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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주부 May 14. 2023

시대의 부름에 대한 예술가의 응답

루이 암스트롱과 신중현 / "전복과 반전의 순간"을 읽고

2017년의 기록


  시대가 원하는 사람.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 예술가는 존재했다. 그리고 예술가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시대를 타는 예술가와 시대를 타지 못하는 예술가. 시대에 걸맞은 태도와 능력을 갖춘 예술가는 어렵지 않게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었다. 반면, 시대가 요구하는 태도와 능력을 갖추지 못한 예술가는 주옥같은 작품을 선보여도 가난하였고 인정받지 못했다. 극명히 다른 두 삶. 시대는 어떻게 예술가를 불렀고, 예술가는 어떻게 시대에 응답했는가. 굳이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시대의 흐름에 영향을 받는 사람이라면 한번은 던질법한 질문이다.


  개인적으로도 답하고 싶다. 지금, 갈림길에 서 있기 때문이다. 최근 “공동체 미디어”에 관심이 생겼다. 공동체 미디어는 지역, 마을, 공동체 등 조직 내에서 콘텐츠 생산, 유통, 수용, 공유가 이루어지는 미디어이다. 다른 미디어보다 공동체 구성원의 커뮤니케이션 권리를 효과적으로 보장할 수 있으며, 구성원에게 실재 만족감과 효용을 가져다줄 수 있다. 그러나 매스미디어 만큼 그 규모와 영향력이 크지는 않고, 수익 창출도 어려워, 대한민국 공동체 미디어의 선두주자인 ‘마포 FM’조차 50% 이상을 정부지원금에 의존하는 상황이다. 다른 나라에 비해 역사도 깊지 않아, 하부구조와 문화를 구축하려면 적잖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으로 예상한다. 


  공동체 미디어와 매스 미디어를 두고 갈등하던 중, <전복과 반전의 순간>이라는 책을 만났다. 시대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책이었다. 예술가들은 때로는 시대를 뛰어넘었고, 때로는 시대 앞에 무릎 꿇었다. 시대에 저항하는 자와 순응하는 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들의 선택과 선택에 따른 결과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순간, 책 속에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가들의 삶을 렌즈 삼아, 내가 마주한 질문을 객관적으로 보고자 했다. 그래서 20세기, 미국과 한국에서 음악사에 큰 영향을 끼친 “루이 암스트롱”과 “신중현”이 살았던 시대와 그들의 삶을 살펴보았다.




영원한 엉클 톰, 루이 암스트롱


  1990년 7월 4일 뉴올리언스 스토리빌에서 재즈 음악가, “루이 암스트롱”은 탄생했다. 그는 색소폰을 가지고 “재즈의 신화가 되었고, 재즈를 미국의 국민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했으며, 재즈를 전 세계에 전파해서 세계의 음악으로” 만드는 데 공헌했다. 입담이 좋아 ‘사치모(Satchel-mouth, 입이 큰 남자)’, ‘재즈 앰배서더(Jazz ambassador)’, 그리고 심지어 대중문화 그 자체라는 뜻을 지닌 ‘팝(pop)’이라고도 불리는 사람. 루이 암스트롱은 어떻게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쥘 수 있었을까? 그의 별명에 담긴 비밀을 읽기 위해서는, 루이 암스트롱이 활동하던 시기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재즈는 사실 “뉴올리언스라는 미국 남쪽의 깡촌 항구 도시에서 생긴 음악이다.” 1917년 오리지널 딕시랜드 재즈 밴드(Original Dixieland Jazz Band)라는 연주자들이 음반을 발매했다. 놀랍게도 깡촌의 음악, 재즈는 30년 만에 전 세계가 공통으로 즐기는 음악으로 등극했다. 19세기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모든 과정의 최전선에 바로 루이 암스트롱이 있었다.


  시대의 부름은 세 번 있었다. 첫 번째 부름은 ‘제1차 세계대전’이다.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뉴올리언스는 다시 군항이 되었다. 뉴올리언스에 새로 부임한 해군 장관은 독실한 청교도주의자였는데, 그는 퇴폐의 온상으로 여겨진 스토리빌을 폐쇄하라고 명령했다. 스토리빌에서 일하던 흑인 남녀들은 하루아침에 직업을 잃고 일터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루이 암스트롱 또한 1922년 뉴올리언스를 떠나 중서 북부의 중심 도시 시카고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시카고의 킹 올리버 밴드에 합류하면서, 시카고 이주는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되었다. 3년 후, 루이 암스트롱은 자신의 밴드로 독립하여, 시카고의 지역 스타로 발돋움했다.


