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 3일 부산 여행기
마지막으로 부산을 다녀온 건 벌써 12년 전의 일이었다. 당시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 몇 달이 지난 때였는데 선선한 가을바람과 함께 부산국제영화제 소식이 들려왔다. 일을 쉬고 있으니 평소라면 엄두도 못 냈을 부산국제영화제가 갑자기 실현가능한 일처럼 느껴졌고 지금이 부국제에 참여할 수 있는 최적의 타이밍이란 생각이 들자 큰 망설임 없이 부산행 티켓을 끊을 수 있었다. 하루에 많게는 3편의 영화를 보고 다음 상영시간까지 남은 시간을 체크하며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한 후 상영관으로 이동했다. 돌이켜보면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영화에 쏟았던 날들이었고 이제 하나의 키워드를 가지고 여행을 할 수 있는 여유는 쉽게 생기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어서인지 이런 여행들은 유독 소중한 추억으로 기억되곤 한다.
그 후 정말 오랜만에 다시 부산을 찾았다. 그리고 12년 전과는 달리 동행인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모부였다. 일 년 만에 한국으로 휴가를 왔고 올해로 칠순이신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여행 속 여행으로 부산 여행을 계획했다. 최근 모부와는 1박 2일 정도의 짧은 일정으로 여행을 했던 게 대부분이었고 항상 차를 가져가거나 렌트를 하곤 했는데 (운전 난이도가 높은) 부산에선 2박 3일 일정으로 택시와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연세가 있으신 두 분이 체력적으로 괜찮으실까 출발 전에 걱정이 많았지만 그 모든 걱정이 무색했을 정도로 잘 다니셔서 여러모로 뿌듯한 여행이었다. 그럼 본격적인 여행기 시작-
부산까지는 KTX를 타고 세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호주에 살면서 긴 이동시간에 익숙해져서인지 그래도 3시간 정도의 이동거리라면 그저 감사합니다- 하게 된다.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눈에 담고 잠깐 책을 읽고 간식을 먹다 보니 어느새 부산역에 도착했다.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조금 낯선 광경을 목격하게 됐는데 그건 바로 사진을 찍는 아빠의 모습이었다. 아빠는 어디 여행을 가거나 손주들을 볼 때도 좀처럼 핸드폰을 켜는 법이 없는 분인데 부산역에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시는 게 아닌가. 예전에 사업을 하실 때 종종 부산을 다녀오시곤 했는데 그때 이후로 첫 방문이라고 하셔서 함께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착시간이 1시 즈음이었고 숙소인 해운대까지는 좀 거리가 있어서 부산역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이동하기로 했다. 메뉴는 돼지국밥과 밀면. 워낙 여행객이 많이 드나드는 지역이라 부산역 근처에서 어렵지 않게 식당을 고를 수 있었다.
숙소는 해운대 신라스테이. 탁 트인 뷰가 좋았고 깔끔한 숙소라 부담 없이 지내기 좋았다. 해운대에서 주요 관광지까진 거리가 있어서 접근성은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창밖으로 바다를 보고 있으면 역시 붓싼은 해운대지! 하게 되는 숙소였다.
저녁으론 복집을 다녀왔는데 잘못된 메뉴 선택 때문이었는지 별다른 인상을 받진 못했다. 알고 보니 부산 사람들은 매운탕이 아니라 지리에 식초를 넣어 먹는다고 합니다. 다음에는 꼭 까치복 지리에 식초, 메모메모.
첫날이라 일곱 시 반에 일찍 일정을 마무리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조용한 호텔방에 나 홀로 앉아있으니 이게 바로 참행복. 이 날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온 가족이 아침을 챙겨 먹는 타입이다 보니 조식은 자연스레 숙소에서 먹기로 했다. 조식 가격이 그리 부담스럽지 않았는데 종류가 다양했고 모부는 특히 미역국이 맛있다고 좋아하셨다. 빵과 오믈렛, 베이컨이 올라간 웨스턴식 한 접시와 쌀국수를 메인으로 한 아시안식으로 두 번째 접시까지 싹싹 비우고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오전에는 미리 예약해 둔 해운대 스카이 캡슐을 타러 미포로 향했다. 미리 예약을 하지 않고 찾았다가 허탕을 쳤단 친구들을 몇몇 봤던지라 예약 오픈일에 미리 티켓을 예매해 뒀다. 탑승시간에 맞춰가니 웨이팅 없이 바로 탑승할 수 있었는데 탑승시간도 편도 30분 정도로 꽤 길고 창밖으로 아침 물멍을 때리니 그게 또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오후 첫 일정은 보수동 사진관에서 가족사진 찍기. 부산 일정을 짜다가 우연히 책방골목에서 흑백사진을 찍어주는 사진관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만족한 일정 중 하나가 되었다. 인물사진은 편안함이 더해질 때 사진도 자연스러워지기 마련인데 이걸 위해선 사진사의 노오력이 무척 필요하다. 그런데 책방골목 사진사님은 어색한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풀어주고 손님들을 웃게 만드는 스킬을 장착하고 계신 분이었다. 대부분의 가족사진은 가족 중 한 명이 꼭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무척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얻을 수 있었다.
