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경주씨 Apr 24. 2024

끝에서 시작하는 마음

토지 5부 5권, 통권 20권 

지난주 수요일 새벽, 뒤척이다 깨어나 토지를 다 읽었다. 산사람들은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된 이범호와 대립한다. 당장의 생존과 해방 이후를 생각하는 마음의 간극은 너무 멀다. 갈등의 끝에 이렇다 할 해결 없이 갑자기 뜬소문처럼 일본의 항복이 전해진다. 서희는 온몸을 휘감은 사슬이 깨어지는 듯하고 장서방은 춤을 추며 돌아온다. 그렇게 끝이다. 툭 끊어지듯 끝이다. 이 먹먹함은 무엇일까. 나는 토지를 어떻게 버티고 있었나. 바람과 현실은 언제나 어긋나고, 일상은 지루하리만치 별 일 없이 흐르다 시간이 모여 사건으로 기록되듯 토지 속 세계도 다를 바 없다. 당장이라도 이야기가 이어질 듯 인물들의 하루가 그려질 뿐이다. 영팔이 아재는 해방을 못 보고 돌아갔다.      


... 이 때 나루터에서는 읍내 갔다가 나룻배에서 내린 장연학이 둑길에서 만세를 부르고 춤을 추며 걷고 있었다. 모자와 두루마기는 어디다 벗어던졌는지 동저고리 바람으로. 

"만세! 우리나라 만세! 아아 독립 만세! 사람들아! 만세다!"

 외치고 외치며, 춤을 추고, 두팔을 번쩍번쩍 쳐들며, 눈물을 흘리다가는 소리 내어 웃고,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416p. 

 

박경리 선생님은 서사의 마지막을 왜 장서방의 춤으로 마무리하셨을까. 빛나는 한 순간을 심어 두고 싶으셨을까. 해방 이후로 벌어졌던 여러 참혹한 사건과 전쟁, 전쟁 이후의 여러 고비들이 넘나드는 현대사를 이미 알고 있다. 역사적 사실과 사건은 그저 읽어서 아는 것이 다가 아님을 토지를 통해 배웠다. 점잖게 자신을 숨기고 산과 만주와 최참판댁을 연결해 오며 살얼음 디디듯 살아온 시간들로부터 해방된 장서방의 홀가분한 어깨춤이 그 뒤로 올 시간의 참혹함 앞에 따옴표처럼 떠오르길 바라셨을까. 저 끝이, 끝이 아님을 새삼 생각해 본다.      

일 년이 넘는 시간, 내 속에서 쏟아지는 화를 토지가 받아줬구나 깨닫는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일은 점점 오리무중으로 빠져들고 주변 환경도 조건도 가파르게 악화되기만 했다. 이런 생각이 옳은지는 모르겠다. 혼자 엎어질 듯 비틀거리는 데 토지가 손을 잡아준 느낌이다. 내 일이, 내 환경이 아무리 고되다 한들 저 때의 망막함보다야 참혹할까, 생존을 고민하는 토지 속 인물들을 두고 내 고민은 종종 사치구나 생각도 했다. 옳지 않은 마음으로 토지에 기대어 왔다. 현실 속 누군가를 보며 이런 생각을 품었다면 아마도 스스로가 혐오스러워 버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큰 흐름을 따라오며 모자란 나를 다독이고 때론 다그치며 시간은 지나고 지나는 것임을 배운다. 나는 무수한 사람 속 그저 하나일 뿐이기도 하고, 저저이 다른 인물들 속에서도 온전한 나로 살아가는 일이 내가 그저 하나라는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님을 새긴다.      


"어차피,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다 사람은 완벽하지 못해. 다른 사람의 인생과 똑같은 삶을 살 수도 없는 거고, 불행이다 행복이다 하는 그 말도 실상은 모호하기 짝이 없어.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 우리들 운명, 행복 불행이 검정 과자 빨간 과자처럼 틀에다 찍어내는 것도 아니겠고,  운명 앞에 무력해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지만 그러나 운명을 정복한 사람은 없어. 자신()이라는 말같이 허망한 것이 있을까. 노인을 보아. 그 경력이 화려한 노인일수록,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 결국 우리는 죽어가고 있는거야. 삶이란 덫에 걸린 짐승 같은 것, 결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것." 349p.


토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지다. 저들과 어찌 헤어져야 할까. 이어질 이야기들을 두고 툭 끊어지듯 저들과 손을 놓은 기분이다. 저들을 얼마나 사랑하나. 저 시간을 살아간 사람들의 안부를 이제는 어디서 물어야 하나. 주변인처럼 절대 앞에 나서지 못하는 모화의 마음, 아이를 거두어 키우며 산에 정착한 지연, 여옥을 만나러 나선 명희의 다음, 영선네는 만주에서 돌아올 영광과 영구를 언제 만나는지, 윤국이는 살아서 돌아오는지 무수한 이야기가 멈추었다. 아닌가 어딘가에 존재하는 평행세계처럼 저들은 토지 속 세상을 살고 있을까. 이제 한 권 남았다 하던 홀가분한 마음이 어느샌가 사라지고 페이지가 더 없는데 걸음을 멈추듯 자꾸만 뒤돌아본다.      

그저 읽기만 하고도 이렇게 이별이 무감각한데 선생님은 저들과 어떻게 헤어지셨을까. 더 하시고 싶은 얘기는 없으셨을까. 가장 사랑한 인물은 누구였을까. 이제야 뒤늦게 선생님의 다른 이야기를 하나씩 뒤적이고 있다. 선생님 살아계실 적에 <김약국의 딸들>을 읽었고 <토지>를 시작했다가 어찌하다 보니 중간에 멈추고 말았다. 왜 지금일까? 내가 너무 늦었나?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소한 생각들을 하다 접는다. 인연이 닿아 이렇게 읽어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큰 복이다. 이 헛헛한 마음은 한동안 서성이듯 토지를 맴돌 것 같다. 중고로 산 내 토지, 다 읽고 지인에게 보내야지 했었는데 안 되겠다. 책장에 고정 자리를 만들어야겠다. 이제 마음껏 줄을 긋자.


매거진의 이전글 그.리.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