  두 번째 부름은 ‘대공항’이다. 1929년, 시카고에서 지역 스타가 되고 4년 후 루이 암스트롱은 흥행의 메카라 불리던 뉴욕에 입성했다. “1929년은 미국 현대사에서 가장 암흑기라 할 수 있는 대공항이 일어난 시기다.” 재즈는 대공항을 맞아 미국 일부 지역민의 문화에서 모든 미국인의 문화가 된다. 미국인은 20세기 전반기 동안 세 번의 경제 대공항을 맞아 크나큰 고통을 겪었다. 수많은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고, 적잖은 자본가들이 거리에 내려앉았다. 불경기 6년 동안, 사람들은 최악의 상황 속에서 스스로 위로하고 고통을 잊을 수 있는 탈출구가 필요했다. 미국인들은 쾌락에 젖어 현실을 잊을 수 있도록 돕는 그런 공간을 원했다. 이때, 사람들의 요구에 맞춰 ‘클럽’이라 부르는 거대 댄스홀들이 생겨났다. 동시에 대도시의 클럽 홀을 울릴 수 있는 ‘빅밴드(big band)’가 탄생하면서, 재즈는 댄스뮤직으로서 미국의 주류 문화가 되었다. 루이 암스트롱은 대공항으로 인한 사람들의 절망, 좌절을 발판삼아 자신의 영향력을 계속해서 확장했다.


  마지막 부름은 ‘제2차 세계대전’이다. 재즈는 제1차 세계대전과 대공항을 거치면서, 뉴올리언스의 문화에서 미국의 문화가 되었다. 그리고 재즈는 제2차 세계대전을 지나면서 세계의 문화가 된다. 1926년, 미국 상무부 장관 허버트 후버는 열두 권짜리 보고서를 상원 의회에 제출했다. 보고서의 주 내용은 재즈, 영화 같은 대중문화를 오락 산업으로만 보지 말고, 항만, 철도, 정유 같은 국가 기간산업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위 보고서는 문화를, “미국적 이념을 전 세계에 전파하고 동의를 끌어낼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국가 전략 무기”라고 인지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미국은 자신의 점령지에 군대뿐만 아니라 문화인력도 함께 보냈다. 그 결과, 점령지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미국 문화에 노출되었고, 미국 문화를 반복적으로 접하면서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루이 암스트롱은 전쟁의 최전선에서 미국 문화를 앞장서서 전파했으며, 동시에 그의 팬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세 번의 대공항과 두 번의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의 부름에 루이 암스트롱은 어떻게 응답하였는가. 루이 암스트롱은 스타가 될 수 있는 자질과 태도를 갖춤으로써 부름에 응답했다. 실제로 그는 스타가 될 만한 자질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먼저 루이 암스트롱은 뛰어난 트럼펫 연주자이자 보컬리스트였다. “기나긴 프레이즈를 한 번도 쉬지 않고 단번에 연주할 수 있었고, 굉장히 어려운 멜로디 라인을 즉흥적으로 주제 사이사이에 집어넣어서 애드리브를 만들어낼 줄도 알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목소리는 그 누구도 절대로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개성을 가졌다.” 또한, 루이 암스트롱은 매스미디어가 좋아할 만한 덕목, ‘유머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콘텐츠 생산자들은 이야깃거리를 던져주는 루이 암스트롱을 무척 좋아했고, 덕분에 그는 오랫동안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그런데 루이 암스트롱은 자질만 갖추지 않았다. 그는 스타가 되기 위해, 스타로 남기 위해 취해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 잘 알았다. 루이 암스트롱은 “단 한 번도 백인 지배의 사회 질서에 정면으로 맞선 적이 없었다.” 1960년대 인종차별 반대 투쟁이 격렬했을 때도 루이 암스트롱은 침묵했다. 사회 지배계급에 대한 순응적 이데올로기는 그가 스타로 남을 수 있는 비결이었다. 




만개하지 못한 꽃, 신중현


  1938년 1월, 루이 암스트롱이 전 세계를 오가면서 재즈를 선포하고 있을 때, 신중현은 태어났다. 그는 프로듀서, 작곡가로서 수많은 음반을 기획하고 곡을 작곡했다. 오늘날, 그가 손댄 곡 중 상당수가 한국인의 관념 속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신중현은 한국 문화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러나 신중현이 걸은 행보는 루이 암스트롱과 상당 부분 달랐다. 루이 암스트롱이 스토리빌을 떠난 후 시카고, 뉴욕, 그리고 전 세계에서 승승장구하면서 세계적 스타로 발돋움했지만, 신중현은 많은 순간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다. 성공한 프로듀서, 가수로 등극하고 자리매김하려 할 때마다, 시대는 그를 바닥으로 패대기쳤다. 그렇다면 신중현이 활동한 시대의 부름은 어떠하였는가, 그리고 그는 어떻게 응답하였는가. 질문에 답하기 위해 신중현의 삶을 통해 시대의 부름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한 예술가의 삶을 엿보고자 한다.


