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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새 Sep 29. 2020

단단하고 동그란 양파

부제 : 나에게 쓰는 편지

 너에게 편지를 써야 한다고 해서 조금 당황했었어. 작년부터 너는 영화 벌새의 은희처럼 "제 삶도 언젠가 빛이 날까요?" 하는 물음을 가져왔지. 하지만 나는 너에게 영화 속 영지 선생님처럼 위로를 줄 수도, 멋진 대답을 해 줄 수가 없었거든. 영지 선생님보다 하나 나은 점이 있다면 나는 너와 계속 함께할 거라는 거야. 이별에 속상해할 일도 없겠지만 속상할 때같이 속상해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정말로 그게 '더 나은'점인지는 잘 모르겠어.



 요즘 심리상담을 다니면서 어린 시절의 너를 자주 발견하고는 해. 여태껏 외면했지만 이제는 조금씩이지만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됐어. 너는 그때 속상했구나, 상처 받았구나, 화가 났구나. 어떻게 그 시절을 버텨왔는지, 어떻게 이만큼까지 자라줬는지 고맙고 기특해. 그리고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해. 네가 가지고 있는 상처 때문에 나는 너를 바라보고 싶지 않았거든. 나는 어린 시절의 네가 부끄럽고 싫었어. 내가 '미숙함'이라는 꼬리표를 아무리 떼어내고 또 떼어내도 부모라는 사람들이 나를 쫓아와서 기어이 다시 딱지를 붙이고 마는 거야. 그래서 난 정말로 지금보다 더 미숙했던 어린 너를 무시해버리기로 했었어.


 오늘은 이런 말을 들었어 미숙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들었다고 나 스스로를 정말로 미숙한 사람이라고 내가 평가해버리면 안 되는 거래. 상담 선생님이 나에게 거의 화를 내다시피 하는 것처럼 단호하게 말했지. 너무 당연한 말인데 나는 그 말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고서야 겨우 깨달은 거야. 나는 단지 미숙하다는 평가가 싫은 거였어. 미숙한 너와 내가 아니라. 흐릿하게 뜨고 있던 눈에 초점이 잡히는 기분이었어. 그 말이 엉망진창으로 먼지를 뒤집어쓴 어린 너에게 다가가서 먼지를 털어 줬지. 어린 너는 그냥 무서울 뿐이었던 것 같아. 부모의 평가가, 주변의 시선이, 온갖 세상일이 전부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서른이 넘은 지금도 세상을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어린 너를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오늘은 그래서 기분이 좀 좋았어. 


 적어도 나는 어린 너를 혼내지 않을게. 네가 더 이상 무서워하던 일들을 다시 무서워하지 않도록 잘 보살펴볼게. 상담 선생님이 어느 심리학자의 말을 인용해서 알려줬어. 어린 시절의 내가 가운데에 심으로 자리 잡고 있고 그 바깥으로 더 자란 나, 조금 더 자란 나, 거기에서 또 조금 더 자란 내가 겹겹이 자리를 잡는 거래. 이렇게 비유하면 웃기지만 양파처럼 말이야. 선생님이 단단하고 동그란 양파가 되어보자고 했어. 표현이 너무 귀엽지 않니. 단단하고 동그란 양파. 나는 정말로 단단하고 동그란 양파가 될 거야. 



사진출처

<Onion> Photo by C Drying https://unsplash.com/photos/MWSA3HDVhr0

<Letter>  Photo by Kate Macate https://unsplash.com/photos/xmddEHyCi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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