인화하는데 1시간 정도 시간이 걸린다고 해서 점심은 국제/깡통시장을 둘러보다가 먹기로 했다. 재래시장에 워낙 분식집이 많기도 하고 한 집 건너 한 집이 무슨무슨 방송에 출연했단 플랜카드를 걸고 있어서 선택이 어려웠지만 부산에 왔으니 부산식 떡볶이로 유명한 이가네떡볶이로 1차, 그리고 우동과 물떡을 먹기 위해 2차로 사거리 분식집을 들렀다. 호주에서 일본식 가쓰오부시 타입의 우동만 먹다가 오랜만에 만난 한국 포장마차 스타일의 우동이 무척 반가웠다.
그리고 드디어 방문한 영도 모모스. 매장에서 독특한 뷰를 볼 수 있다는 정보만 알고 간지라 카페로 향하는 내내 정말 이런 곳에 카페가 있다고? 하고 의심을 했는데 그 끝에 거짓말처럼 영도 모모스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예전에 책 [멋있으면 다 언니]에서 전주연 바리스타의 인터뷰를 읽고 부산에 간다면 꼭 모모스에 가서 커피를 마셔봐야지 했는데 이렇게 기회가 닿아서 기뻤다.
매장이 비교적 한산했는데 알고 보니 매장 운영 시간이 오후 6시까지였다. 다행히 폐점 시간까진 아직 좀 여유가 있어서 한가롭게 커피 타임을 가질 수 있었다. 혹시 모모스 방문하실 분들은 꼭 영업시간을 확인하고 가시길 바랍니다.
해운대로 돌아와서 저녁은 편백찜을 먹었다. 사실 해운대에서 가장 방문하고 싶었던 음식점은 해운대암소갈비집이었는데 당시에는 공사 중이라 안타깝게도 갈 수가 없었다. 갈빗집 대신이라기엔 카테고리가 너무 다르지만 육류와 해산물, 야채를 골고루 부담 없이 많이 먹을 수 있는 편백찜을 하는 곳이 있다고 해서 방문했는데 서울에서 흔하게 먹을 수 있는 샤브샤브보다 고급스럽고 재료도 신선해서 배부른 저녁을 먹고 나올 수 있었다.
마지막 날은 아쉬운 마음에 일찍 일어나 해운대를 산책했다. 추운 날씨에도 이른 시간부터 바닷가로 나온 부산시민들이 많았고 심지어 맨발로 파도를 맞으시는 분들도 있어서 신기했다. 시드니에도 계절과 시간을 가리지 않고 서핑을 하는 서퍼들이 있지만 한국의 겨울은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시드니의 겨울과는 차원이 다르니까요.
해운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라 광안리에도 잠깐 다녀왔다. 시드니에 살면서 바다는 꽤 자주 원 없이 보고 산다고 생각했는데 애초에 바다와 '충분히'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 거 아닐까? 새하얗게 반짝이는 광안리 풍경을 담고 또 담았다.
이 아름다운 광안대교를 풍경으로 광안리에선 매주 토요일마다 드론쇼가 진행된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방문했던 건 평일이었고 그래서 드론쇼는 애초에 불가능한 일정이었다. 하지만 이전날 예약했던 요트 투어마저 강풍으로 인해 취소되자 여러모로 조금 아쉬움이 남았다. 해운대암소갈비집과 드론쇼, 요트 투어를 위해 부산... 다시 와야 하나?
팟캐스트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65화 <대방출! 부산 사용법>을 듣다가 부산역 근처에 차이나타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점심은 차이나 타운에서 먹기로 했다. 시원한 국물에 후추가 톡톡 뿌려진 짬뽕 한 그릇을 비우고 태성당에서 크림빵을 구입하여 KTX에 탑승했다.
오랜만에 찾은 부산은 그 자체로도 반가웠지만 모부와도 이런 방식으로 여행을 할 수도 있고 심지어 재밌다는 걸 알게 된 것이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소득이 아닐까 싶다. 호주에 살면서 오랜 시간 모부와 떨어져 있다 보니 긴 일정을 함께 보내는 것에 대한 약간의 걱정과 두려움이 있었는데 함께 길을 걷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니 이런 시간을 조금 더 늘려가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 목적지가 어디가 됐든 우리는 많이 웃고 또 좋은 추억을 만들 거야'. 걱정으로 시작했던 여행은 어떤 다짐으로 끝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