  신중현에게도 시대의 부름은 세 번 있었다. 그러나 모든 부름은 신중현의 삶과 역행했다. 첫 번째 부름은 ‘트로트의 인기’였다. 1964년 미8군 무대 출신 음악가 신중현은 ‘에드 훠’(The Add 4)라는 그룹을 결성하여 첫 번째 앨범을 발매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명곡들로 구성된 앨범이었다. 그런데도 신중현은 인기를 얻지 못했다. 1964년에는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대한민국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동백아가씨’는 한국 음반 사상 처음으로 판매고 10만 장을 넘어선 최초의 음반”으로 당대 음반 시장을 휩쓸었다. 이후 4년 동안, 신중현은 트로트의 인기로 인해 새 앨범을 낼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그의 음악이 시대를 너무 앞서간 탓이다.


  두 번째 부름은 ‘인프라의 부재’이다. 록 음악은 기본적으로 자본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록을 하려고 해도, 일단 기타, 베이스, 드럼 등 최소한 악기가 세 개 필요하다. 또한, 악기의 소리를 출력, 증폭, 통제할 수 있는 마이크, 앰프, 콘솔이 필요하다. 그뿐만 아니라 록 음악이 대중적 인기를 얻기 위해서는 청중들과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클럽, 콘서트홀 같은 공간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1960년대 한국 자본주의의 발달 수준은 열악했다. 록 음악을 하기 위한 악기, 록 음악을 향유할 수 있는 공간 모두 부재했다. 자연스럽게 당대 매스미디어 또한 록 음악을 지지하지 않았다. 신중현의 록 음악은 개발도상국 젊은이들이 접하기에는 너무 돈이 많이 든 고급문화기 때문이다.


  마지막 부름은 ‘박정희’이다. 신중현은 앞서 언급한 시대의 부름 - ‘트로트의 인기’, ‘인프라의 부재’ - 은 부단한 노력으로 극복했다. 그 결과, 신중현은 1968년 ‘펄 시스터즈’가 성공한 이후 7년 동안 최고의 프로듀서로 활동할 수 있었다. 그는 김추자, 김정미, 임성훈, 박인수 등 다양한 스타를 탄생시켰고, 1974년에는 ‘미인’이라는 명곡을 내놓으며 록밴드로서의 명성도 거머쥐었다. 그러나 신중현은 ‘박정희’라는 시대의 부름을 마주했고 결국 몰락했다. 1975년 청와대는 ‘국민가요 프로젝트’에 동참하라는 의미로 신중현에게 국민가요를 의뢰했다. ‘국민가요 프로젝트’는 ‘새마을노래’를 비롯한 국민 계몽 노래를 기획, 제작, 보급하는 프로젝트를 의미한다. “수많은 클래식 음악가, 나운영 연세대 음대 교수 같은 대학교수, 조영남 같은 대중음악가들을 다 동원했다.” 그러나 신중현은 음악적 자존심 때문에 청와대의 의뢰를 거절했고, 제4공화국 정부는 철저하게 그를 매장했다. 정부는 신중현의 모든 작품, 그리고 앞으로 나올 모든 작품을 금지했다. 또한, 신중현이 밤무대에서 공연할 수 없도록 끊임없이 불심검문을 실시했다. 신중현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어려워지면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완전히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빗속의 여인’, ‘커피 한 잔’, ‘거짓말이야’, 그리고 ‘아름다운 강산’. 신중현은 한국인의 관념 속에 깊게 자리 잡은 주옥같은 명곡들을 낳았다. 그러나 시대의 부름은 데뷔 후 11년 동안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신중현은 시기마다 트로트, 열악한 인프라, 그리고 독재자와 싸웠고 결국 패배했다. 전쟁, 공항, 그리고 미디어라는 시대의 부름에 힘입어 세계적 스타가 되는 루이 암스트롱의 삶과 비교했을 때, 신중현의 삶은 너무나 열악했고 또한 절망적이었다.








  시대는 어떻게 예술가를 불렀고, 예술가는 어떻게 시대에 응답했는가.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정치, 경제, 사회적 특성을 얼기설기 엮어 ‘시대의 흐름’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창안했다. 그리고 그 개념으로 루이 암스트롱, 신중현이라는 두 예술가의 삶을 분석했다. 그 결과, 루이 암스트롱은 시대를 타면서 상업적, 음악적으로 성공하면서 풍요로운 삶을 영위했지만, 신중현은 시대를 타지 못해 처절하게 버티면서 자신의 음악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대가 원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예술가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정답을 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틀렸다. 루이 암스트롱과 신중현은 시대의 부름 따위, 시대가 원하는 인간상 따위는 고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은 그 순간, 그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생존하기 위해 또는 인정받기 위해 있는 힘껏 살아냈을 뿐이었다. 


  두 예술가와 만나면서, 나의 갈등과 고민은 사라졌다. 매스미디어와 공동체 미디어, 어느 길을 걷든 그 삶은 가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단, 고민이 사라지자 욕심이 생겼다. 루이 암스트롱, 신중현처럼 지금, 이곳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내고 싶은 욕심이. 그들이 나에게 영감을 준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고 싶은 욕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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