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5일은 광복절이다. 그리고 가톨릭 교회 안에서는 성모승천 대축일이다. 나에게는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본명인 마리아 축일이자 생신이기도 하다. 원래 어머니의 생신은 음력 8월 13일이다. 장손 며느리인 어머니는 추석이 코앞이라 여러 가지 여건상 자손들이 생일을 기념해드리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자손들이 다 모이기 쉬운 광복절을 어머니 생신으로 정한 것이다. 이렇게 어머니의 축일 겸 생일날로 정한 광복절은 내게 의미 있는 날이다. 수년을 어머니의 생신이 공휴일이기 때문에 여름휴가를 어머니와 함께 보낼 수 있어 행복했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 혼자 계시는 어머니를 자식들 곁으로 모시려 해도 80 평생을 나고 자란 고향에 묻히고 싶다며 서울에 오는 것을 극구 만류했었다. 몸이 쇠약해지니 어쩔 수 없이 자식들 곁으로 오게 되었다. 작년에는 외삼촌이 농사를 짓고 있는 홍천으로 어머니를 모셔 생신파티를 했는데 어찌나 좋아하시던지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느 날은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갑자기 생각이 났는지 “한 참 일할 때는 배고픈 중도 모르고 신발을 신지 않고 밭에서 일하고 다녀도 발이 아픈 중도 배고픈 중도 모르고 살았는데 내가 왜 이렇게 되었다냐,” 하며 말끝을 흐렸다. 동생 집에 와서 잘 자라고 있는 농작물을 보니 잠시 그때의 옛 기억이 떠올랐는지 기운을 내며 행복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어머니의 그 모습 다시 그리운데 올해는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다. 허허로움을 달랠 길 없어 부지런히 행장을 차려 임실 호국원으로 향한다. 도착하니 나라를 위해 애쓴 참전용사들의 비석마다 꽃이 한 아름씩 안겨 있다. 비문에 살아온 인생을 간직한 채 의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비석 옆에 아버지, 어머니의 비석도 보인다. 카네이션 한 다발 부모님의 품에 안겨 드리니. ‘고맙다. 어떻게 왔다냐, 너희들 보니까 참 좋다’며 손을 덥석 잡는다.
농사를 지으며 어려운 이웃들의 일을 소리 없이 도와주는 아버지를 사람들은 법 없이도 살 양반이라고 했다. 고통을 고통이라 여기지 않고 묵묵히 받아들이며 의연한 삶을 산 아버지께 막걸리를 올린다. 어머니가 좋아하던 달디 단 커피 한 잔 따끈하게 타서 올린다. 건강이 안 좋아져 식욕을 잃은 어머니께 “엄마 식사하시고 커피 마시게요.” 하면 어머니는 금방 얼굴에 화색이 돌며 “그럴까, 그러면 너랑 이따 커피 마시자잉.”하시면서 식사를 조금 하시곤 했었다. 어머니가 커피를 좋아한 게 아니고 딸과 커피 마시며 함께 보내는 시간을 좋아했으리라. 못난 딸은 이제야 생각하게 된다.
절을 하고 연도를 바치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땀과 눈물로 얼룩진 얼굴 그대로 한 채 연도가 끝나고 묘비 앞에 앉아 있다. 바쁘다는 핑계로 어머니한테 가면 꽁지 빠지듯 급하게 뒤돌아 왔었지. “바쁜데 어서 가라이” 늘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외로우신 어머니는 자식과 좀 더 있고 싶어 더 있다 가라고 나를 붙잡고 싶었을 것이다. ‘엄마 지금은 바쁘니까 다음에 시간이 많아지면 엄마 곁에 오래 있을게요.’ 이렇게 속으로 생각하며 그런 날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어머니는 기다려 주지 않고 서둘러 우리 곁을 떠났다. 혼자 계시며 자식들이 언제나 올까 하고 하염없이 기다리고 계셨을 어머니는 내가 가면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많이 외로웠을 어머니를 생각하니 죄송스러운 마음 그지없다.
덜 외롭게 해드리지 못한 회한에 젖어 묘비 앞에 퍽지근하게 앉는다. 아버지, 어머니의 정다운 눈길 마주하며 막걸리와 커피를 마시며. 세상 억울하고 서러운 얘기를 모두 쏟아내니 역성 들어주는 엄마 앞에서 안심을 하는 아이처럼 한결 편안해진다. 헤어져야 할 시간, 묘비를 쓰다듬으며 기도를 바치고 내려오는데 하염없이 손을 흔든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라고 한다. 나의 어머니는 내게 위대하고 따뜻한 모습으로 영원히 마음속에 남아 있으리라. 그리움이 사무칠 때마다 불러본다.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