쉽게 무시할 수 있는 현실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아동을 등급화할 수 있기만 하면 역할을 제대로 한 것으로 취급된다. 결국 소수 상위 대학에 들어갈 학생들을 공정하게 선발하기 위한 평가 시스템이 구축되고 모든 하위 교육기관이 종속되는 기이한 현상이 생긴 것이다. 이러한 과도한 경쟁체제를 만들고 유지시키며 더욱 공고히 하는 선발적 교육관이 여전히 우세를 점하고 있는 이유는 교육이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으며 실패에 대한 불안이 부모와 아이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과 연결되지 못하고 겉에서 떠도는 교육을 받으며 아이들은 자기 경험의 확장을 통한 자아실현은 아주 드물게 맛보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기회일 뿐이고, 오직 성공가도에서 낙오하지 않고 불안을 극복할 만한 재산과 권력을 쟁취하려는 목적에 사로잡혀 있다.


이런 시스템적인 구조는 구체적인 학교의 삶의 구석구석에도 영향을 미쳐 학교 교육 전체를 타율로 바꾸어 놓는다. 산업화 시대에 만들어진 때마다 울리는 종소리는 배움의 연속성이나 몰두하는 즐거움을 파괴한다.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수업마침 종소리는 뇌를 정지시키는 기능을 한다. 충분히 지식을 음미하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개별적 차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미 정해진 교육과정을 실현하기 위해 진도라는 압박을 받는 교사는 평가를 문제없이 치르기 위해 학생들에게 지식을 쏟아내며 쉴새 없이 외치대고 아이들은 조용히 앉아 하나라도 놓칠 세라 열심히 받아 적는다. 여기에서 한번 뒤처지면 따라갈 수 없기에 좌절은 점점 축적되어 무기력의 상태로 직행한다. 부모는 자식의 좌절을 이겨낼 정신적인 힘이 되지 못하고 사교육을 통해 성공이라는 목표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아이를 압박한다. 학교는 학생의 무기력을 조장하거나 그런 상태를 방관하며 방치하는 주범이 되며 학부모는 이런 학교를 비난하며 불신하고 사교육으로 돌아서서 많은 돈을 쏟아 붓는 매우 기이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또한 관리자가 교사를 지배하고 교사가 학생을 지배하는 시스템은 군대 조직과 매우 흡사하다. 명령체계에 학생들은 복종해야 한다. 교장실 앞에서 학생들이 떠든다며 중앙현관 사용금지, 머리가 길면 공부에 방해된다며 두발단속, 화려한 색의 옷이나 슬리퍼도 착용금지 등 학생을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현상들이 일어난다. 비록 지금은 학생인권조례의 영향으로 체벌이 금지되었고 점점 두발이나 복장 단속은 완화되고 있지만 아직도 교사들 회의에서는 이것들이 언급되며 학생을 통제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문화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초등학교보다는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주로 일어나는 일이긴 하다.) 수업의 형태는 어떠한가? 천편일률적으로 칠판을 바라보는 책상 배치는 교사 주도의 수업을 지속하게 만들고 학생은 지식 주입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교육관의 발현이다. 어디를 봐도 학교는 타율이 지배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진보교육감을 시작으로 학교의 민주화가 조금씩 안착되고 있다. 학생 자치가 활성화되어 회의를 통해 결정되는 경우가 학교마다 생겨나고 있다. 학생 자치가 활발해지면서 권위적인 명령과 지시 문화가 바뀌어 가고 있다. 학생을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고 일일이 지시해야 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가둔 입장에서 직접 참여하고 활동하며 자신의 세계를 넓혀갈 수 있는 능동적 존재로 바라보는 입장으로 선회하고 있다. 교육과정재구성이라는 이름으로 교사는 교육 내용 선정과 조직에서 자율권을 조금씩 확보하고 있으며 수행평가 확대를 통해 공정성과 객관성만 담보되면 안전한 평가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학생의 배움에 피드백을 주는 평가의 본질적 의미가 살아나고 있다. 학교가 교육의 의미를 되살리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인 변화라 볼 수 있다.


