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처럼 Mar 19. 2020

다들 회사에서 축구 정도는 하잖아요

직장생활 14년차의 끈질긴 출근 적응기

회사워크숍이 뭐라고


처음 입사한 회사에서는 1년에 한번, 단풍이 질 때쯤 1박 2일 워크숍을 떠났다. 매년 담당 임원의 성향에 따라 워크숍의 기획방향이 달라졌지만 뭐가 됐든 늘 가기 싫었다. 일단 내 방이 아닌 곳에서 누군가와 섞여 자는 것이 불편했고, 하루 10시간 가까이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질려버린 사람들과 약 48시간을 함께 해야 하다니. 이틀 내내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 저녁이면 팀마다 의무적으로 들이켜야 하는 말술과 노래방 기계 멜로디와 따로 노는 괴성에 맞춰 손뼉을 치는 것도 힘에 부쳤다. 


특히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워크숍은 사원 3년차 때다. 당시 상무님은 운동마니아로 축구를 사랑했다. 그 사랑에 100명이 넘는 직원들이 왜 동참해야 되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아무튼 그 해의 컨셉은 명랑축구회였다. 단순한 워크숍, 식상한 운동회는 가라! 마케팅본부에서 일을 배울 수 있는 것은 특별한 기회가 분명하지만, 지나치게 재능 많고 아이디어 많은 사람들이 워크숍 기획단에 포함되어 있으면 모두가 피곤하다. 지금은 위치도 기억나지 않는 강원도 인근 너른 잔디밭 위에 도착한 우리는 철저하게 준비된 기획에 맞춰 순서대로 오리발을 발에 끼우고 양쪽 골대를 향해 이리 뛰고 저리 뛰게 되었다. 


2시간 정도 경과했을 무렵, 한 번도 입었을 것 같지 않은 츄리닝으로 무장한 우리 팀 부장님이 스텝이 꼬여 고꾸라지는 것을 보고 눈물이 날 뻔 했다. 사람들은 박장대소하며 쓰러졌지만, 너무 슬펐다. 왜 이렇게까지 우리는 애를 쓰며 살아야할까. 늘 반듯한 넥타이 차림에 스마트한 말만 쏟아내는 부장님이 오리발을 끼우고 잔디밭에 누워 있다니. 심지어 그 덕에 우리 팀은 패배하고 말았다. 한참 넋을 놓고 그 모습을 애잔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본부석에서 삑삑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 이제 그만!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럼 다음 게임으로. 3년차 이하 여직원들은 모두 나오세요!!”


자기 얼굴보다 두 배는 큰 빨간색 메가폰을 들고 소리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상무님이었다. 멀리서 봐도 헤죽헤죽 좋아 죽는 표정. 하아, 왜 하필 3년차 이하인가. 죽어도 축구는 안한다고 대기석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나는 줄행랑이라도 치고 싶었다. 이제 몇 달 있으면 대리진급인데 이 시점에 굳이 신입사원들과 섞여 뛰어야 한단 말인가. 도망치고 싶지만 소용없다. 조직생활에서 열외가 어디 있겠는가. 그것도 사원 나부랭이가. 각 팀의 막내부터 이제는 머리가 굵어질 대로 굵어진 내 동기들까지 젊은 여성들이 쭈뼛거리며 운동장 가운데로 모였다. 그나마 오리발을 벗고 뛸 수 있는 게 다행이었다. 


“지금부터는 여직원 축구경기를 한번 해보죠. 아니, 아니 이과장!!! 넌 빠져야지 왜 거기 들어가 있어?”


평소 좋은 선배로 후배들을 잘 챙겨주었던 이과장님,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성차별적인 경기진행방식에 반기를 들고 우리 틈에 끼었지만 등장과 동시에 강제 퇴장을 당했다. 정말 이렇게 경기를 하게 되는구나. 일할 때만 남녀차별이 있는 줄 알았는데 워크숍에서까지 당하다니. 분하다. 어느새 호루라기는 공중을 향해 휘리릭 소리를 내고, 나는 반사적으로 뛰고 있었다. 축구는 중학교 이후로 처음이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 교장 선생님은 축구를 사랑했는데(10년 주기로 축구를 사랑하는 인간이 수장인 곳에 속해 있다) 여학생도 축구를 알아야 한다며 축구를 시켰다. 그것도 남학생과 한손을 꼭 잡고 달려야 하는 짝 축구를. 지금이라면 부모들이 펄쩍 뛰고 온라인에 대서특필 될 이야기지만 그때는 애석하게도 모두 그러려니 했다. 아무튼 그때의 감각을 몸이 기억하고 있는지 나는 제법 잘 달렸다. 모두가 공을 쫓아 따라다니는 동네축구를 구사하는 동안 나는 골대 근처에서 기회를 노렸다. 드디어 공이 붕 떠서 골대 근처에 떨어졌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공으로 돌진했고 골대를 향해 슛을 날렸다. 


슛- 골인!!!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들렸다. 운동장이 뒤흔들리는 느낌. 박지성이 되면 이런 느낌이겠구나. 나 혼자 십억 매출을 올린다 해도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환호하지는 않을 텐데. 의기양양했다. 이참에 한 골 더 넣어서 이기고 말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우리 편 골키퍼의 자책골로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갔고. 정해진 경기시간은 끝나버렸다. 그리고 돌아온 운명의 시간. 승부차기. 양 팀의 대표선수 다섯 명이 앞으로 나섰다. 나 역시 모두의 기대를 한껏 받으며 운동화 끈을 비장하게 고쳐 맸다. 내 앞에 누구라도 한골만 넣었으면, 제발 한 골만 넣어라 기도했지만 모두가 개발이었다. 남은 슛은 단 하나. 내 발길질 한 번에 승패가 걸렸다. 


