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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nald Oct 27. 2024

반드시 취소표가 뜰 거야

여수 여행기 첫 번째

띠디디 띠디디- 익숙한 알람 소리에 손을 더듬거리며 핸드폰을 찾았다. 오전 6시 40분. 한국에서 휴가를 보내는 중이었지만 평소와 같은 시간에 알람을 맞춰둔 이유는 오늘이 모부와 여수 여행을 가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평소처럼 아침밥을 챙겨 먹고 혹시 빠뜨린 건 없는지 여행가방을 몇 차례 확인한 후 어제 성심당에서 구입한 작은 메아리와 단팥빵을 챙겨서 현관문을 나섰다. 마지막으로 돌봐주고 있는 고양이를 위해 밥그릇에 사료를 넉넉히 채워놓고 방울이에게 잘 다녀오겠다고 인사도 했다. 그러니까 이 날은 무엇 하나 특별할 것 없는 보통의 하루와 같이 시작되었다. 약 한 시간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열두 시쯤 여수 EXPO역에 도착하는 KTX는 오전 8시 58분에 광명역에서 출발할 예정이었다. 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걷는데 10분, 버스를 타고 광명역 까지는 45분 정도 걸릴 테니 적어도 열차 출발 시각 20분 전에는 광명역에 도착할 거란 계산이었다. 그런데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 버스를 기다리는데 5분 후에 온다던 버스가 도착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싶어 초조한 마음에 지도 앱을 켜고 도착 예상 시간을 계속 새로 고침 하다가 택시 어플을 급하게 켜고서야 깨달았다. 이 시간이 출근 시간이었다는 걸.


집에서 나오는 걸 서두르지 않았던 이유는 3월에 다녀온 부산 여행 영향이 컸다. 그때도 같은 루트로 버스를 타고 광명역에서 KTX를 타는 계획이었는데 늦으면 안 된다는 생각과 여행으로 들뜬 마음이 더해져 생각보다 너무 일찍, 그러니까 약 한 시간 전에 광명역에 도착해 버렸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시간은 항상 느리고 천천히 흐르다 보니 그때 지루한 시간을 보내며 다음번에는 이런 일이 없도록 시간 계산을 철저히 하고 오겠다고 다짐했건만 이런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역시 뭐든 시간이 부족한 것보다는 조금 기다리더라도 여유 있게 가는 게 백 번 낫다는 사실을 또 이렇게 깨닫게 된다.


결국 잡히지 않는 택시보다 먼저 도착한 버스를 타고 원래대로 출근길 버스에 몸을 싣게 되었다. 사실 집에서 광명역까지는 먼 거리가 아니었지만 이게 출퇴근길이라면 소요 시간은 무한대로 늘어나기도 한다. 탑승한 버스를 타고 갔을 때 광명역 도착 예상 시간은 이미 기차 출발 시간 이후였다. 그래서 택시를 잡기 수월한 큰 도로로 버스가 나가면 내려서 다시 한번 택시를 잡아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우리는 아슬아슬한 시간차이로 예매해 둔 KTX를 놓칠 예정이었기 때문에 광명역까지 걸리는 시간을 5분이든 10분이든 줄여야만 했다. 이렇게 가느다란 희망을 품고 대로에 도착한 우리는 버스에서 내렸지만 곧 눈앞에 펼쳐진 엄청난 교통체증을 보고 생각했다. '아... 망했다'


무슨 수를 쓰든 제시간에 광명역까지 도착하지 못할 거란 현실을 깨닫게 되자 예매해 둔 기차표를 캔슬하고 열차 시간표를 다시 확인했다. 한 시간 후에 출발하는 다음 열차를 타는 게 최상의 시나리오였지만 이미 모든 좌석이 매진된 상태라 일단 급한 대로 11시 열차를 다시 예매했다. 그래도 이걸 타면 늦은 점심시간에라도 여수에 도착할 수 있다고 정리 승리를 하면서. 그런데 표를 다시 예매하고 나니 시간이 애매하게 떠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할지 아니면 그냥 이대로 역으로 가는 게 나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역으로 간다면 두 시간 정도를 그곳에서 보내야 하지만 그렇다고 집으로 돌아가기에도 애매한 시간이었다. 그때 문득 한 문장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우리처럼 막판에 열차표를 취소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그래, 그렇담 일단 역으로 가자'



10시 11분 열차, 10시 11분에 예매하기

그렇게 무려 두 시간 전에 역에 도착한 우리 가족은 한껏 여유롭게 역사를 둘러보고 편의점에서 간식거리를 구입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럼에도 아직 보내야 할 시간은 많았고 그 와중에 나는 한쪽 벤치에 앉아서 코레일 어플을 계속 새로고침하고 있었다. 인기가 많은 시간대여서 그런지 가끔 취소표가 뜨는 11시, 12시와는 달리 10시 11분 열차는 끊임없는 새로 고침에도 단 한 번도 취소표가 뜨지 않았다. 이미 10시가 다 돼 가고 있었다. 아, 안되려나 보다. 그래도 두 시간 늦은 열차라도 예매한 게 얼마나 다행이야 라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는데 갑자기 10시 11분 출발 KTX가 6분 지연된다는 안내가 전광판에 떴다. 거의 포기하려던 순간 정말 혹시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계속 새로 고침을 눌렀는데 그 순간 출발시간을 6분 남기고 갑자기 취소표가 떴다. 나는 제발제발 이선좌(이미 선택된 좌석)가 아니길 기도하며 서둘려 결제를 시도했다. 그리고 마침내 10시 17분 출발로 변경된 여수행 KTX 표를 10시 11분에 예매할 수 있었다. 약 5초 정도의 환희와 기쁨의 시간을 가진 뒤 우리는 신나게 플랫폼으로 향했다. 너무나도 짜릿했지만 두 번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종류의 짜릿함이었다.




플랫폼에 도착하니 얼마 있지 않아 저 멀리서 역으로 들어오는 KTX가 보였다. 예매한 좌석을 확인하고 러기지를 올리고 자리에 앉으니 그제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취소하고 예매하고 다시 취소하고 또 예매하고를 한 시간 동안 반복했더니 이제 겨우 기차를 탔을 뿐인데 여수에서 이미 하루를 보낸 사람처럼 피로가 몰려왔다. 핸드폰 화면에 뜬 코레일 페이지를 이렇게 열심히 노려본 적이 있었던가. 급격하게 떨어진 당을 작은 메아리로 채우며 내게 취소표를 하사해 준 취소자에게 마음속으로 감사합니다를 외쳤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열차표를 취소한 그분도 우리처럼 운 좋게 다음 기차표를 잡을 수 있길 바라면서.


그리고 약 세 시간 후 기차는 여수 엑스포 역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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