하지만, 학교 민주화의 바람으로 인해 학교 현장이 혼란스러워졌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체벌을 금지하고 학생 인권을 존중하라는 조치는 교사의 권위를 약화시켰고 이로 인해 안 그래도 사회적으로 교육의 황폐화에 대해 비난을 받고 있는 교사의 입지를 더욱 좁혔다. 학교에서 제도적으로 보장받던 교사의 권력이 학생들에게 이양되면서 교사의 지시가 더 이상 예전처럼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자율이 살아나고 있지만 그것이 학생의 배움을 촉진시키고 삶의 영역을 넓히는 기반으로 작용하지 못하고 명령과 지시의 타율적 삶에 대한 반항으로 나타나면서 학생과 교사가 대립하는 양상이 자주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자율적 삶의 영역이 거의 학교 위주로 나타나면서 사회의 자율 문화 지체 현상을 보이고 학교의 미시적 삶은 그로 인한 혼란이 재현되고 있다.


이런 혼란을 최소화하고 학생들이 자율을 자신의 삶으로 가져올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사율이다. 사율이란 자신이냐 타인이냐의 개인화된 관점에서 벗어나 공동체적 관점을 취하는 것이며 이는 우리의 삶이 처음부터 사회적 속성이 있음을 받아들여 건강한 사회를 만들자는 데 그 취지가 있다. 이를 학교 현장에 대입시키면, 교실에서 교사의 지시로 학생이 움직이는가 아니면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움직이는가의 문제로 인한 혼란을 공동체적으로 해결하자는 것이다. 함께 모여 1년을 같이 사는 공간에서 개인화되고 고립화된 각자도생의 삶을 중지하고 공동체로서 함께 살아가는 삶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학교 민주화의 진정한 의미이기도 하다. 학생을 자율적인 존재로 회복하자는 것은 누가 시키는 것은 하지 않아도 되고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자유방임이 아니다. 자유와 책임을 통합하여 온전한 도덕적이고 인격적인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나의 자유를 공동체 안에서 제한하는 책임의식을 키우는 것이다.


존 듀이는 이러한 부분에서 선구자라 볼 수 있다. 그는 학교와 사회의 삶이 괴리되어 있는 현상을 극복하고자 학교의 삶을 사회를 준비하는 성격으로 규정짓는 것에 반대하며 사회와 같은 삶이 되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그래서 그는 교과를 사회적 맥락을 깨닫게 하는 수단으로 보았다.      


정보라는 것은 학습 자료가 사회적 삶의 맥락 속에 들어가 그 이미지와 의미가 분명해질 때만 진정한 정보 혹은 교육적인 정보가 된다. 훈육도 정보를 근거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때, 그 능력을 사회적 목적을 위해 통제할 수 있을 때만 진정으로 교육적인 훈육이 된다. 교양도, 외적 세련이나 허울 좋은 치장이 아닌 진정으로 교육적인 경우 정보와 훈육의 생생한 합일을 가리킨다. 인생관의 측면에서 개인의 사회화를 의미한다.  (존 듀이. 조용기(역). 교육의 도덕적 원리. 교우사. 2011. p48)


그는 사회적 맥락 안에서 수동적인 흡수가 아닌 능동적인 구성으로 학습할 때 사회에 기여하게 되고 이것이 도덕성을 키울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니까 도덕을 따로 가르치거나 인성교육을 따로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나는 그의 이런 관점을 사율로 대체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타율이나 자율이 아닌 사율로 나아가자는 나의 주장은 아직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이 많다. 우선 공동체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항상 삶에는 타율이나 자율의 요소가 많고 공동체가 이것을 얼마나 통합할지는 공동체의 역동성과 민주주의 실천 의지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율을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합의나 타협의 관점으로 보지 않고 정서적인 측면, 즉 감정을 함께 고려한다면 사율은 보다 통합된 형태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회복적정의에서 실천하는 신뢰써클이 하나의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다. 구성원들이 원을 이루어 그 누구도 숨거나 지배적인 위치에 놓이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자의 질문에 각자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신뢰써클의 방식은 모두가 동등한 지위에 있음을 실질적으로 느끼게 해주고 나의 발언이 존중받는다는 안전과 신뢰의 문화를 만들 수 있다. 일단 안전과 신뢰의 정서가 형성되면 자신의 의견을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고 상대방의 의견도 경청하게 된다. 이런 의견들은 지적 자극으로 작동하면서 더 나은 대안을 만드는 재료가 되며 이는 단지 소수의 의견이 지배적이거나 다수결로 정하는 절차 중심의 민주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


공동체 모두의 결정에 따른다는 것은 타율이 작동한다는 의미로 다가가지 않게 된다. 내 자유를 모두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사회에 기여함으로 건강한 사회를 만든다는 측면에서 제한하고 나의 행동에 스스로 책임지는 구조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자율을 기반으로 한 사율이 주도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사율은 타율이냐 자율이냐의 대립구조를 뛰어넘을 수 있는 훌륭한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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