축구공을 움푹 패인 잔디 밭 위에 바르게 고정하고 심호흡을 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오른발을 몸의 뒤편으로 움직이려는 순간 정적을 깨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팀 부장님이 어느새 골대 근처로 달려와서 십대소녀처럼 방방 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이다. 


“OO아!!! 할 수 있어!! 뻥 차! 무조건 넣어야 돼!”


어찌나 기합을 세게 넣으시는지 호랑이 같은 그 기세에 엮여 나도 모르게 눈을 부릅뜨게 됐다. 덩달아 부담감에 몸의 긴장감도 최고조에 이르렀다. 오리발에 쓰러진 그의 설욕을 왜 내가 갚아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다 이런 게 팀워크 아니겠는가. 그의 패배는 나의 패배, 나의 승리는 그의 승리, 곧 우리 팀의 승리다. 자신감을 발끝으로 모으고 눈빛은 매섭게 골키퍼를 향했다. 이긴다. 이기고야 만다. 제자리에서 차려던 계획을 급 변경, 대 여섯 걸음 뒤로 물러 선 뒤 달음박질을 쳤다. 


“이이이이이 야아아아아!”


초원을 질주하는 표범처럼 포효하며 공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뻥! 






성공과 실패는 동시에 온다


골이었다. 내 발을 떠난 공은 골대의 오른편을 정확하게 갈랐다. 사람들은 예상치 못했던 축구요정, 아니 축구여제의 탄생에 흥분했다. 골 한골로 승리를 얻은 팀원들은 로또에라도 당첨된 사람들처럼 내 이름을 외치며 빙글빙글 돌았다. 드디어 내가, 회사 입사 3년 만에 크게 한건 해냈구나. 일은 아니지만 뭐가 됐든 잘하는 게 있으면 된 거 아닌가. 당분간은 이 승리감을 만끽해야지. 부장님도 한 달 정도는 내가 뭘 하든 눈감아 줄 것이다. 


그런데 발끝에서 이상한 느낌이 감지되었다. 뭔가 운동화가 축축하게 젖은 것 같은데. 발에 땀을 너무 많이 흘렸나?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저릿한 아픔이 느껴졌다. 순간 ‘악’하는 소리를 내뱉었다. 내 고성에 놀란 워크숍 기획단이 구급상자를 들고 뛰어왔다. 


누군가가 내 신발을 벗겨주었는데 양말은 이미 피로 물들어 있었다. 왕년에 축구로 좀 다쳐본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삐거나 부러진 건 아닌 거 같고, 발톱이 나간 거 아냐?”


경험치는 무시할 것이 못된다. 그들의 예상은 정확했다. 양말을 벗기자 엄지발톱의 3분의 2 가 날아가 있었다. 발등으로 차야 하는데 발톱으로 공을 찬 것.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영웅이었는데, 어느새 업힌 상태로 콜택시 안에 던져졌다. 한 시간이라도 더 빨리 귀가하기를 바랐던 것은 맞지만 이렇게 돌아가게 될 줄이야. 사람들은, 아니 회사는 야속했다. 부상자는 병원으로, 나머지는 다시 워크숍 프로그램에 참여한다는 공지 끝에 모두가 내 눈 앞에서 뿔뿔이 사라졌다.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울었다. 모두가 미웠다. 오버해서 우쭐거렸던 나도 미웠다. 한강변에 흐드러지는 낙엽을 지나칠 때쯤 되어서야 마음이 가라앉았다. 오늘은 그냥 좋았던 일도 있었고, 나빴던 일도 있었던 것뿐이다. 앞으로 수없이 가게 될 워크숍 중에 하나일 뿐. 누구 탓을 할 이유가 없다. 






축구가 끝나고 난 뒤


몇 일간의 병가, 아니 포상휴가를 얻었다. 의사가 마저 뽑아버린 발톱 자리는 걸을 때 마다 시큰 거렸지만 휴가는 언제나 꿀이다. 부장님은 재택근무가 가능하지 않느냐며 보고서를 이메일로 던져 주었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받아 줄 수 있다. 침대에 누워서 온 종일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휴가가 끝나 갈 무렵 회사에서 택배 상자 하나가 도착했다. 또 일인가 싶어 열기를 미루다 저녁이 되어서야 열어 보았다. 안에는 바디클렌저 세트와 상품권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상품 권 봉투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제 OO회 마케팅본부 워크숍 투혼상”


감사하다고 해야 할지. 장난 하냐고 화를 내야 할지. 그래, 이왕 받은 상 감사하기로 결심했다. 회사 복귀 후 쏟아지는 사람들의 칭찬 반 장난 반 멘트에도 감사하기로. 뭐든 열정 넘쳐 좋다는 평가에도 씨익 한 번 웃기로. 


이후로도 워크샵이 돌아오면 나는 몸을 내던진다. 딱 적당히 다칠 만큼만.    

매거진의 이전글 적당히 불완전하고 적당히 완전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